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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46-50: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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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105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6)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I : 춘천교구 진출

 

 

이번 호부터 5주에 걸쳐 6·25전쟁 후 가장 어려운 시기부터 지금까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에 대한 기록을 연재한다. 이 글은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가 한국 선교 60년을 맞아 발간한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합니다’라는 기록문에서 인용했음을 밝혀두며 이를 허락해 주신 저자 이 애리사 수녀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1955년 6월 춘천 교구장이었던 구 토마스(Thomas F. Quinjan) 주교의 요청으로 의사와 간호사 수녀들이 춘천에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미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고, 목포에 있는 수녀원에서 몇 개월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그해 11월 춘천으로 오게 되었다. 그 시기는 한국전쟁의 여파로 강원도 지역은 빈곤, 질병 등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였는데, 파견된 수녀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보다도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추위였음을 기록은 전하고 있다.

 

임시 진료소 시절

 

골롬반 수녀들은 죽림동 성당 옆, 2칸의 방이 있는 작은 집에서 골롬반 의원을 개원하고 임시 진료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은 의원이 몇 개월 후에는 인근의 환자들뿐 아니라 멀리서 오는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수녀들은 더 많은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 병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 계획을 추진시켜 나갔다. 수녀들은 오전과 오후에는 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그 외 시간에는 가정 방문을 했다.

 

새 병원 골롬반 의원

 

1956년 10월 3일, 아일랜드와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보내온 후원금으로 지어진 건물에 새 골롬반 의원이 개설되었고, 그 후 1962년 2월 10일에는 골롬반 의원을 죽림동 약사리 언덕으로 확장 이전했다. 매일 아침 8시 이전부터 2~3백 명이 넘는 환자들이 병원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더이상 새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고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함께하는 한국인 교리 교사들과 병원 직원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어 수녀들은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당시 춘천은 한국전쟁 직후라 북한에서 탈출한 피난민들이 많았고, 결핵과 빈곤 그리고 얘기치 않았던 가족들과의 헤어짐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골롬반 수녀들은 춘천소재 미군 부대 우체국을 통해 미국의 후원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보내주는 의약품을 정기적으로 받았다. 이 후원은 수녀들이 의료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19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7)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II : 의료활동 - 성 골롬반 의원

 

 

무의촌 진료

 

1966년 골롬반 수녀들은 춘천 주변 지역으로 무의촌 진료 활동을 펼쳐 나갔다. 산골 등 오지에서부터 병원에 올 수 없는 노인들이나 어린이들, 여성들을 직접 찾아가 진료하고, 어린이 예방 접종 등 질병 예방을 위해서도 힘썼다. 또한 전문화된 의료 시설을 갖추지 못해 위급하거나 위험한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서울한미재단’ 을 통해 ‘하와이 아동정형외과 병원’ 과 연계하여 화상 및 심각한 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가족계획센터 및 ‘행복한 가정운동’

 

1970년대 초 한국 정부는 두 자녀 갖기 운동을 벌이면서 정책적으로 가족계획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모든 의료 기관들은 정부의 가족계획 정책을 따르며 참여해야 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유교적 인습으로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기로, 아들을 낳기 위해 낙태 수술과 여성의 불임 수술이 가족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특별히 조산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수녀들에게 이 정책은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개인 병원 등은 앞다투어 3개월 무렵이 되면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는 기구들을 갖추었고, 이렇게 성별이 감지된 후에는 낙태로 이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 토마스(Thomas Stewart)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의 가족계획 정책에 대해 심히 우려를 표명했고, 골롬반 수녀들은 주교의 입장을 지지하며 춘천 골롬반 의원 산하에 아기들을 위한 병동과 가족계획센터를 설치하기 위해 병원을 증축했다. 그 당시 산간벽지에 사는 환자들이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는 골롬반 의원이 유일했다. 그래서 골롬반 의원 근처에는 민박이나 여관이 급증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멀리서 온 환자들과 가족들이 완치될 때까지 치료를 받으며 머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3년 마침내 가족계획센터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이 센터에서는 젊은 부부와 미혼 여성들을 상대로 자녀 출산 계획 상담을 해 주었고, 생명존중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고, 인공 낙태를 막기 위해 점액 관찰법 및 기초 체온법에 의한 자연 피임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더불어 청소년 순결 교육과 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교구와 본당에서 일할 봉사자를 양성하고, 여러 사회단체 및 교육 기관 등과 함께 생명 존중 운동을 펼쳐 나가는 데 주력했다. 1975년 박 토마스 주교와 가톨릭 의과 대학에서 주도한 ‘행복한 가정운동’ 은 하나의 사목 운동으로 강조되었고, 부모 교육과 대화 방법 등 가족 간의 가치를 되새기고 유대감을 갖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특별히 ‘자연 피임법을 통한 가족계획’ 방법을 홍보하였는데, 골롬반 수녀들은 가족 상담을 위한 상담사(당시 가족계획 지도원) 교육을 비롯하여 기본 상담 기술, 영적 · 의료적 · 사회학적인 측면을 고려한 가족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헌신적이고 훌륭한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었고, 춘천 가족교육센터는 한국 천주교회 14개 교구에 가족계획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배출했다. [2019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8)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III : 의료활동 - 성 요셉 의원

