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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목숨 걸고 새 시대 연 시골 처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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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1 ㅣ No.3575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목숨 걸고 새 시대 연 시골 처녀 마리아

 

 

예수님의 일생에서 그분께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시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어머니는 늘 존재해 왔다.

 

 

어머니 이전에 꿈 많은 소녀

 

세상의 모든 인간은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의 몸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다가 태어나기에 인간은 이 경험의 자취를 평생 지니고 산다. 우리는 ‘어머니’를 대할 때 그분이 여느 소녀들처럼 앞날을 꿈꾸던 꽃다운 시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각자가 그분을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 여성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곧, 자식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으로 말이다.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신앙의 여인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마리아께 드리는 상경지례(上敬之禮)는 단순히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혈연적 모성 관계만이 아니라 그녀가 일생 충실히 걸었던 ‘신앙의 길’에서 그 위대함을 찾아야 한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2,6-7 참조)라는 여성을 통해 오셨음을 정확히 기술한다. 루카 복음서만이 그녀가 예수님을 낳기 전 소녀로서 지낸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 자신이 생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 논쟁의 쟁점 가운데 있는 존재이다. 현대에도 마리아에 관한 반응은 다양하다. 가톨릭의 마리아론은 신 · 구교 간 일치를 이루는 데 여전히 논쟁의 장으로 남아있고 한국의 일부 개신교는 가톨릭을 마리아를 숭배하는 ‘마리아의

교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일부 여성 신학자들은 전통적 ‘동정녀 - 어머니’ 표상의 마리아를 평범한 여성들이 결코 동일시할 수 없는 예외적이며 이상적인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곧, 순결의 모범, 헌신의 화신, 희생적 어머니의 전형인 마리아는 완전하기는 하나 불가능한 모범이기 때문에 본받기가 힘든 존재라는 것이다.

 

오랜 역사 안에서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의 어머니’로서만 강조되었지 한 개인 마리아의 고유한 인생 여정은 거의 도외시되었다. 마리아도 고유한 인생을 가지고 역사를 살아온 개인이다. 마리아를 ‘모성’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모성 이념을 여성을 억압하는 모성 신화로 본다. 모성 신화란, 모성은 본능적이며 아이를 갖는 것이 다른 어떤 경험보다 여성을 충족시키고 양육의 최고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성 신화에 관한 인류학적, 역사적 자료들은 어머니 역할 수행이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피앗! 목숨도 걸었다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남다른 애정은 그녀가 ‘하느님의 메시아적 구원 계획을 구체화한’(루카 1,26-38 참조)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참으로 시대를 앞선 주체적 여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 해방된 자아를 지닌 존재이다. 흔히 마리아의 신앙을 강조하는 ‘피앗(Fiat)’, 곧 ‘예.’의 깊은 뜻을 안다면 마리아의 ‘예.’는 ‘예.’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 사이를 오가는 한 처녀가 일생일대의 갈림길에서 내린 결정의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심심찮게 인터넷에 나오기도 하는 중동 지역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 가운데 여성의 간음에 대한 사회적 관습을 아직도 볼 수 있다. 곧, 간음한 여성의 몸을 모래에 파묻고 목만 내놓게 한 뒤 돌을 던져 죽이는 사회적 관습이다. 이는 요한 복음의 간음한 여성 이야기(8장)에서도 그 현장성을 느낄 수 있다. 그 여자를 끌고 온 남자들은 손에 돌을 들고 이렇게 외쳤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8,5: 신명 22장: 레위 20,10 이하 참조).

 

이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마리아를 하느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았던 여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계속 설명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일반적인 십 대 소녀와는 확연히 다른 그녀를 현대 여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루카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건넨 첫 인사말이 “은총이 가득한 이여.”(1,28)라고 전한다. 성경 전체에서 ‘은총이 가득한 이’가 2인칭으로 사용한 곳은 여기뿐이다. 지구 밖의 존재인 천사와의 대화 장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나자렛에 사는 시골 처녀가 천사의 발현에 이렇게 대담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참 놀랍다.

