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7일 (화)
(녹)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연극ㅣ성극

순교극: 십자가와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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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7

순교극 : 십자가와 부활

 

 

나오는 이들 : 김씨, 이씨(김씨의 친구), 마리아, 정회장, 갓난애기, 안성댁, 사나이, 청년시절의 김씨.

시대적 배경 : 박해시대 말기.

 

 

1장

 

(막이 내려진 채 무대 좌측으로부터 허리가 굽은 백발의 김씨가 지팡이를 의지하며 힘겹게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는 미리 마련된 의자에 걸터 앉아 한숨을 길게 쉬고는 성호를 긋는다.)

 

김씨 : (숨가쁜 목소리로) 예수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간혹가다 한번씩 들르니 죄송하기 그지 없네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질 않아요. (마른 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어서 빨리 당신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할텐데…….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저를 이끌어 주시는 당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도 한가할 때면 가끔 당신과 처음 만나던 때를 생각하곤 해요. 참으로 우스운 인연이었죠. (빙긋이 웃으며) 그래요. 너무도 우스운 인연이었어요.

(서서히 조명이 꺼지며 김씨는 퇴장하고 막이 올라간다.)

 

 

2장

 

(주막집에서 청년 시절의 김씨가 이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

이씨 : 아니, 자네는 맨날 뭐가 그리 불만인가? 이래도 나쁘다. 저래도 나쁘다. 이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좀 말해보게.

김씨 : (술을 한잔 소리나게 들이키고는) 그럼 자네는 이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 간다고 생각하나?

이씨 : 뭐, 꼭 그런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는데는 지장 없질 않은가? 딱히 누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김씨 : 자네는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네. 꼭 누가 때리고 옥에 쳐넣고 해야 괴롭히는 겐가?

이씨 : 그렇지 않으면?

김씨 :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괴로움이 있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이씨 :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긴 그만하고 어서 말해보게. 그게 뭔데?

김씨 : 자네나 나나 하루종일 배타고 나가서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고기잡아 봤자 남는게 뭐가 있는가. 식구들과 먹고 살기에도 빠듯하지 않던가? 그런데 양반들을 한번 보게. 그네들은 삽질한번 그물질한번 하지 않아도 매일 매일 호의호식하니 이게 잘못이 아니고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이씨 : 아, 그거야 우리는 뱃놈으로 태어났고 그네들은 양반으로 태어났으니까 그렇지.

김씨 : 바로 그게 문제일세. 태어난 환경 때문에 생활이 달라질 수 있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에 달린거지. 평등하지 못한 사회, 지긋지긋한 가난을 되물림하는 세상, 바로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일세. 제기랄.(술을 한잔 급하게 들이킨다)

이씨 : (아무말도 하지 않고 탁자만 주시한다)

김씨 : 난 아직도 그일을 잊지 못하네. 왜 지난달에 목매달아 죽은 박씨 있지 않은가?

이씨 : 아니 그 얘긴 또 왜 꺼내는가. 그만 두게.(손을 저으며) 다 지난 일인걸 뭐

김씨 : 그냥 덮어 둘 일이 아닐세. 황소처럼 열심히 일했던 박씨에게 남은 것이 빚 밖에 더 있었느냔 말이야. 어찌 된 놈의 세상이 이렇게도 요상하게 돌아갈 수가 있느냔 말일세.

이씨 : 난 모르네. 난 몰라.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이제 더 이상 그 얘긴 그만두세.

김씨 : 생선을 많이 잡으면 뭘하나. 농사 뼈빠지게 지으면 뭘하느냐고. 다 탐관오리들 기름기 채우는데 들어가는걸. 도대체 이놈의 세상은 글렀어.

이씨 :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김씨 : 탐관오리들, 그리고 쓸데없이 호의호식하는 양반놈들을 싹 쓸어 버려야해.

이씨 : (김씨의 입을 틀어 막으며 좌우를 살핀다) 아니, 자네 미쳤는가?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말을 하는가?

김씨 : (이씨의 손을 뿌리치며)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는가? 이놈의 세상은 썩을대로 썩었어. 암 썩고 말고. (주먹을 불끈 쥐며) 내가 이놈의 썩은 세상을 바로 잡아 놓을 거야.

이씨 : (여전히 좌우를 살피며) 이 사람이 점점…….

김씨 : 그나저나 자네 혹시 천주교라고 들어 보았는가?

이씨 : 그건 또 왜?