 

 

1962년 구 토마스(Thomas F. Quinjan) 주교는 춘천뿐 아니라 강원도 삼척에도 3층짜리 병원을 짓고 골롬반 수녀들을 초대했다. 3층에 수녀원과 성당을 조성한 후 우선 두 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이 시기에는 결핵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많았는데, 환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병원을 찾아 왔다. 당시 삼척 지역의 의료 시설은 매우 열악했고 병원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했으나, 1960년대는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많아 그들을 우선 치료하고 돌보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질병 예방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무의촌 진료와 왕진

 

점차 더 많은 골롬반 수녀들이 삼척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영국의 옥스팸(Oxfam)*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산골 및 어촌 진료를 위해 왕진을 할 수 있었다. 수녀들은 이동 진료소를 만들어 여러 시골 마을들을 방문했고, 백일해, 디프테리아, 홍역 등 법정 전염병 예방에 주력했다. 아이들의 예방 접종과 면역력 회복이 의료 사도직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녀들은 골롬반 신부들이 일하는 임원, 호산, 도개, 황지, 묵호 본당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성당에서 신자들과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부모 교육과 질병 예방 교육을 실시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골롬반 수녀들은 21년간 삼척과 주변의 농어촌 등을 방문하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했다.

 

수녀들이 의료 사목에 헌신하는 동안 삼척에도 차츰 병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어린이 예방 접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의료 보험제도가 시행되고, 보건소 등이 문을 열면서 지역 주민들이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도 늘어갔다. 이렇게 상황이 조금씩 좋아지자 골롬반 수녀들은 의료 사목을 하기 위해 처음 삼척에 왔을 때의 지향을 되돌아보고 이제 다시 새로운 곳,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골롬반 수녀들은 회의를 통해 삼척병원을 원주교구에 넘기기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철수했다. 수녀회에서 은퇴하고 아일랜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골롬반회의 한 수녀가 의료 사목을 하며 삼척에서 살았던 시간을 회상하며 보내온 글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대단하다고,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훌륭하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환자를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은 아일랜드, 미국, 호주, 뉴질랜드, 영국의 옥스팸처럼 우리를 열정적으로 도와주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우리 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냥 그 앞줄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 옥스팸(Oxfam):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 본부를 두고 발족한 극빈자 구제 기관. [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9)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IV : 사회복지활동

 

 

춘천시립양로원 · 춘천시립요양원

 

1984년 골롬반 수녀들은 춘천의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인 문제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후 단신으로 월남한 사람들이 독거노인으로 홀로 살아가면서 겪는 소외감과 건강 문제, 외로움 등의 심각성을 깨닫고 연민 어린 공감을 하게 된 것이다. 춘천시와 춘천교구는 골롬반 수녀회에 춘천시립양로원과 요양원의 행정 및 관장직을 맡아 줄 수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수녀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행정 경험이 풍부한 사회복지사 수녀를 파견하여, 지역 사회와 교구민들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게 했다. 시대적 흐름과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이 사업은 1996년 춘천교구 사회복지회로 이양되었다.

