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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35년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과 일제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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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4 ㅣ No.1152

1935년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과 일제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압박*

 

 

국문 초록

 

1935년 12월 6일 국경 근처 신의주 본당에서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신의주 성당 내에서 수상한 전파가 잡히면서 시작하였다. 이 ‘괴전파’는 1930년대 횡행하던 국제스파이의 소행이지 않을까 하는 기사로까지 확대 보도되었다. 그래서 평양 지목구, 신의주 본당, 나아가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이후 오보로 밝혀졌다. 이 오보는 한국 언론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일제가 조작한 국제스파이 사건을 의미하였다. 이 사건의 목적은 메리놀회에 대한 정치적 압박에 있었다.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거부와 연관 지어 살필 필요가 있다. 메리놀회는 1932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다른 교구들이 허용하여 가는 상황과 달리 그 이후에도 계속 신사참배 거부 태도를 분명히 밝히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메리놀회가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대륙 침략에 박차를 가하던 일제로서는 메리놀회를 감시하고 탄압할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계기가 국제스파이 조작사건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면, 기존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일본 당국의 신사참배에 관한 입장표명, 일본 주교들의 견해 변화, 신사참배를 바라보는 교황청의 태도 변화 그리고 일본 주재 교황사절의 적극적인 개입과 중재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일제 당국의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 조작을 통한 메리놀회에 대한 정치적 압박 또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1. 머리말

 

메리놀 외방전교회(The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는 1911년 6월 29일 월시(James Anthony Walsh, 1867~1936) 신부와 프라이스(Thomas Frederick Price, 1860~1919) 신부의 주도로 아시아 전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미국 천주교 외방전교회이다.1)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전교지 『그 먼 땅에(The Field Afar)』를 간행하여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아시아 전교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였다. 메리놀회는 1922년 11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았다. 이후 교황청 포교성성은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을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 평양 지목구로 설정하고, 패트릭 번(James Patrick Byrne, 方溢恩, 1888~1950) 신부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1939년 7월 11일에는 평양 대목구로 승격시켰다.

 

메리놀회는 한국 진출 후 한국 천주교회의 자립을 위하여 현지인 사제와 수녀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뿐만 아니라 가톨릭 운동연맹을 조직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가톨릭 운동을 선도하였으며, 『가톨릭硏究』,2) 『가톨릭朝鮮』3)을 간행하여 평양 지목구의 문서선교에 이바지하였다. 1935년에는 천주교 한국 전래 150주년 경축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즉 메리놀회는 1922년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포교권을 위임받고 1923년 본격적으로 한국 진출과 동시에 개신교 교세가 강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에서 천주교의 포교 활동에 힘썼다.

 

한편으로 메리놀회는 시련도 뒤따랐다.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만주국 건국, 1937년 중일전쟁이라는 일제의 대륙 침략 과정에서 메리놀회는 한국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일제의 종교탄압을 겪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미국 스파이’ 혐의로 감금당했고, 1942년에는 강제 추방당하였다. 해방 후 1947년에 이르러서야 한국에 재입국하여 사목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초대 평양 지목구장을 지낸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가 북한군에 납치되어 이른바 ‘죽음의 행진’ 끝에 1950년 11월 순교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제2대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John Edward Morris, 睦怡世, 1889~1987)4) 몬시뇰에 의해 1932년에 설립된 현지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장정온(張貞溫, 아네타, 1906~1950) 수녀가 행방불명되었다.

 

일제시기부터 해방 전후, 한국전쟁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메리놀회는 1977년 평양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하여 간행된 『천주교 평양교구사(天主敎平壤敎區史)』,5)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를 정리한 저서,6) 모리스 신부가 주고받은 서한과 평양 지목구 회의록 등을 엮은 자료집7) 등을 통해 학계에 소개되었다.

 

일제시기 메리놀회 관련 연구의 경우 김수태의 선구적인 연구들이 있다. 먼저 그는 1923년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한 후, 개신교가 공고히 자리 잡은 평안도에 교구를 설정하고 개신교와의 경쟁 속에서 어떻게 평양 교구를 성장시키고, 이른바 가톨릭 운동(평신도 쇄신 운동)을 펼치며,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개괄적으로 서술하였다.8) 이후 김수태는 일제시기 메리놀회의 활동을 세분화하여 1930년대 메리놀회의 가톨릭 운동,9) 신사참배 거부운동,10)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11) 『가톨릭연구』 · 『가톨릭조선』을 통한 문서선교를12) 순차적으로 정리하였다.13)

 

다음으로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기까지 메리놀회가 한국 사회에 끼친 역할에 관한 연구성과에도 주목해야 한다.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교육 활동과 문교 정책에 대한 메리놀회의 비판,14)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메리놀회가 미친 영향,15) ‘냉전의 시대’ 속에서 메리놀회의 구호 활동,16) 한국전쟁기 메리놀회와 북한 공산 정권과의 관계를 살핀 연구 등이 있다.17)

 

그 외에도 일제시기 평신도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의 교회 활동,18) 메리놀회의 창설과 한국 진출 과정 연구,19) 일제의 종교정책과 한국 천주교회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문제를 다룬 논문,20) 일제시기 성 베네딕도회와 메리놀회의 선교방법에 관한 비교연구,21) 『가톨릭연구』에 수록된 조선 천주교회사 기사를 분석한 논문,22) 그리고 평양 지목구의 설정부터 해방공간까지의 유급 회장의 활동에 관한 연구23) 등이 확인된다. 최근에는 최초의 한국인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1906~?) 주교의 삶과 사목활동을 밝힌 석사 논문이 제출되었다.24)

 

위에서 살핀 바처럼 기존 연구 검토를 통해 1923년 한국 진출부터 1927년 교구의 설정,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기까지 메리놀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존 연구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 천주교회의 관계, 나아가 일제와 메리놀회의 긴장 · 갈등 관계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0년대 메리놀회(평양 지목구)가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는 이미지만이 두드러져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는 1930년대 일제의 신사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던 메리놀회에 대한 일제의 대응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메리놀회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1930년대 일제는 1929년 경제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나아가 만주국을 건국하는 등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일제는 한국인에게 내선일체,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 통합과 사상의 통제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서울 대목구 등 다른 교구들이 점차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하지만 1936년 초반까지도 메리놀회의 경우 계속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거부하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메리놀회는 ‘눈엣가시’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는 메리놀회를 어떻게 통제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는 1935년 12월 6일 평양 지목구 신의주 본당을 표적으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일으킨다. 일제가 1930년대 국제정세의 불안 속에서 부상한 국제스파이 문제를 이용하여 ‘눈엣가시’ 메리놀회를 압박하고자 한 것이었다. 각 장에서는 순차적으로 언론이 보도하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며, 국제스파이 문제에 대한 메리놀회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 1930년대 일제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메리놀회를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는지 밝히려고 한다.