김씨 : 거기에 입교하려고. 세상을 바로 잡는 길은 그길 밖에 없을것 같아.

이씨 : (눈이 휘둥그래지며) 뭐? (김씨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아무래도 자네가 술을 너무 많이 한것 같으이. 그만 일어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세.

김씨 : 아니야. 항간에 듣자하니 천주교에는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다는 구먼.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던 바 아닌가. 게다가 서양에 있는 힘센 나라와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조그만 나라 뒤집어엎는 것 쯤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쉽다고 그러더라고. 

이씨 : 아니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지금 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매질하고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데 그걸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김씨 : 그런건 상관없네. 난 박씨처럼 미련하게 스스로 죽지는 않아.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다가 죽으면 오히려 장부로서 영광이지.

이씨 : 자네 정말이지 제 정신이 아니구만.

김씨 : 난 벌써 마음 먹었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천주교를 신봉하겠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이제 이놈의 세상은 정말 지긋지긋해.

(서서히 조명이 꺼진다.)

 

 

3장

 

(조명이 꺼진채로 잠깐동안 처참한 신음소리가 들리다가 잠시후 조명이 켜진다. 감옥안, 우측에 김씨가 상처투성이인채로 돌아누워 있고 그 좌측에 정회장과 애기를 안은 마리아가 앉아 있다.) 

 

마리아 : (아기를 꼭 끌어 안고 어루만지며 걱정스러운듯) 이 아이가 죽으면 어떡하죠?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인데…….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정회장 : 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아 : 자꾸 아이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요. (정회장을 바라보며)정말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까요? 제가 혹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정회장 : 그럼요. 이 세상의 고통은 잠시 뿐입니다. 더 영원한 것을 바라봐야죠. 우리 모두에게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어요. 근심, 고통, 괴로움은 다 하느님께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갚아 주실겁니다. 그럼요. 암 그렇구 말구요.

마리아 : 하지만 자꾸 마음이 쓰여요. 저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이 아이만은…….

정회장 : 자 그런 말씀 그만하시고 우리 기도합시다. 어려울땐 기도가 최고지요. 오늘은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아닙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굳게 믿으며 기도합시다.

(이때 갑자기 김씨가 일어나며 정회장을 바라본다.)

김씨 : (정회장을 노려보며) 당신도 사람이요?

정회장 : (깜짝 놀라며) 아니, 토마스 형제.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요?

김씨 : 당신도 눈이 있으면 한번 보시구랴. 하느님께서 갚아 줘요? 도대체 뭐를 어떻게 갚아 준단 말이요. 이런 처참한 꼴이 하느님의 갚음이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어디 한번 말을 해 보시오. 여태까지 죽어갔던 사람들, 그리고 이 갓난아기에게 고통과 죽음 밖에 다른 무엇이 남아있오?

정회장 : 그건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요.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예요.

김씨 : (냉소하는 투로) 나도 예전에는 그 말에 혹해서 정말 좋은 세상 오는가 싶어 천주교에 입교했소. 하지만 이게 뭐요. 남은게 뭐냔 말이요.

정회장 : 고통은 잠시 뿐인 것이요. 우리에게는 더 영원한 것이 있어요. 그것을 바라 보셔야지요.

김씨 : 당신이나 실컷 바라보시구랴. 난 이제 진저리가 났소. 뭐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시며 사랑이시라구요? 그런 하느님이 왜 이 세상에 고통을 그대로 둔답디까? 왜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당신때문에 고통 받는 걸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

정회장 : 그건…….

김씨 : (말을 가로 막으며) 다 필요 없어요. 사람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구요? 그런 얘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하지만 꼭 그렇게 댓가를 치뤄야지만 구원을 주실 정도로 하느님은 계산적입니까? 그런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정회장 : 그게 아니라, 이 세상의 고통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잘못 남용했기 때문이요. 하느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김씨 : 그렇다면 이 아기는 어때요? 하느님은 이 아기에게도 인간들이 잘못 사용한 자유의지에 대한 댓가을 묻고 계시는 겁니까? 이 아기가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정회장 :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김씨 : 말을 해보세요. 그렇게 하느님은 야박합니까? 처음엔 나도 천주교에서 말하는 정의, 평화, 자유를 그리며 입교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하나 잃는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 파멸, 고통밖에 더 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구요?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구요? 그러면 뭘 합니까, 세상엔 여전히 고통 뿐인걸.

