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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ㅣ미사

[미사] 전례의 숲: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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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1346

[전례의 숲] 알렐루야

 

 

노래가 먼저일까 말이 먼저일까? 인간의 노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무튼 한 처음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기쁨이나 고통이 너무 벅차올라 말로는 나타낼 수 없을 때 그것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나아가 움직이고 춤을 출 수도 있습니다. 노래는 말보다 더 강한 소통과 표현 행위입니다. 노래의 바탕에는 놀라움과 기쁨, 슬픔과 고통, 찬양과 감사와 같은 여러 표현이 흘러나오는 체험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관련된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간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께 응답하려 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노래를 하고 몸을 움직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 구원을 노래한 모세와 미리암의 찬미가, 예루살렘으로 모셔온 계약의 궤 앞에서 다윗의 춤, 마리아가 주님께 부른 찬가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와 관련된 사건에 개입하시면 것을 깨달으면 마음에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노래와 동작이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기쁨의 외침, 곧 환호입니다. 

 

환호는 전례에 있는 표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사의 환호들로 알렐루야 또는 복음환호송, 거룩하시도다, 축성 뒤 환호(신앙의 신비에 응답), 감사기도를 마감하는 대영송 뒤에 하는 장엄한 “아멘”이 있습니다. 주례의 기도에(본기도, 예물 기도, 영성체 후 기도)에 백성이 응답하는 “아멘”도 환호입니다. 한 독서 뒤에 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 찬미 받으소서” 응답도 환호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를 마감하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있나이다”도 환호로 칩니다.

 

전례 예식은 말과 동작으로 무엇을 말하고, 이루고, 표현합니다. 환호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작과 말 사이에 교차점에 자리합니다. 무엇에 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이루기 때문입니다. 환호의 말마디는 보통 짧고, 운율 있고, 직접적이고 강합니다. 회중은 환호로 하느님과 직접 이야기합니다. 환호를 하며 기뻐하며 동의를 하고 확인하고 참여하고 일치하고 지금 거행하고 있는 것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그러므로 환호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알렐루야 환호는 죽음에 대한 주님의 승리 말해

 

독서가 끝나면 (정해진 날에는 부속가를 부르고), 전례시기에 따라 알렐루야나 복음환호송을 부릅니다. 이 환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식을 이룹니다. 이 노래는 복음집 행렬 때도 부르지만, 단순히 행렬을 동반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환호로 신자들은 복음 선포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화답송과는 달리 앞에 읽은 독서를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들을 복음을 준비합니다. 

 

알렐루야는 히브리어 “할렐”과 “야”(야훼, 곧 주님 또는 하느님의 축약형) 두 낱말을 합하여 만들어진 말입니다. 알렐루야가 들어 있는 중요한 성경은 시편집, 특히 알렐루야 시편이라 일컫는 시편들입니다(시편 113-118.146-150). 이 환호 시편을 화답송으로 쓰는 증언은 회당 기도, 이스라엘이 지낸 파스카 경축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는 헬레니즘 유다교 시대에 축제를 표현하기 위하여 시편과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인 환호로도 사용하였습니다(토빗 13, 18 참조).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알렐루야를 사용한 증언은 이미 묵시록 19, 1-17에 나옵니다. 전례에서 알렐루야 환호는 곧바로 파스카 뜻을 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말합니다. 동서방 모든 전례에서 알렐루야는 문자적 뜻을 번역하지 않고 그래도 사용합니다. (히브리말로는 “할렐루야”인데 초대 교회 전례부터 그리스말로 “알렐루야”로 발음하였습니다. 전통에 따라 동방과 서방 모든 교회에서 “알렐루야”로 발음합니다. 근대 인문학의 영향으로 일부 나라에서 “할렐루야”로 발음하기도 합니다.)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노래해

 

알렐루야는 동방 전례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전례에 4세기 무렵에 주일 미사와 장례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장례 미사에서도 알렐루야를 부른 이유는 죽음의 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태어난 날, 기쁨의 날이라는 확신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동방 전례에서 사용한 알렐루야는 모든 서방 전례에 확장되었습니다. 알렐루야를 부른 위치는 모두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 예법에서 알렐루야는 복음에 뒤따릅니다. 그러나 로마 전례에서는 복음 앞에 불렀습니다. 

 

알렐루야는 본디 기쁨의 표지이기 때문에 부활시기에만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주일로, 사순 시기를 제외한 축일로 확대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전례에서 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리스 교회는 알렐루야에서 고통과 참회를 생각하여 주로 장례 예식, 단식일, 성 금요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알렐루야와 복음 사이의 고리는 언제나 굳건했습니다. 특히 기쁜 소식과 관련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차츰 이 특징은 더 두드러졌습니다. 알렐루야의 마지막 모음 “아”를 긴 가락으로 노래하는 “유빌루스” 관습(콥트 전례에서는 유빌루스를 20분까지 계속 부른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세에 부속가가 발전한 것들은 좋은 예입니다.  

 

알렐루야는 복음환호송입니다. 신자들은 복음 선포에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기쁨에 차 환호를 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알렐루야”를 구절과 함께 노래합니다. 알렐루야는 부활 시기를 나타내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시기에 화답송은 후렴을 “알렐루야” 말마디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부활시기에는 입당송이나 영성체송에서도 이 표현을 덧붙여 노래합니다.). 부활 성야에서는 더 장엄하게 세 번 알렐루야를 부르며 시작하고 구절은 화답송 형태로 더욱 장엄한 형태를 띱니다. 사순시기에는 독서집에 제시된 복음 환호송을 부릅니다. 사순시기에는 대축일에도 “알렐루야” 표현은 생략합니다. 

 

복음집 행렬을 할 때 알렐루야 노래는 제대에 놓인 복음집을 집어들 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환호 소리 가운데 복음집은 독서대로 행렬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노래하는 것과 그것을 노래하는 이유 사이에 연결을 더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렐루야는 모든 이가 서서 노래합니다. 알렐루야는 회중 전체의 환호이기 때문입니다. 성가대는 알렐루야를 풍요롭게 할 수 있으나 신자들을 대체할 수 없고 신자들을 빼 놓아서도 안 됩니다.

 

필요에 따라 성가대 또는 선창이 인도하며 회중은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구절은 성가대나 선창자가 노래합니다. 평일이나 축일 또는 기념일처럼 복음 앞에 독서를 하나만 할 경우에는 화답송과 알렐루야 자리에 알렐루야 시편을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알렐루야나 복음환호송을 노래로 하지 않을 때에는 생략할 수 있습니다. 생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알렐루야는 본성이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로 안 하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생일잔치에서 상을 차려놓고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노래로 안 하고 그냥 말로 하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2월호, 심규재 실베스텔(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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