 

 

2.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 오보(誤報) 소동

 

1935년 10월 초 메리놀회의 평양 지목구는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 경축대회를 성황리에 마쳤다.25)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가 12월 5일 신의주 본당에서 메리놀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그는 10월에 경축대회를 마치고 ‘매인 곳 없이 자유스러운 선교사’가 된 것처럼 새로 만들어진 중강진 성당을 축성하는 등 국경 근처 공소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국경 근처 외진 곳에서도 경축대회 소식이 실린 신문 기사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26) 모리스는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 경축대회를 마치고 휴가를 보내듯이, 국경 근처 메리놀회 공소들을 둘러보는 상황이었다.

 

모리스가 신의주 성당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음 날 6일, 신의주 성당에서는 복잡 미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每日申報』 12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신의주부 진사정(眞砂町) 5번지 ‘카토릭교회’(신의주 성당)27)에서 무선전화전신기(無線電話電信機)를 비밀리에 설치하여 만주 안동현과 신의주 국경 일대의 사정을 아직 어떤 나라인지 모르나 자국(自國)에 통보하는 국제밀정(國際密偵)이 12월 6일 신의주 헌병대에 발각되었다고 한다. 주목되는 점은 신의주 경찰서 바로 뒤에 있는 신의주 성당에서 세관을 통해 정식으로 들어오지 않은 우수한 ‘무선전화전신기’로 무선(無線)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는 신의주로 감독기사를 급파하여 ‘무선전화전신기’의 실체를 파악 중이라고 하였다.28)

 

12월 8일 같은 날 『朝鮮中央日報』도 석간(夕刊) 기사를 통해 위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기사에 따르면, 신의주 헌병대는 이번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신의주 성당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하자 신의주 성당과 주임 신부의 사제관을 수사하여 라디오, 기타 비밀문서를 압수하고 혐의가 있는 4명을 검거하여 심문한 결과, 경성 천주교회(서울 대목구)와 ‘전기 라디오’를 통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여 군사정탐(軍事偵探)을 한 사실이 탄로 났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중앙일보사는 이 사건의 여파가 한국 천주교회 전체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예상하였다.29)

 

12월 8일 같은 날 『조선중앙일보』 조간(朝刊) 기사에서는, 국제스파이와 경성 천주교회와의 관련성은 현재 찾지 못한 상황이지만, 국제스파이 혐의는 풀리지 않아서 엄중 수사 중이라고 하였다.30)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12월 8일자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신의주 부내 ‘카톨릭교회(천주교당)’에서 ‘무선전신전화기(전기 라디오, 라디오)’를 통해 군사기밀을 정탐한 모국인 4명의 국제밀정(국제스파이)이 검거되어 취조 결과 경성 천주교회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 국제스파이 사건의 혐의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틀 후 12월 10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는 체신국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였다. 신의주 성당 내에서 무선전신기[無電機]로 경성 천주교회와 연락하여 군사기밀, 기타 제 국제정보(國際情報)를 통보한 나라는 ‘미국’으로 밝혀졌다. 무선전신기도 미국에서 직수입한 기계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의주 성당 내에서 국제스파이가 무선전신기로 한국과 만주에 있는 천주교회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 역시 확인되었다.31) 같은 날 『東亞日報』에서도 12월 9일 체신국 기술원이 ‘미국인 경영의 천주교 교회’(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압수한 무전수화기(無電受話器)가 국제스파이 전선에 이용되었는지 주목하고 있다는 보도를 하였다.32)

 

그런데 불과 일주일 만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12월 13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번 사건의 수사 당국인 신의주 헌병대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였다. 국제스파이가 활동한 증거라던 무선전신기가 발신되지 않는 수신 전용으로 밝혀졌다.33) 『조선중앙일보』도 신의주 본당이 무선전신기로 국제정보를 미국과 주고받은 혐의가 ‘아직’ 발각되지 않아서 신의주 헌병대가 압수한 무선전신기를 반납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신의주 헌병대와 신의주 경찰서에서는 신의주 본당이 비밀리에 국제정보를 미국과 주고받은 흔적이 없는지 계속 감시 중이라고 하였다.34)

 

이른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전말(顚末)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중앙일보』 12월 15일자 조간 기사를 통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당 내에 가설하였던 이번 문제의 무전기의 출처를 알아보면 지난 2월경 순천군 영유 천주교(永柔天主敎)로부터 가져온 것으로서 그것을 당국에 제출하지 않고 신의주 천주교당 내에 설치하여 이후 사용하다가 수일 전 그것이 고장이 생기어 부내 모처에서 수리하던 중이었으나 원체 기계가 미국에서 직수입한 것이라 수리할 수 없어서 그냥 사용하려 하였으나 괴상한 전파만 울리었을 뿐이었는데 이때 체신당국에서 이 괴전파를 발견하고 조사에 착수한 결과 의외로 무전기 사용허가도 안 받은 천주교당 내에서 이상한 전파가 울리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는 동시에 헌병대에 고발하여 조사에 착수하게 된 것인바 기계는 엄중히 조사한 결과 방금 고장이 생기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고장이 나기 전에 어떠한 연락이 있지나 않았나 하여 그같이 계속 조사하는 중이라고 하였다.35)

 

이번 문제가 된 무전기의 출처는 1935년 2월경 평안도 순천군 영유 성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조사되었다. 크레이그(Hugh Craig, 奇厚根, 1899~1980)36) 신부가 이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신의주 성당에 설치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전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신의주 내 수리점에 수리를 맡겼지만, 이 기기가 미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수리가 어렵다고 하여 고치지 못한 상태에서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괴상한 전파’만 울렸다고 한다. 이때 체신국에서 ‘괴상한 전파’를 발견하고 조사하던 와중에 무전기 사용신고를 하지 않은 신의주 성당에서 흘러나온 전파로 확인되어 조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신의주 성당에서 일어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사실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 문제의 ‘무전기’는 무선전화전신기인가, 라디오인가, 전기 라디오인가, 무선전신기인가, 무전수화기인가. 도대체 어떠한 기계인지부터 규명이 되어야 한다.

