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전례ㅣ미사

[미사] 전례를 살다: 미사와 신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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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1 ㅣ No.1380

[전례를 살다] 미사와 신자생활

 

 

예수님은 성찬식을 제정하신 다음 그 끝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제정하신 성찬을 앞으로도 반복하여 거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미사는 단지 최후만찬의 외적 반복 거행 예식만은 아닙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일생 가르치고 실천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성하신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예식화한 것입니다. 곧 성찬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 특히 수난과 부활의 기념제입니다. 따라서 성찬례 반복 명령은 넓게 보면 그분의 삶을 기념하고 재현하라는 명령도 됩니다.

 

이처럼 미사와 예수님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긴밀히 결속되어 있고, 예수님의 삶을 등진 미사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에서의 미사는 예수님 삶의 살아있는 거울입니다.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올바로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미사에서 체득한 주님의 희생과 사랑, 자비와 용서, 친교와 나눔 등의 거룩한 삶을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미사 중에 화해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희생 제사를 바쳤다고 만족하시겠습니까? 나와 가족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미사를 다 한 것입니까? 미사 후에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주님을 잊고 이웃을 못 본 척하고 사는 사람은 미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의무에 매인 이름만의 신자에 불과합니다. 미사가 예수님의 생애와 직결되어 있듯이 그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미사의 핵심적 의미는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는 빵 말씀과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잔 말씀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린다는 말은 성서적 의미를 모르더라도 희생을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최후만찬 중에 당신 몸과 피를 바치는 예식을 제정하신 예수님은 그날 밤부터 수난에 들어가셨고, 그 다음 날 십자가에서 실제로 목숨을 바치시어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온전한 바침과 비움,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진정 예수님의 일생은 미사 중에 거룩한 표지로 재현되듯이 당신 양들인 인류를 위하여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온전히 다 바치신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라볼 수 있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생명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성찬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헌신과 희생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곧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금씩 비워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집니다.

 

신앙인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얻는 길도 아니고, 입신출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득(得)과 실(失)을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철저하게 끝까지 위한 삶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는 “나는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는데,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1,14)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호화찬란하였어도 어느 날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납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한 줌의 재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위한 한 주간의 의무를 다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만을 보는 협소한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

 

인간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긴 그 저녁에 우리가 그분과 긴밀히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찬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상황에서 슬픈 계기 또는 기쁜 동기에서 함께 모여 성찬을 행합니다. 슬픈 동기는 예컨대 장례식 때입니다. 기쁜 동기로는 돌이나 생일, 결혼식, 회갑 등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생의 중대한 사건으로 특징지어지는 상황입니다. 성찬은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 즉 물질적 음식을 먹는데 우선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기요 또 그 계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생활 공동체이며 결속과 일치의 표지인 것입니다. 성찬은 타인의 생활, 기쁨, 고통과 운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접촉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를 말씀해 주시기 위해 성찬과 같이 인간적이고 뜻이 있는 기초적인 식사 행위를 택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나는 감각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눈으로 보고 그것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여 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청각으로 소리와 음악을 듣고 깊이 감동할 만큼 내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식사는 가장 강한 섭취 형식입니다. 식사는 전체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은 것은 내 기관의 일부, 내 안에서 동화됩니다. 식사는 사랑 자체와 비유가 되고 모형이 될 만큼 강하고 의미심장한 표지입니다. 식사는 동화의 가장 진한 형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예수님의 빵을 먹는 것은 상징적 일치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살’은 생의 수단인 음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먹는다.’는 아주 생명력 있는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의 ‘음식’이 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 속에 아주 강력하게 살아 계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갈라 2,20)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누구도 오랫동안 혼자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신앙의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주일미사 때 미사에 참여한 사람은 자기 형제의 신앙을 통해서 확증을 체험하고 성찬을 통해서 인간 성숙과 쇄신을 체험합니다. 주일미사가 없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필요로 하는 내적 힘의 소모와 마멸에 대한 평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셈을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5일 혹은 6일간의 긴장, 노동, 그리고 외향성에 비해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한 주간 168시간 중 1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그렇게 아까운 시간입니까? 우리는 신앙을 위한 최저 생활로 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는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빵이 되는 삶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양식이 되는 삶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이 주변 사회에 썩은 냄새를 피워서는 안 됩니다. 자기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경시하거나 내적으로 거절하는 배타적인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편에 있다는 말을 마땅히 들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위탁인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여러분, 우리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어딘가에 성당이 새로 건축되었습니다. 새 성전 봉헌식 때 제단 위에 그려진 커다란 그림을 덮어 놓은 베일을 벗겼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미완성’ 그리스도상을 보고 무척 실망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머리만 그려져 있지 팔과 다리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예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생각해서 이 그림을 완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팔이요, 다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손 외에 다른 손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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