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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전례의 숲: 대영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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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1 ㅣ No.1338

[전례의 숲] 대영광송

 

 

미사 거행은 주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업적에 관한 기억, 그리고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찬양 가운데 하나는 정해진 날 본기도를 바치기 전에 회중이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하며 부르는 장엄한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가는 작은 “영광송”(영광이 성부와 .... )과 구분하기 위하여 “대영광송”이라 부릅니다. 또 시작 부분이 예수님 탄생 때 천사들이 부른(루카 2, 14) 찬양이기 때문에 “천사 찬미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영광송은 초 세기부터 전하는 매우 오래되고 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대영광송 본문은 그리스어 성경과 함께 필사되어 전해질 정도였습니다(5세기 “알렉산드리아 사본”). “사도헌장”(380년)이라는 그리스어 교회 문헌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라틴어로 된 가장 오래된 본문은 7세기말 북아일랜드 “반고르” 수도원의 성가집에 들어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미사경본의 라틴어 본문은, 8~9세기의 전례서에 나타납니다. 

 

성 아타나시오와 “사도헌장”의 증언에 따르면 대영광송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아침 성무일도로 노래하였습니다. 서방에서도 처음에는 미사가 아니라 성무일도에서 먼저 활용하였습니다. 그 뒤에 적어도 6세기에 로마의 주교 미사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입니다. 성탄을 알리는 첫 구절 때문에 아마 성탄 미사에만 불렀으나 곧 이어 주일과 순교자 축일에 확대했습니다. 처음에는 주교 미사에서만 부를 수 있었습니다. 다만 파스카(부활) 미사에는 예외적으로 사제 미사에서도 불렀습니다. 8세기에는 수도원 전례의 영향으로 사제 미사에서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우 오래되고 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

 

현행 로마 미사경본에 따르면 대영광송은 대림과 사순 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 미사에서 바칩니다. 주일은 주님 부활의 날로 마땅히 성대하게 경축하며 주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순시기에는 그 참회 특성 때문에, 대림시기에는 성탄의 기쁨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대영광송을 부르는 기쁨을 참습니다. 그리고 대림과 사순시기를 포함하여 모든 대축일과 축일 그리고 다른 특별히 성대한 미사에서도 바칩니다. 

 

참고로, 알렐루야는 대림과 사순시기에는 대축일에도 바치지 않습니다. 알렐루야는 시기에 따르고 대영광송은 시기가 아니라 거행의 모습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시기에 오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보통 사순 시기에 지내는 성 요셉,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는 대영광송을 바칩니다. 나아가 성 목요일 아침의 성유 축성미사와 그날 저녁의 주님 만찬 미사, 그리고 서품과 수도서약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부릅니다. 그밖에 중요한 기원이나 신심 미사 또는 다른 특별한 미사에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 설 같은 명절 미사, 회갑이나 졸업 같은 기원 미사에서 부릅니다(우리말 미사경본은 아직 교황청 추인을 받지 않았음).

 

대영광송은 모두 서서 부릅니다. 보통 사제가 먼저 시작하지만 필요에 따라 (예를 들어, 사제가 노래를 못 할 때) 선창자나 성가대가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함께 노래하거나 성가대와 함께 교대로 할 수 있습니다. 사정에 따라 성가대 홀로 할 수 있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곡이 어려워 신자들이 참여하기 어려웠던 때도 있었지만 대영광송은 본디 회중 전체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대영광송은 찬미가이기 때문에 노래로 바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나라의 중요한 예식에서 애국가를 노래가 아니라 낭송을 한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낭송을 하면 찬미가가 드러내려는 목적이 이루어지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미사경본은 회중이 노래할 수 없을 때 성가대만도 부를 수 있도록 “허용”을 합니다. 아무튼 공동체 능력이나 상황에 따라 노래로 할 수 없을 때에는 모두 함께 또는 두 쪽으로 나누어 교대로 낭송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 용서의 간청이 들어있어

 

대영광송의 본문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영광송은 미사 거행을 장엄하게 하는 요소이며 회중의 노래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 본문은 그대로 두면서 환호를 덧붙이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환호는 회중이, 본문은 성가대가 부릅니다. 예를 들어, 루르드 순례지의 “루르드 영광송”은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gloria in excelsis)을 앞뒤에 부르는 후렴으로 제시합니다. 

 

한편 모든 전례 성가에 해당하지만, 특히 대영광송을 부를 때는 악기의 도움으로 그 특성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례에 오르간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한편 대영광송을 많은 회중이 다 함께 부를 때는 “분산화음”(아르페지오) 주법의 기타 반주나 부드러운 플루트 반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금관악기들이 더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대영광송은 여러 가지 기도가 모여 하나의 찬미를 이루기 때문에 꽃다발이나 교향악에 비길 수 있습니다. 감사송과 감사기도에 나오는 감사와 찬양, 참회 예식에 있는 용서의 간청이 있습니다. 또한 “거룩하시도다”에서처럼 그분의 거룩함을 찬송하고, 신자들의 기도에서처럼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주님께 청원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 교향악에서 가장 뚜렷한 주제는 무엇보다 주님을 현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조금 달리 나타나지만, 라틴어 본문은 “하느님께 영광”으로 시작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로 끝납니다. 마치 “두 손으로 하나의 꽃다발을” 만드는 모습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곧 다양한 내용의 기도들이 되풀이하는 영광이란 주제 안에 수렴되어 하나의 기도로 변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세상이 볼 수 있게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건들에서, 그리고 직접 발현하실 때 드러납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 모습에서 가장 완전하고 뚜렷하게 나타납니다(요한 1, 1. 14; 2코린 4, 6).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얼굴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2코린 4, 6).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하느님의 영광은 예수님 자신이시며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닫고 합당하게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의 제사, 곧 미사를 거행하는 이유입니다. 또 대영광송은 이 영광을 찬양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광이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언제 어떻게 드러날까요?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 31).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모든 것을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때, 복수 대신 용서를 할 때, 재물을 비롯하여 사회적, 문화적 재산의 축적을 축적하지 않고 나눌 때, 그리고 폭력보다는 대화를 선택하고, 사회의 중요한 일에 관심을 가질 때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삶에서 십자가를 선택할 때 드러납니다. 그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실제적으로 “그분 부활의 힘”을 알게 하실 것이기(필리 3, 10)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리용의 이레네오 성인은 복음 전체를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뭉뚱그렸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 8. 16)이라는 말씀의 번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 순교자는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을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 보잘것없는 이들의 얼굴 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새롭게 십자가에 달리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관상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그러므로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을 찾은 신자는 대영광송을 부르며 부활하신 주님 얼굴을 관상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대영광송을 부르는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얻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3월호, 심규재 실베스텔(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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