정회장 : 지금은 확실히 대답할 수 없지만 토마스 형제가 뭔가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것 같소.

김씨 : 잘못 생각했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어요.(품에서 십자가를 꺼내며) 난 배교하겠소. 그러나 결코 고통이 두려워서 그런것은 아니요. 단지 고통의 의미를 모르겠소.

정회장 : (김씨의 팔을 붙들며) 토마스 형제!

김씨 : (팔을 뿌리치며) 내가 원했던 것은 온 세상의 행복이었고 그것을 위해 강한 힘을 가진 하느님을 기대했었소. 그러나 천주교가 내게 보여준 것은 고통뿐이었고 그것을 강요하는 무력한 하느님 뿐이었소. 난 이제 그런 하느님이 필요없소. (십자가를 정회장에게 건네주며) 혹시 천당에 가서 예수를 만나거든 전해 주시요. 이제 무력함의 상징인 십자가는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고요. (말을 마치고 급하게 돌아선다.)

정회장 : (김씨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토마스 형제!

(조명이 서서히 꺼진다.)

 

 

4장

 

(10년후, 해질무렵 어물전에서 김씨가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이때 좌측에서 안성댁이 바쁜 걸음으로 걸어나온다.)

 

안성댁 : (김씨를 보고 곁에가 앉으며) 당신 여태 여기 계셨구랴. 이제 날도 저물었는데 어서 집으로 갑시다. 손님도 더 없을것 같은데.

김씨 : (쳐다보지도 않으며) 당신 먼저 들어가시오. 난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요.

안성댁 : 아니 대체 뭣 때문에 그래요? 제가 뭐 잘못한게 있어요? 아니면 돈 때문에?

김씨 : 아무것도 아니오.(술을 한잔 더 들이킨다)

안성댁 : 혹시 당신 천주교 때문에 그러시는거 아니예요?

김씨 : (깜짝 놀라며) 아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안성댁 : 당신 잠꼬대 하는것 들었어요. 하지만 이제 걱정할게 없잖아요. 박해도 끝났고 하니….

김씨 : 배교했던것 때문만은 아니요. 그냥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요. 아무리 즐거워 할려고 해도 그게 쉽게 되질 않아요.

안성댁 : 그만 잊어 버려요. 이젠 제법 재산도 모았고 아이들도 모두 건강하게 자라고 있잖아요. 뭐가 걱정할게 있어요?

김씨 : 그러게나 말이요. 그나저나 그만 들어가요.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 가도록 하겠소.

안성댁 : (일어서며) 그럼 조금만이예요. 맛있는 저녁상 봐 놓을께요.

김씨 : (안성댁의 손을 꼭 잡으며) 고맙구려.

안성댁 : 뭘요.(서서히 좌측으로 사라진다)

김씨 : (잠시 머리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당신을 배반했던 일을 후회하거나 사과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왜 이리도 자주 목이 말라오는지 모르겠어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말이예요.

(이때 갑자기 좌측에서 한 사나이가 걸어 나온다.)

사나이 : (김씨 곁에 앉으며) 안녕하시오?

김씨 : (깜짝 놀라며) 아니 누구세요?

사나이 : (빙긋이 웃으며) 그냥 지나가는 길손이요. 보아하니 혼자 술을 마시고 계시길래 술친구나 할까하고 왔소이다. 같이 한잔 할 수 있겠소?

김씨 : (술을 한잔 따라주며) 있구말구요. 마침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사나이 : (술잔을 들이키며) 이거 고맙구려. 

김씨 : (사나이 손에 붕대를 보고는 놀라며) 아니 손은 어쩌다 그 모양이 되었읍니까?

사나이 : (계면쩍어 하며) 아, 이거요? 워낙 하는 일이 목수일이다 보니까…….

김씨 : 그럼 사고로 다치신 모양이구만요.

사나이 : 딱히 그런건 아니예요. 사실은 제가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이 모양으로 만들었지 뭡니까. 그런데 사랑때문에 이리 된것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죄가 있다면 사랑이 유죄겠지요.

김씨 : 무척 아프셨을텐데…….

사나이 : 그럼요. 하지만 나름대로 기쁨도 있어요. 나에게는 비록 고통스런 일이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일이었을테니까요.

김씨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한것 같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다니…….

사나이 : 사랑은 그런거지요. 모든것을 참고 바라고 믿고. 그것이 설사 참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말이예요. 혹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본적 있으세요?