 

둘째, 1935년 2월부터 영유 성당에서 가져와 사용하고 있던 ‘무전기’라면 왜 12월에서야 문제가 된 것일까. 당시 일제의 체신국에서는 신의주 미력동[彌勒洞]과 평안북도 우시군(雩時郡)에 전신음향기를 설치하고 12월 6일부터 가동을 시작하였다.37) 그렇다면 신의주에 가설된 전신음향기를 가동한 첫날 신의주 성당에서 흘러나온 전파가 신의주 미력동에 설치된 전신음향기에 잡혀서 일어난 단순한 전파 탐지가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된 것인가.

 

셋째, 사건의 쟁점인 이른바 ‘국제스파이’란 무엇인가. 국제스파이는 1930년대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의 상황 속에서 상대국의 군사기밀, 기타 국제정보를 수집하여 자국에 보고하는 일이 주 임무였다.38) 신의주 성당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정말 국제스파이 활동을 한 것일까.

 

사실 1929년 경제 대공황 이후 1930년대 국제정세가 균열이 생기면서 한국에서도 비밀리에 활약하던 국제스파이가 군사기밀을 누설하는 사건들이 빈번하였다. 당시 일제에게는 국제스파이 문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부산 나병(癩病) 요양소 소장 막겐지의 ‘군사기밀누설사건’,39) 정문길·김계기 등의 ‘영등포 화약고 사건’,40) 인민유격대의 ‘비밀공작 획책 사건’41)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35년 당시는 국제 열강들이 ‘정예무기’ 제작에 힘쓰며 한편으로는 무기 제작 정찰을 목적으로 국제스파이가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정보 수집에 열중하였다.42)

 

그러므로 일제는 국제스파이 문제를 심각하게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신의주 성당의 ‘괴전파’ 사안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야 넘길 수가 없었다. 언론 역시 한국 천주교회와 국제스파이 간의 관련성을 성급하게 퍼 나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그저 과민반응한 일제와 언론에 의해 벌어진 우발 사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억울하게 의혹의 대상이 된 당시 평양 지목구와 한국 천주교회는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3. 국제스파이 오보(誤報) 사건에 대한 메리놀회의 대응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발생한 1935년 12월 6일은 평양교구가 10월에 열린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 경축대회를 성대하게 치르고 머지않은 예수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별안간 평양교구에서는 신의주 성당에서 잡힌 ‘무전기’ 전파가 언론에 의해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였을까. 신의주 성당에서 이 사건을 직접 겪은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는 예수 성탄 대축일을 지내고 12월 26일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Paolo Marella, 1933~1948) 대주교에게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에 대한 해명을 위해 서한을 보냈다. 서한의 내용을 번역하여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거짓 진술의 유일한 근거는 신의주 본당의 사제인 크레이그 신부가 세관을 통해 합법적으로 들여와 올바르게 등록된 라디오 수신 세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기계 장치에 이상이 생겼을 때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1년 이상 이 라디오 세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라디오 세트를 시계 제조업자에게 보냈습니다. 라디오 세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시계 제조업자는 틀림없이 라디오의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비밀스러운 장치라고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몇 명의 사복 경찰들이 크레이그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라디오 세트를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크레이그 신부는 친절하게도 그들이 불필요하게 라디오 세트를 조작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그 세트를 조사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크레이그 신부가 일반적인 라디오 수신 세트를 가지고 있으며, 법률에 위배되는 점이 없다는 사실을 수사관들에게 확인시켰습니다.

 

다음으로 신문에 게재된 의심스러운 혐의입니다. 크레이그 신부는 즉시 경찰서에서 기소된 부당함에 항의하였습니다. 수사관들은 이 혐의가 언론에 보도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동시에 구제를 받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43)

 

모리스가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설명하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신의주 본당의 크레이그 신부는 세관을 통해 합법적으로 통관절차를 밟고, 일제 당국에 정식 등록을 마친 라디오 수신 세트(이하 라디오)였다. 크레이그 신부는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으며 라디오를 1년 넘게 소유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고장이 난 라디오 부품을 수리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계수리공에게 라디오를 보냈다. 하지만 수리공은 기계 부품의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어떠한 ‘비밀스러운 장치’로 의심을 품었다.

 

얼마 후 수사관들이 크레이그 신부 사제관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라디오를 조사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였다. 크레이그 신부는 그들이 불필요한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조사를 승낙하였다. 조사 결과 그가 보통의 라디오 수신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점 역시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이 우발적인 사건은 언론을 통해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하였고, 크레이그 신부는 잘못된 언론 보도의 부당함에 항의하였다. 언론의 오보에 대해 수사관들은 유감의 뜻을 표했지만, 그에 따른 피해 보상에 대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마무리하였다.

 

이 서한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서 살펴본 언론 보도와 다른 사실들이 몇 가지 확인된다. 첫째,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등 언론이 보도할 때마다 문제가 된 ‘기계’의 실체가 밝혀졌다. 계속 바뀌던 무선전화전신기(라디오, 전기 라디오, 무선전신기, 무전수화기)의 정체는 ‘라디오 수신 세트’라는 점이다.

 

둘째, 언론 보도에서는 크레이그 신부가 영유 본당에서 신의주 본당으로 부임하면서 ‘라디오 수신 세트’의 사용허가를 신고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서한에서는 ‘라디오 수신 세트’가 세관의 통관절차를 무사히 밟았으며, 일제 당국에 정식 등록된 기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셋째, ‘괴전파’ 문제도 확인이 필요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신의주 성당 내에서 수상한 ‘괴전파’가 잡혔고, 그에 따라 주임 신부 크레이그가 국제스파이로 의심이 가기 때문에 수사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서한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시계점에 맡긴 고장이 난 ‘라디오 수신 세트’를 시계 수리공이 수리하지 못하자 ‘비밀스러운 장치’로 의심하면서 수사로 확대되었다고 하였다. 서한에 따르면 ‘괴전파’는 실체가 없었다.