 

그리고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예고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마리아가 즉각 하느님의 제의에 ‘예.’라고 순응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음에 대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요?’라고 질문을 한다. 결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놀랍게도 천사가 방법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지만 마리아는 이번에도 선뜻 승낙하지 않는다.

 

결국 ‘석녀인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과 천사의 비장의 카드인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마침내 ‘주님의 종이오니 뜻대로 하소서.’(1,38 참조)라고 승낙한다. 마리아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계획에 용기와 지성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응답했다.

 

 

역전의 노래, 마니피캇!

 

천사와의 만남에서 알게 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은 분명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을 방문할 마음을 일으켰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에 대해 엘리사벳과 함께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인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을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여성은 하느님께서 상대방에게 이루신 일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현존과 함께 계시도 이루어진다. 엘리사벳과의 만남에서 루카 복음에서 처음으로 ‘주님’이라는 단어가 마리아와 연결되어 나온다(1,43 참조). 긴 세월 동안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겪은 치욕을 하느님께서 없애주셨다고 기뻐했던(1,25 참조) 석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외침, 곧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은 마리아가 믿기 어려운 그 무엇을 믿었다는 것에 벅찬 감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표현된 ‘행복’(그리스어로 마카리오스)은 성경 전통에서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선 올바른 상태를 나타낸다. 곧, ‘행복’은 그분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사용된 말이다. 마리아의 ‘행복함’은 믿기 어려운 계시를 믿었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말이며, 신약에 처음 등장하는 지복선언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한 행위가 지닌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지혜와 인내의 인생 경험을 지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해주는 사랑과 용기의 말은 동정 잉태라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소명을 받은 젊은 마리아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루카는 엘리사벳에 대한 그녀의 응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1,46)라고.

 

‘마리아의 노래’(1,46-55)는 현대의 성서 해석학 분야에서도 저자, 언어, 장르 부분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종교학자 호슬리는, 마리아의 노래는 경건한 기도문을 유순한 마리아가 불렀다고 보기에는 혁명적인 구원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마리아의 노래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변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의 해방」 참조).

 

어쩌면 마리아가 마니피캇을 부른 그 순간 여성이 주목받는 역사적인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실존을 걸고 드리는 이 노래는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한 사건을 해석하는 마리아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에 대한 기대와 함께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희년 선포와 평지 설교의 구원 전망에 대한 젊은 여성 마리아의 사전 선포이기도 하다.

 

대립과 갈등이 드러나는 다음의 구절은 예수님께서 비천한 사람들을 위해 선포하신 ‘참행복과 불행 선언’(6,20-26) 말씀의 반향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1-53).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 사회적 악과 정치적 악에 직면하여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6,21)와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6,24)에서 그 의미를 심층화시킨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구원자’로 찬양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목소리로 기쁨에 겨워 하느님에 대한 한없는 감사로 시작한다(1,47). 마리아는 하느님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을 생생히 전한다.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전반적으로 관여하시고, 인간을 살려내는 일을 하신다고 알려준다.

 

무엇보다 하느님께로부터 비천한 자신이 신뢰받고 있다는 특전을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1,48)고 할 것으로 확언한다. 콘드루시에비치 몬시뇰은 참으로 갑자기 한 시골 처녀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선택을 받고 주목받는 그 자체가 세상의 가치를 바꾼 상황이라며, 이 자체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반전이라고 본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올 줄 알지만, 현실 너머에 있는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이 소명이 자신을 위한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봉사라고 받아들인다.

 

마리아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예수님의 지상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도 실행해 보지 못한 일을 행동으로 옮겼고,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했던 ‘주님의 종’으로 주목받는다.

 

우리도 힘든 인생길 가운데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삶의 자리가 있을 때,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천사의 말을 믿고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던 마리아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꼭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주체적이고 용기 있게 살아보자.

 

* 허귀희 클라라 - 아시시의프란치스코전교수녀회 수녀.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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