 

가정 호스피스

 

1989년 골롬반 수녀들은 골롬반의원 내에 호스피스과를 신설하고 가정 호스피스(당시 방문 호스피스로 불림)를 시작했다. 호스피스 활동을 했던 수녀들은 임종하는 환자들이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마무리할 시점에 영적, 의료적 도움을 줌과 동시에 존엄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그들의 곁을 지켜 주었다. 골롬반 수녀들과 간호사들은 한 팀을 이루어 춘천 인근 지역인 홍천, 가평, 원주 등지까지 방문하는 가정 호스피스를 24시간 운영했으며, 당직 콜을 받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와 가족들을 방문해 통증 완화와 영적인 위로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헌신적인 간호사와 봉사자들로 구성된 호스피스 팀은 방문 활동 중에 가족 구성원들 간에 숨겨진 문제들, 예를 들어 경제적 어려움이나 질병, 가족 간의 오해와 불신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환자를 중심으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한, 환자가 세상을 떠난 후 사후 관리 프로그램인 사별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골롬반 수녀회는 가정을 직접 찾아가는 방문 호스피스 외에도 의원 내에 ‘베다니의 집’ 을 열어 24시간 내내 말기 암이나 임종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담당자들이 상주하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2004년 골롬반 의원은 건강검진 병원으로 지정되었다.

 

노인 전문 요양원 성 골롬반의 집

 

골롬반 수녀회는 가정 호스피스 사목 중 수녀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동한 후원자로부터 춘천 거두리 지역의 땅을 기증받았다. 그리하여 2004년 3월 춘천 거두리에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어르신들을 위해 노인 전문 요양원, 성 골롬반의 집을 개원했다. 개원 당시부터 호스피스 병상도 보유하고 있던 터라 수녀들은 임종 환자는 물론 가족들의 사후 관리 및 영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성 골롬반의 집은 죽림동 골롬반 의원과 연계하여 운영해 나갔다. [2019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0)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 V : 오늘과 내일

 

 

성 골롬반 의원 폐원 및 죽림동 수녀원의 이전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의료 선교의 사명을 접고 2011년 10월 30일 자로 성 골롬반 의원을 폐원하기로 결정했다. 2014년에는 성 골롬반의 집에 소재하던 호스피스 시설도 문을 닫게 되었다. 57년여의 긴 세월 동안 골롬반 수녀들이 머물렀던 죽림동 수녀원은 2013년에 만천리로 이전했다.

 

현재 춘천에서의 골롬반 수녀들의 활동

 

2015년부터 춘천의 골롬반 수녀들은 만천리 수녀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이주 여성들 및 - 골롬반 의원 당시부터 함께 해 온 - 필리핀 공동체를 위한 토요 미사를 드리고 있다. 죽림동 성당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성서 공부 나눔을 하고 말딩 회관에서는 매월 마지막 주에 골롬반 수녀회 후원회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이외에도 춘천 거두리에 있는 성 골롬반의 집에 머무는 치매 및 노인성 질환이 있는 환자들을 직원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

 

한편, 성 골롬반의 집은 골롬반 수녀회의 수련기 수녀들과 청원기 자매들의 공동체 체험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인 수녀들이 첫 서원을 한 후, 다른 나라로 선교를 떠나기 전 유기 서원 단계에서 수도회의 사도직과 영성을 자국에서 경험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사도직, 어르신들, 직원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알아가며, 선교 수녀로서 자신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64년 전인 1955년 11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춘천교구에 처음 파견되어 사랑과 헌신으로 함께 한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의 활동에 대해 5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여러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긴긴 세월 동안 타국에서의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애환과 이야기들을 모두 알리기에는 부족한 분량이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인용한 책의 제목을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합니다.”(1코린 3,8)라는 성경 구절로 정한 이유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그 의미를 겸허히 밝히고 있다.

 

“골롬반 수녀로서 선교지에서 선교하거나, 고국에서 선교 활동을 지원하거나, 골롬반 수녀회를 후원하거나, 딸들을 수녀원에 보냈거나, 우리는 저마다 결국은 같은 일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수고의 몫은 하느님께 받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그동안 춘천교구 내의 의료 사목을 위해 헌신해 왔고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사랑의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를 조명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다시 한번 이 기회를 통해 수녀회에 깊은 감사를 전하며, 그 보답으로 이제 춘천교구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선교하는 한 몫을 실천하는 교구로 거듭날 것을 다짐해 본다. [2020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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