 

넷째, 수사관의 수사 결과 크레이그는 국제스파이 혐의가 없었다. 하지만 언론 보도는 크레이그 신부가 국제스파이 활동을 한 것인 양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오보를 내보내어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지게 한 것이었다.

 

이처럼 의문점투성이의 국제스파이 사건을 메리놀회 입장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일로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해가 바뀌고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도 훌쩍 지난 1936년 1월 17일 모리스가 메리놀회 부총장 드라우트(J.M. Droubt) 신부에게 보낸 서한 내용을 살펴보자.

 

도쿄의 교황사절(마렐라 대주교)께 드린 제 편지의 사본을 보냅니다. 신의주 사건 뉴스가 미국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하논 신부도 편지를 보냈는데 같은 기사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허위 진술에 관한 정정 기사를 한국신문에서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문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신의주와 평양 경찰들은 속수무책을 시인하며 교회의 명성을 되찾을 구제책이 없답니다. 태평양 건너 그쪽에서 당신이 비난에 직면해야만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구애되지 마시고 자유로이 사실무근을 주장하셔도 됩니다. 그것은 순전히 날조한 거짓말이었습니다.44)

 

모리스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미국 메리놀회 본부에까지 알려진 상황 속에서 앞서 살펴본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첨부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국제스파이 사건이 사실무근이라는 정정 보도가 나왔다는 사실, 신의주와 평양 경찰까지 허위사실임을 시인했음에도, 안타깝게도 교회의 명성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욱이 이 사건이 미국 메리놀 본부까지 비난받는 문제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리스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서울 대목구에서 발행하는 『가톨릭靑年』45)은 1936년 1월호(1935년 12월 25일 발행)에서 「所謂 ‘新義州國際스파이問題’ 眞相」이라는 제목으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46) 『가톨릭청년』은 당시 서울 대목구의 기관지를 넘어 한국 천주교회 전체에 보급되고 있었으며, 교회 내 영향력도 큰 잡지였다. 따라서 메리놀회가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출판물 『가톨릭청년』을 통해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나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톨릭청년』은 우선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등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서특서(大書特書) 발표하야 일반의 신경을 극도로 긴장케 하였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중앙일보』 1935년 12월 8일자 조간 기사 전문을 실었다. 그리고 『가톨릭청년』에서는 신의주 본당에 사건의 진상(眞相)을 문의하여 1935년 12월 11일 신의주 본당으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서신을 받았다. 서신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전에 모모 신문에 게재된 소위 신의주 천주당(新義州天主堂) 라디오사건은 전연 사실과 반대되는 허무한 기사입니다.

 

얼마 전에 헌병대 특고과(特高課) 형사가 신부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부께서 이왕에 영유에서 사용하던 라디오가 있던바 신의주로 오실 때 가지고 오셨으나 아마 영유에서 고장이 생겼던 것이므로 신의주로 온 후에는 한 번도 사용치 못하고 부내 어떤 시게점에 부탁하야 수선케 하였으나 삼사 개월 후에야 그 같은 부속품을 구할 수 없다고 반환하였는데 이 기계가 이상한 것으로 소문이 나서 헌병대에서도 어떠한 기계인가 알아보고저 왔던 기입니다. 그때 조사하여 보고 이런 기계는 동경 대판 등 각지에 많이 있는 것이니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며 또 절대로 발신(發信)은 못 하는 것이라 하며 그것을 뵈어준 것을 감사하고 도라간 일은 있었고 신문의 기사는 다 허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오니 귀사에서는 그리 아시와 안심하시고 또는 일반 신자와 사회에 알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一九三五, 十二, 十一, 新義州天主堂

 

위의 서한을 살펴보면, 모리스가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크레이그 신부가 문제의 라디오를 영유 성당에서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이미 고장이 난 상태로 신의주 성당으로 가져왔으므로 사용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기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앞서 보도된 신의주 성당에서 잡혔다는 ‘괴전파’는 허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리를 맡긴 지 3~4개월이나 지나서야 수리를 받지 못한 채 돌려받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크레이그 신부가 시계점에 수리를 맡긴 시점은 1935년 8월 초 혹은 9월 초일 텐데 12월에서야 국제 스파이로 오해를 샀을까. 더군다나 이 라디오는 앞에서 살펴본 언론 보도 내용처럼, ‘미국에서 직수입한 우수한 기계’가 아닌 일본 도쿄나 오사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 라디오라는 점이다.

 

『가톨릭청년』은 결론에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태산명동 서일필(太山鳴動鼠一匹)이란 격으로 사실 그 자체는 이렇게 극히 평범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면서 외국의 언론 보도를 예로 들며 국내 언론의 잘못된 보도 방식을 지적하였다. 외국에서 발행되는 일류 신문의 경우 어떠한 제보를 받았을 때 냉정한 태도로 제보를 ‘음미’해 본 후 보도할 것인가 결정하는 데 비해 국내 언론은 ‘정확한 보도’를 표어로 내세우면서도 “풍설을 접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근신한 태도를 보일 만한 도량은 없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결국, 국내 언론의 국제스파이 오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의 명예를 훼손했고, 민중의 머릿속에 근거 없는 의혹을 심어주었으며, 신문사의 위신을 추락한 것이므로 풍설을 접할 때 신중하기를 바란다고 글을 마쳤다.47)

 

『가톨릭청년』은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언론의 오보로 이해하고 앞으로는 신중한 언론 보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계속 제기된 ‘괴전파’ 문제, 일본 어느 도시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라디오가 수리를 맡긴 지 3~4개월 만에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물적 증거가 왜 되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4. 일제의 신사 정책과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

 

앞 장에서 확인했듯이, 언론에 보도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결국 오보로 판명 났다. 신의주 본당 크레이그 신부의 ‘고장 난 라디오’는 왜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하는 데 도화선(導火線)이 되었을까. 신의주 헌병대 수사관들이 성급하게 ‘고장 난 라디오’를 국제스파이 사건의 물증으로 내세워 무리하게 수사하는 바람에 일이 커진 것은 아닐까.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메리놀회 평양 지목구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또한, 오보를 내보낸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등 언론사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많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판단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 의해 정말 조작된 사건이라면, 항간에 떠돌던 풍설을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성급하게 수사하고 서둘러서 언론에 제보한 신의주 헌병대가 가장 의심스럽다. 신의주 헌병대가 오보 소동의 배후라면 왜 메리놀회의 명성을 실추시킬 수 있는 1930년대 당시 국제적으로 가장 예민한 사안인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시켰을까.

