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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바알,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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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3484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바알, 주인


주님(아돈)과 주인(바알)을 혼동해선 안돼… 하느님만이 진정한 주님

 

 

- 바알티. 예레 3,14에서 하느님께서 “내가 주인이다”고 선포하는 말씀이다. 위로 올려 쓴 e는 이 경우에 전혀 발음이 되지 않지만, 초보자를 위해 표기한 것이다(무성 셰와). ‘t?’에 해당하는 부분이 1인칭 단수 완료 형태의 어미다.

 

 

히브리어로 바알은 주인이란 뜻이다. 야훼 하느님을 거스르는 이교 숭배의 대표 바알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낱말에 얽힌 고대 이스라엘의 성찰을 조금 들여다보자.

 

 

주인이 되다

 

바알은 동사로서 ‘소유하다, 지배하다, 결혼하다’의 세 가지 뜻을 지녔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배반자 이스라엘”(3,12)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한다. 이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배반한 자식들아”(3,14)로 안타까이 부르시며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3,14)고 말씀하시는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너희를 바알한다’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또한 “새 계약을 맺겠다”(31,31)는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을 전해준다. 비록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못했지만, 하느님은 조상들과의 계약을 잊지 않으시어 새 계약이라는 큰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이다(31,32). 이때 하느님은 “내가 저희의 남편인데도” 계약을 깨뜨렸다고 이스라엘을 나무라셨다. 이때 ‘남편’으로 옮긴 말이 바알이다.

 

바알이 동사로서 지닌 세 가지 뜻은 사실상 ‘주인이 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 당시는 여성을 소유물로 보았기 때문에 ‘결혼하다’는 ‘여성의 주인이 되다’는 뜻과 같은 말이었다. 주인은 지배권을 행사하므로, ‘지배하다’도 결국 같은 말이다.

 

- 바알. 바알은 주인이란 뜻이다.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서, 성경에도 다양한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

 

 

다양한 주인

 

그러므로 바알이 명사로 쓰였을 때 가장 기초적 의미는 ‘주인’이다. 구약 시대에 이 말은 일상어로서 무척 빈번하게 쓰여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하는 실정이다. ‘지주’(땅의 주인. 여호 24,11)도 바알이고, 소의 ‘임자’(소 주인. 탈출 21,28)도 바알이고, ‘남편(여성의 주인. 신명 22,22)도 바알이다. ‘동맹을 맺은 사람’(계약의 당사자. 창세 14,13)도 바알이고, ‘꿈쟁이’(꿈의 주인. 창세 37,19)도 바알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용례가 있다.

 

 

일반명사가 신명이 되다

 

이렇게 바알은 본디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구약학의 전문적인 연구성과를 과감하게 단순화하면, 바알은 대략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신의 호칭으로 쓰인 듯하다. 처음에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으로 다양한 신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다가 바알은 다양한 신과 융합되었고, 결국 우가릿 등에서 특정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특히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대표적인 신으로서 소유와 성을 지배하는 무척 강력한 신으로 인식되었다.

 

 

바알과 아도나이

 

히브리 백성은 대략 기원전 13세기경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대략 기원전 12-11세기경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온 듯하다. 위의 예레미야의 예에서 보듯, 그들은 하느님에게도 바알이란 말을 적용했다. 일상의 동사와 명사로서 바알이란 말을 썼기 때문에 이런 용례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알은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하던 강력한 신의 이름이기도 했다. 추측이긴 하지만, 이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민이 깊어졌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웃 백성이 고백하는 ‘주인’이란 말을 그대로 써도 좋은 것일까? 우리도 그들처럼 바알이라 불러도 될까? 이집트 종살이에서 백성을 탈출시켜 주신 유일한 하느님을 그냥 그렇게 불러도 괜찮을까?

 

- 아돈. 바알과 거의 같은 의미지만, 공경과 섬김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 그러므로 소유주보다는 주님이란 의미에 가깝다. 아돈의 존엄의 복수형을 사용한 ‘아도나이’는 히브리어 산책 2회(가톨릭 신문 7월 10일자)에 소개된 바 있다.

 

 

선민 이스라엘은 자신만의 독창적 해결책을 발견했다. 하느님을 아돈이라 부른 것이다. 아돈은 ‘주인’이란 뜻으로 의미가 비슷하고, 신의 호칭으로 쓰였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하느님을 아돈이라 부르면 바알이라 부르는 이웃민족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엘로힘처럼 ‘존엄의 복수형’을 써서 ‘나의 주님’, 곧 ‘아도나이’로 불렀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성경은 이웃 민족의 문헌과 퍽 달라졌다. 바알이라는 일반적 호칭을 제치고 아도나이라는 독특한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주인과 주님

 

우리말 어감으로는 바알을 ‘주인’으로, 아돈을 ‘주님’으로 옮기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낱말은 발음이 엇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무척 다르다. 하느님 백성의 주님은 물건의 주인, 곧 소유주(owner)가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주님(Lord)이시다. 주님과 주인을 혼동하지 말지니, 오늘 복음 말씀을 보라. 물건의 소유를 섬기는 사람, 곧 물욕에 빠진 부자는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25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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