김씨 : 무슨 말이요. 벌써 결혼해서 아이도 다섯이나 있는데. 그리고 한때는 이 나라 이 민족도 무척 사랑했었소.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보려고 했던적도 있었소. 물론 끝내 포기하기는 했지만.

사나이 : 아니 왜요?

김씨 :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때문이었소. 그리고 그것을 방관만 하는 무력한 하느님 때문이었소.

사나이 : 역시 그랬군요. 사람들은 흔히들 고통만을 생각하지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더 큰 사랑은 보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지요.

김씨 : 아니 그럼 당신은 무죄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사랑이나 운운하고 있으란 말이요?

사나이 : 당신이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해요. 그들의 고통까지도 말이예요.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김씨 : 대체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뭐요?

사나이 : 바로 땅과 같은 것이죠. 버려진 채로 언제나 짓밟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땅, 침묵하며 현란하지도 않고 어둡지만 어떤 씨앗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래서 그 씨앗에 양분과 생명을 줄 준비까지도 되어있는 땅, 더 낫게 있을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것은 땅이 모든 쓰레기를 받아들일때 진실로 비옥해지기 때문이지요.

김씨 : (생각하는 듯이) 땅이라구요?

사나이 : 그래요, 너무나 미천해서 아무것도 그것을 더 더럽힐 수도 깎아 내릴 수도 없으며 굴욕을 줄 수도 없어요. 그것은 최후의 장소이며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곳이지요. 그런 사랑안에 어떻게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일 수 있겠어요?

김씨 :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고개만 숙이고 있다)

사나이 : (갑자기 일어서며) 참 내정신좀 봐. 그만 가봐야 겠어요. 술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리고 부탁이 한가지 있는데요.(품안에서 조그만 헝겁에 싼 물건을 건네준다)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 같은데 아무리 주인을 찾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선물로 받아두세요.

김씨 : (물건을 받으며) 아니 뭐 이런걸 다…….

사나이 : (좌측으로 사라지며) 그럼 내내 평안 하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날이 있겠지요.

김씨 : 그래요. 오늘 고마웠어요.(그러나 이내 사나이가 건네 준 물건을 풀러 보다가 깜짝 놀라며) 아니, 이것은 정회장에게 주었던 십자가! (무릎을 털썩 꿇으며)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서서히 조명이 꺼지며 막이 내린다. 무대에는 다시 노후의 김씨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있다.)

김씨 : 그분이 바로 당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콜록콜록. 그리고 설혹 당신이 아니었다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래요. 고통은 사랑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어요. 십자가가 부활안에서 의미를 갖듯이 말이예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저에게 다가오신 당신, 나의 친구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 십자가를 사랑하고 당신 부활을 사랑해요. 그리구 그 사랑을 전하겠어요. 죽는 날까지.

(서서히 조명이 꺼진다.)

 

(조명이 꺼진채로 다음의 시를 음악을 배경으로 낭송해도 좋다.)

 

나는 보고 들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을 보기 까지에는 

모든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보일듯 들릴듯 

내가 보고 들은 기준으로 당신을 보려 아둥바둥 할때 

먼산 아지랑이 처럼 

그때에도 당신은 

나를 느끼고 계셨습니다.

나 장님의 주는 찬미 받으소서.

 

나는 갖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을 갖게 되기 까지에는 

온몸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져야 했습니다. 

놓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모든 것들을 가지고도 덤으로 당신을 가지려 욕심을 태울때 

어느집 모퉁이 쓰레기통처럼 

그때에도 당신은 

다 헤어져 쓸모없는 나를 품고 계셨습니다. 

나 쓰레기의 주는 찬미 받으소서.

 

나는 갖고 있는 기쁨이 너무 많아 

당신의 슬픔을 나누기 까지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목구멍으로 토해내야 했습니다. 

기쁜일만 즐거운 일만 

당신의 슬픔과 아픔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라도 하듯 

목구멍으로 연신 지껄일때 

긴 가뭄의 단비처럼 

그때에도 당신은 

슬픔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 벙어리의 주는 찬미 받으소서. 

 

모든 것을 잃었을때 

슬픔과 고통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저주할때 

이 암울한 시대에 항상 먼저 사랑해 주신 주님 

이젠 제가 먼저 사랑하렵니다. 

당신이 가르쳐 주신 대로 당신과 하나 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렵니다. 

나의 주는 세세에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한국순교자영성연구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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