 

1930년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한국 천주교회 여타 교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허용해 가는 것과 달리 메리놀회는 1936년까지 계속 거부하는 태도를 고수하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의 입장에서 신사 정책에 순종하지 않는 메리놀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과 1935년 12월에 벌어진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상관관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일제는 신사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메리놀회를 통제하기 위해 허위 사실인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메리놀회를 압박하고자 했던 것 같다. 1920~30년대 일제의 신사 정책과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관한 개괄적인 흐름을 살펴봄으로써,48) 1935년 12월 6일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확인해보자.

 

일제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후 이른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천황 중심의 정치 이데올로기 확립을 위해 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49) 신도는 1882년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되었다. 뒤이어 1899년 「제국헌법」의 공포, 1900년 「교육칙어」의 발포(發布)를 통해 천황을 절대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나아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 정책 및 식민지 지배정책에서도 신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한 후 발포한 1915년 「신사 사원 규칙」,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통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한국에 전파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1920년대까지 한국인의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 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나아가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는 등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일제는 한반도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 정책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1923년 『서울대목구 지도서』, 1925년 11월 간행한 『천주교 요리』에서 신사참배를 우상 숭배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반대하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군국주의가 본격화되던 시기인 1932년에 간행된 『조선 선교지 공동 지도서』에서도 역시 신사참배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1932년 신사참배의 허용 가능성을 모색하던 일본 천주교회와 교황사절의 중재와 개입 속에서 신사참배를 용납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천주교 요리』 2판에서는 신사참배는 국가 예식으로 인정되므로 용인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하지만 메리놀회는 1932년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와중에도 반대 견해를 고수하였다. 1932년 9월 18일 평양 성모보통학교가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평양의 개신교계 학교들과 함께 참석을 거부하였다.50) 그해 10월에는 평양 지목구 중화 본당 콜맨(Walter Coleman, 高) 신부의 신사참배 반대 의견서 「De Jinja Sampai」를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의 허락하에 주일 교황사절 무니(John Edward Mooney, 1931~1933) 대주교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51) 메리놀회는 1934년 5월 15일 열린 참사회 회합에서도 천주교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1935년에 들어서도 메리놀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메리놀회의 구호사업을 통해 ‘미신행위 참가’를 완강히 거부한 결과 잃었던 교육계의 위신을 회복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52) 하지만 그해 6월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가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를 만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그의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53) 그리고 7월 30일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가 서한을 통해 평양 지목구의 신부들이 주일 교황사절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기에 이르렀다.54)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와의 만남 이후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의 서한까지 받은 모리스는 신사참배 반대 견해를 계속 고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10월 3일부터 6일까지 평양 서포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회 연례 교구장 회의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합의가 이루어지자 모리스 역시 한국 천주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저는 연로하시고 경험이 풍부하신 교구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며, 신사참배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55) 그럼에도 모리스가 서한에서 “제 휘하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교황사절의 원의(願意)에 따른 이 접근책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밝혔듯이, 메리놀회 신부들은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6년 초반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32년 이후 한국 천주교회 여타 교구들은 일제의 신사 정책에 점차 순응하여 갔음에도 메리놀회는 그 이후에도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이 일어난 1935년 12월에도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거부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눈엣가시’ 메리놀회를 꾸준히 감시하며, 압박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빈번히 일어나는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엮기 수월한 국경 근처 신의주 성당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풀이된다. 신의주 성당은 신의주 경찰서 바로 뒤편에 있었으므로, 일제 입장에서 감시 또한 다른 평양 지목구 본당들에 비해 수월한 조건이었다.

 

신의주 성당이 일제의 감시 대상이라는 영문도 모른 채 1935년 3월 페티프렌(Roy D. Petipren, 邊聖行, 1893~1977) 신부에 이어 5대 주임으로 크레이그 신부가 영유 본당에서 신의주 본당으로 부임하였다. 크레이그 신부는 전임 신부의 문맹 퇴치사업을 계승, 확장하는 데 힘썼다. 1935년 7월에는 신의주 지역 전체가 대홍수로 큰 피해를 보자 대대적인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수재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부임 후 봄부터 여름까지 바쁜 나날을 보낸 크레이그 신부는 8월 늦여름 혹은 9월 초가을 어느 날 영유 성당에서부터 고장 난 채 가져온 라디오를 수리하기 위해 시계점에 수리를 맡겼다. 하지만 3~4개월이 지난 12월이 다 되어서도 수리를 받지 못하고 고장 난 라디오를 돌려받았다.56)

 

사실 일본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라디오임에도 국경 근처 신의주 부내(府內) 시계점 수리공은 처음 접한 생소한 라디오를 ‘비밀스러운 장치’로 의심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의심은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는 메리놀회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신의주 경찰 당국에 곧바로 전해졌고, 신의주 헌병대가 앞장서서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비화시켰다. 그리고 한국 언론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국제스파이 사건’으로 대서특필하였다. 그 결과 이 기사들이 오보로 판명된 사건임에도 메리놀회는 명성에 큰 상처를 입는 것으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지금까지 일제가 조작했다고 의심되는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았다. 이 사건에는 단순한 언론의 오보 차원을 넘어서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잠재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일제의 신사 정책을 계속 거부하는 ‘눈엣가시’ 메리놀회를 압박하기 위해 조작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1930년대 일제가 한국 천주교회에 신사참배를 얼마나 종용하고자 했으며, 거기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메리놀회를 억압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즉 이 글은 기존 연구가 분석하지 못한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와 메리놀회의 긴장 · 갈등 구조를 세밀하게 살펴보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1935년 12월 6일 국경 근처 신의주 성당에서 발생한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에 대한 한국 언론의 오보 사건, 그에 대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반응, 마지막으로 일제의 신사 정책과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국제스파이 사건의 발단은 평양 지목구 신의주 성당에서 수상한 전파가 잡히면서 시작되었다. 이 ‘괴전파’가 1930년대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던 국제스파이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확대 보도로 이어졌다. 그래서 신의주 본당 나아가 평양 지목구 전체가 당시 쌓았던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 메리놀 본부까지 이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한국 언론의 ‘신의주 국제스파이 사건’은 결국 오보로 밝혀졌다. 이 오보는 언론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일제가 조작한 국제스파이 사건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신의주 국제스파이 조작사건’이 1930년대 메리놀회의 신사참배 거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리놀회는 1932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다른 교구들이 허용하여 가는 상황과 달리 그 이후에도 계속 신사참배 거부 태도를 밝히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메리놀회가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 대륙 침략에 박차를 가하던 일제로서는 메리놀회를 감시하고 탄압할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계기가 ‘신의주 국제스파이 조작사건’이었다.

