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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별별 이야기: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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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4 ㅣ No.1001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6)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할 수가 없어요

 

 

고등학교 1학년 바오로는 공부 문제로 부모와 함께 상담실을 찾았다. 부모의 말로는 바오로가 머리가 좋아서 중학교 2학년까지는 전교에서 순위에 들 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갑자기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혹시 어떤 정신적 혹은 정서적 문제가 있는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부모에 의해 마지못해 상담실을 찾은 바오로는 자신을 천재라고 소개하였다. 자신은 머리가 좋고 공부도 잘하지만 요즘 와서 공부에 회의를 느끼며 공부를 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고 하였다. 바오로는 행복과 인생의 의미는 성적순이 아니라면서, 요즘 명문대 나온 사람들도 실직자들이 많고 기껏해야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현실이 공부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이유라고 스스로를 진단하였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도 있고 자신의 좋은 머리를 썩히고 싶지도 않기에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바오로는 자신이 공부에 대한 동기와 욕구를 다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이고 명문대 입학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겉으로 하는 말로 봐서 바오로는 흔히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고 싶은 학생처럼 보였다. 능력은 되지만 그 능력을 세속적인 욕구에 허비하지 않고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고 하면서 요즘 아이답지 않은 가치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오로와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공부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찾고 싶은 의지나 바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부로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모든 언어와 표정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분명 지금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대화해 보니 바오로는 겉으로는 공부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계속 찾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오로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어느 정도 공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부모는 바오로의 머리가 명석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명문대에 진학할 기대와 희망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가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자신보다 공부를 못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자신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부모의 기대와 희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던 바오로에게는 이런 현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결국, 바오로는 자신이 공부를 잘했던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상위권을 유지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자 지금까지 공부 잘하고 머리 좋다는 평가로 주변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자신만의 명예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강한 욕구가 올라왔다. 지금까지 스스로 만들고 누려왔던 자신의 모습이 현실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머리 좋은 학생이라는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성적이 떨어지는 현실을 합리화할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부모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는 결코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남모르게 공부하는 전략을 개발하게 되었다. 자신이 공부를 잘하는 천재가 아닌, 공부를 전혀 안 해도 10등 안에 드는 천재로 남아있고 싶었던 것이다.

 

바오로에게는 “머리가 좋은 천재”라는 평판이 가장 듣기 좋은 칭찬이었으며, 자신은 천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커 나가면서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고 그 평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결국, 바오로는 머리 좋은 천재라는 칭찬을 계속 듣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공부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장자는 어릴 적 신었던 꼬까신이 예쁘다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신을 신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 자신과 주변 그리고 환경과 사회는 늘 변화한다. 그 변화의 과정 안에서 누구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지만, 누구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이 변화의 과정 중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 사이에서 고통, 즉 열등감(콤플렉스)을 지니고 있다. 이 간격을 평생 메꾸어 나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삶의 과제요, 동시에 자아실현을 위한 소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월 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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