 

메리놀회가 왜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면, 기존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일본 당국의 신사참배에 관한 입장표명, 일본 주교들의 견해 변화, 신사참배를 바라보는 교황청의 태도 변화 그리고 일본 주재 교황사절의 적극적인 개입과 중재 때문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일제의 ‘신의주 국제스파이 조작사건’을 통한 메리놀회에 대한 압박 또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 이 논문은 2019년 9월 21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최 제104회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발표한 “일제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압박과 ‘신의주 국제스파이 조작사건’” 중 일부 내용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참고문헌


1. 자료

 

『가톨릭硏究』

『가톨릭朝鮮』

『가톨릭靑年』

『東亞日報』

『每日申報』

『메리놀 문서』

『朝鮮中央日報』

『한국가톨릭대사전』

 

2. 저서

 

이정순 엮음, 『목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3. 논문

 

김수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목이세(John E. Morris)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교회사보』 29, 1999.

_____,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 운동」, 『敎會史硏究』 1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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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日本 神道의 침투와 1910·1920년대의 神社問題」, 『한국사론』 16, 1987.

방상근,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尹善子, 「日本 軍國主義 宗敎政策과 朝鮮 天主敎會의 神社參拜」, 『韓國史硏究』 98, 1997.

정동훈,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가톨릭대학교 석사논문, 1994.

_____,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교회사연구』 11, 1996.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敎會史硏究』 4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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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메리놀회 본부의 위치에서 유래한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본부가 1912년 뉴욕 오시닝(Ossining) 근처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메리놀 회원들은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간구하였고,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메리놀이 선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2) 1934년 1월 메리놀회 평양 지목구는 『가톨릭연구강좌』를 간행하였다. 『가톨릭연구강좌』는 1933년 9월 평양 지목구에서 실시한 전교 회장들의 강습회 후 강습을 꾸준히 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간행되었다. 『가톨릭연구강좌』는 1934년 6월호부터 『가톨릭연구』로 제호를 변경하고, 1934년에 조직된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연맹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3) 『가톨릭연구』는 1937년 1월 『가톨릭조선』으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되었다. 이후 1938년 12월 경제적인 어려움과 식민 통치에 협력을 강요하는 일제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4) 모리스 신부는 1923년 8월 24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1월에 입국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6월 27일에는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5)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6) Lane, Raymond A., Ambassador in Chains : the life of Bishop Patrick James Byrne, 1888-1950, P.J. Kenedy, 1955 ; 레이먼드 A. 레인, 박준영 역, 『기억의 돋보기 -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바오로딸, 1994.

 

7) John Edward Morris, Father John E. Morris, M.M., Seoul: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1994 ; John Edward Morris, 이정순 엮음, 『목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8) 김수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 - 목이세(John E. Morris)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교회사보』 29, 1999 ; 『한국사회사연구』, 나남, 2003.

 

9)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 운동」, 『敎會史硏究』 19, 2002.

 

10)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2004 ; 『미주지역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4.

 

11)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韓國史學史學報』 11, 2005.

 

12) 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가톨릭연구』·『가톨릭조선』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2006.

 

13) 김수태,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29, 2007.

 

14) 여진천, 「제1공화국 초기 교육 활동과 문교 정책에 대한 비판 - 메리놀회 문서를 통하여 -」, 『敎會史硏究』 23, 2004.

 

15) 여진천,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敎會史硏究』 32, 2009 ; 최선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敎會史硏究』 47, 2015.

 

16) 최선혜,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敎會史硏究』 34, 2010.

 

17) 최선혜, 「한국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 『敎會史硏究』 44, 2014.

 

18) 양인성, 「일제하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의 교회 활동」, 『敎會史硏究』 47, 2015.

 

19)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1911~1923」, 『敎會史硏究』 49, 2016.

 

20) 정동훈,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가톨릭대학교, 석사 논문, 1994 ;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교회사연구』 11, 1996 ; 尹善子, 「日本 軍國主義 宗敎政策과 朝鮮 天主敎會의 神社參拜」, 『韓國史硏究』 98, 1997 ; 방상근,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1) 李錫載, 「일제 강점기 독일 芬道會와 미국 메리놀회의 선교방법 비교연구」, 『仁荷史學』 9, 2002.

 

22) 김규성, 「『가톨릭연구』에 나온 조선천주교회사 기사 연구」, 『교회사학』 14, 2017.

 

23)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 전교회장의 활동과 의의 : 1923~1950 - 평양교구 유급(有給) 전교회장을 중심으로 -」, 『敎會史硏究』 51, 2017.

 

24) 우요한, 「‘하느님의 종’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삶과 사목활동에 관한 연구」, 가톨릭대학교 석사 논문, 2019.

 

25) 『가톨릭조선』 1935년 11월호는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 축하대회 특집호로서,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행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6) 이정순 엮음, 『목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453쪽.

 

27) 『每日申報』 · 『朝鮮中央日報』 · 『東亞日報』의 보도기사에서는 신의주 성당이 ‘카토릭교회’, ‘신의주 천주교’, ‘신의주 카톨릭교회’, ‘신의주 천주교당’ 등으로 쓰였다. 신문 기사를 인용하는 부분에서는 신문에서 지칭하는 대로 작성하였다. 이들 모두 ‘신의주 성당’을 지칭한다.

 

28) [新義州特電] 신의주부 진사정(新義州府眞砂町) 五 『카토릭』교회(敎會) 안에 무선전화전신기(無線電話電信機)를 비밀히 설치(設置)하고 안동현(安東縣) 신의주(新義州) 국경 일대(國境一帶)의 사정을 모국 본국에 통보(通報)하고 잇섯든 두려운 국제밀정(國際密偵)의 암약사실(暗躍事實)이 六일 아침에 신의주 헌병대(新義州憲兵隊)의 손으로 발각되엿다. 설치하엿든 기게는 모국(某國)으로부터 직수입(直輸入)한 七구(球) 우수한 기게로 신의주 경찰서의 바로 뒤 카토릭교회 안에서 무선(無線)을 치고 잇섯다는 것은 주목되고 잇스며 체신국(遞信局)에서는 감독기사(監督技師)가 당지에 출장하야 취조 중이다(『每日申報』 1935년 12월 8일자 「『카톨릭』敎會 안에 無線電信을 裝置 국제적 밀정 노릇을 한 혐의로 신의주 헌병대 활동」).

 

29) [신의주에서 본사 특파원 김승현 전화] 최근에 여러 가지로 미묘하야가는 국제정세에 비쳐서 조선에도 각지에서 국제 『스파이』가 암약하고 잇다 함은 루보한 바와 갓거니와 신의주 헌병대에서는 수일 전부터 돌연히 활동을 개시하야 부내 천주교당을 습격하고 엄밀한 가택수사를 한 결과 라듸오, 긔계와 기타 여러 가지 비밀문서를 압수하는 동시에 동 천주교당에 잇는 모국인 四명을 인치하고 방금 엄중한 취조를 게속하는 중이라는 바 그들은 벌서 전부터 경성에 잇는 천주교와 전기라듸오를 가지고 비밀리에 련락을 취하야 국제적으로 군사정탐을 한 사건이 탄로되어 방금 동 헌병대에서는 사건을 중대시하고 잇다는데 취조에 따라서는 전 조선적으로 확대될 듯도 하야 사건의 추이는 자못 주목되고 잇다(『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8일자 「新義州를 根據 삼고 國際 “스파이” 暗躍 『라듸오』로 軍事機密을 偵探 憲兵隊에 發覺被捉」).

 

30) 석간긔보=신의주를 근거지로 하고 국제『스파이』가 임중활략하야 『라듸오』로 군사긔밀을 정탐하는 사실이 헌병대에 발각되어 모국인 등 네 명이 검거취조를 밧든 중이라 함은 석간에 긔보한 바인데 그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들과 경성 천주교와는 아모 관련이 업는 것만은 판명되엇스되 아즉도 의심스런 점이 잇서 계속하야 엄중취조 중이라 한다(『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8일자 「新義州의 國際『스파이』사건 繼續하야 取調中인데 京城天主敎와는 無關判明」).

 

31) [新義州] 긔보=신의주부 진사정(眞砂町) 천주교당(天主敎堂) 내에서 비밀리에 무선전신긔(無電機)를 장치하여 가지고 경성 천주교(京城天主敎)와 련락을 하야 군사긔밀(軍事機密) 또는 기타 제 국제정보(國際情報)를 미국(米國)에 보고하고 잇든 사실이 신의주 헌병대(新義州憲兵隊)에 탄로되엇다 함은 긔보한 바 어니와 동 사건에 대하야 체신국(遞信局)에서는 기사와 감독(技師及監督)이 수일 전 신의주로 급거 출동하야 조사하여 본 결과 전신긔는 미국에서 직접 수입하여 온 七급(及) 지파장긔(知波長機)로 판명이 되엇다 하며 사건은 그 후 조사한 결과 신의주를 중심으로 조선에 잇는 천주교 급 만주에 잇는 각 천주교와 련락한 사실이 판명되엇다하야 사건은 각처로 비화(飛火)될 듯하다(『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10일자 「使用튼 無電機는 七級 知波長機로 判明 遞信局 技師, 監督이 來新 調査」).

 

32) [신의주 九일발] 신의주부 진사정(新義州府眞砂町) 미국인 경영의 천주교 교회(天主敎敎會) 안에 무전수화기(無電受話器)가 설치되어 해외와 모종의 연락을 취하고 잇는 듯한 사실을 신의주 헌병대(新義州憲兵隊)에서 탐지하고 문제를 중대시하야 실지 조사를 한 후 고발하엿는데 九일 체신국(遞信局)으로부터 기술원이 신의주에 출장하야 조사 중인데 혹은 국제스파이 전선에 활동하지나 아니하엿나 하야 매우 주목하고 잇다고 한다(『동아일보』 1935년 12월 10일자 「天主敎會 內에 無電을 設置 海外와의 某種聯絡이 잇나 하야 新義州憲兵隊가 告發」).

 

33) 신의주부 진사정(新義州府眞砂町) 『카톨릭』 교회에 무선전신긔(無線電信耭)를 장치하야 둔 것을 신의주 헌병대(新義州憲兵隊)에서 발견하고 모종의 밀정행동으로 사용하는 것 아닌가 하고 조사 중이든 사건은 그 후 조사한 결과 발신(發信)은 못 하는 것이고 수신(受信)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판명되야 문제가 업게 되엿다고 한다(『每日申報』 1935년 12월 13일자 「新義州 카톨릭 密偵嫌疑 氷解」).

 

34) [新義州] 루보=신의주 천주교(新義州天主敎)의 국제『스파이』 혐의사건에 대하야는 루차 보도한 바어니와 그 후 상세한 것을 조사하여 보면 전긔 천주교에서 가설하얐든 무선전신긔를 가지고 미국 본국과 국제정보를 련락한 사실은 아직까지 발각되지 않었으며 가설하얐든 무전긔는 체신국에서 도로 내어주었다 하는데(당시 비밀문서 압수와 혐의자 五명 검거는 오보) 그러나 헌병대와 경찰당국에서는 모든 방면으로 보아 그들이 비밀리에 국제정보를 련락한 듯한 흔적이 없는가 하고 계속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엄중감시 중이라 한다(『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15일자 「國際密偵被疑事件 事實有無尙 不明 押收했든 無電機 返還하고 堂局은 繼續 調査 中」).

 

35) 『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15일자 「發覺의 原因은 機械 故障으로」.

 

36)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명 기후근(奇厚根). 미국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에서 출생. 메리놀회 신학교와 워싱턴 가톨릭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수품 후 5명의 동료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평남 영유(永柔)의 조선어연구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1926년 은산 본당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 1928년 성당을 순천으로 이전하는 등 1933년까지 사목했다. 1933년 신의주 본당 5대 주임(필자 주 : 크레이그 신부는 1933년이 아니라 1935년 3월 신의주 본당에 부임하였다), 1940년 마전동 본당 3대 주임 등을 역임했다. 마전동 본당 주임으로 재직 중이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체포 ·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평양교구의 모든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강제 추방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6, 8548~8549쪽).

 

37) 평안북도 우시(雩時)와 신의주 미력동(新義州 彌勒洞)에도 전신음향긔(電信音響器)를 설치하고자 체신국에서는 양지에 그 준비와 공사를 하든 중 이제 완성이 되얏슴으로 六일부터 실시하게 되얏다 한다(『每日申報』 1935년 12월 6일자 「電信音響器」).

 

38) 『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8일자 「新義州를 根據 삼고 國際 “스파이” 暗躍 『라듸오』로 軍事機密을 偵探 憲兵隊에 發覺 被捉」 ; 『朝鮮中央日報』 1935년 12월 10일자 「使用튼 無電機는 七級 知波長機로 判明 遞信局 技師, 監督이 來新 調査」.

 

39) 『朝鮮中央日報』 1935년 1월 17일자 「國際스파이嫌疑로 癩病界의 權威者 米國人 『막』씨 送局」.

 

40) 『朝鮮中央日報』 1935년 2월 21일자 「怪人三名을 取調」.

 

41) 『東亞日報』 1935년 8월 22일자 「人民○○遊擊隊 시켜 秘密工作을 劃策」.

 

42) 『朝鮮中央日報』 1935년 3월 16일자 「國際스파이 暗曜 外國人의 行動을 團束」.

 

43) 『메리놀 문서』 폴더 8, 「1935년 12월 26일자 모리스가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44) 이정순 엮음, 앞의 책, 463쪽.

 

45) 1933년 3월 6일에 개최된 전국 5교구 주교회의에서는 ‘5교구 출판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의 책임하에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발간하도록 하였다. 당시 주교회의에서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톨릭청년』을 새로 발간하고, 이 잡지와 『경향잡지』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1933년 6월 창간된 『가톨릭청년』은 당시 가톨릭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교리 정립과 청년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고, 사회 계몽과 민족 문화의 발전에 보탬이 되었다.

 

46) 「所謂 ‘新義州國際스파이問題’ 眞相」, 『가톨릭靑年』 1936년 1월호, 70~71쪽.

 

47) 그러면 태산명동 서일필(太山鳴動鼠一匹)이란 격으로 사실 그 자체는 이렇게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외국에서 발행하는 일류신문과 같이 무슨 정보를 받었을 때에는 냉정한 태도로 이 정보를 한번 음미하야 본 후 게재가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정확한 보도」를 표어로 하는 각 신문지는 이런 풍설을 접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근신한 태도를 취할 만한 도량은 없는가? 이런 풍설을 그대로 기재하는 것은 신성한 종교의 생명인 명예를 크게 손상하는 것이오 민중의 머릿속에 근거 없는 의혹을 심어주어 부즐없는 번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오 사실이 판명됨에 따라 신문사 자체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것인 만큼 이런 종류의 풍설을 접할 때마다 반듯이 그것을 다른 소식보다 특별히 취급하야 먼저 사실 유무를 철저히 조사함이 극히 필요한 것이다(「所謂 ‘新義州國際스파이問題’ 眞相」, 『가톨릭靑年』 1936년 1월호, 71쪽).

 

48) 연구사 정리에서 살펴본 신사참배 문제를 다룬 김수태(2004), 정동훈, 윤선자, 방상근의 논문과 모리스가 메리놀회 본부와 주고받은 서한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49) 신도의 확립과정에 관하여는 김승태, 「日本 神道의 침투와 1910·1920년대의 神社問題」, 『한국사론』 16, 1987 참조.

 

50) 『每日申報』 1932년 11월 11일자 「平壤府內私立十校 慰靈祭場에 不參 당국의 공식 통첩을 무시하고 調査되는 대로 處斷」 ; 『朝鮮中央日報』 1932년 11월 13일자 「戰沒者慰靈祭에 平壤十一校 不參加로 學務關係當局에서 問題되여 始末書써오라 命令」.

 

51) 콜맨 신부의 신사참배 반대 의견서 내용은 정동훈, 앞의 글, 1996, 85~90쪽 참조.

 

52) 떠돌이와 불구자, 불쌍한 노인들의 은신처들은 평양과 진남포와 의주에서 관리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평양의 극빈 환자용 요양소는 우리가 ‘미신행위 참가’를 완강히 거부한 결과 잃었던 교육계의 위신을 다시 찾게 합니다(이정순 엮음, 앞의 책, 395~396쪽).

 

53) 도쿄에 가서 교황사절과 종교적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P.J.B. 주교님과 악수도 하고 영화도 몇 편 검열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제가 그 문제에 관해 현재 느끼는 것과 같이 이웃이 하는 대로 따를 수 있게 되어 약간 가벼워졌습니다. 그 외 이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다른 물리적 변화는 없습니다(이정순 엮음, 앞의 책, 404쪽).

 

54) 나는 한국에 파견된 몇몇 훌륭한 선교사들이 교황사절 마렐라 몬시뇰 각하의 정책과 통할에 의문을 품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어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메리놀은 사적으로 각하와 두터운 친분을 지녀왔기에 자연히 내 아들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그분께 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황스럽습니다.

아무튼, 마렐라 대주교가 교황님 대리라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장상이며 우리는 그분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그분의 고위직은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하므로 그분의 통할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라 하겠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이해시켜야 할 우리에겐 국가 통치자들과 협력이 가장 중요하고, 우리는 성청이 한국을 위임한 이래 그 일을 거의 예외 없이 해왔습니다(이정순 엮음, 앞의 책, 414쪽).

 

55) 평양의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교구에 비해 좀 다르면서도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었습니다. 교황사절 및 다른 교구장들과 동석했던 최근 회의 후 저는 훨씬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보조를 맞출 태세가 된 느낌이 듭니다. 이 일치가 가장 중요하기에 저는 연로하시고 경험이 풍부하신 교구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제 휘하에 있는 사람 중에서 교황사절의 원의에 따른 이 접근책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콜만 신부가 고정된 이론적 원칙들을 선포했기 때문에 이 새로운 현안에 직면한 우리의 거동에 합세하여 실용적인 태도를 보일 사람을 얻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이정순 엮음, 앞의 책, 423쪽).

 

56) 신의주 본당의 약사(略史)와 크레이그 신부의 신의주 본당 사목 활동은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참조.

 

[교회사 연구 제55집, 201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민석(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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