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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27: 관상과 명상, 묵상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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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05 ㅣ No.1354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27) 관상과 명상, 묵상의 차이


관상으로 하느님 체험하고 사랑 나눠야

 

 

필자가 모 출판사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을 때 “관상과 명상, 묵상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이 세 가지 개념의 차이를 모호하게 느끼는 것은 서구인들과 한자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인들의 정서적 언어적 차이에도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영어의 Contemplation은 ‘관상’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Meditation은 ‘명상’ 혹은 ‘묵상’으로 번역된다.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Meditation은 ‘묵상’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를 ‘명상’이라고 본다. 사실 ‘관상’이란 용어는 동양인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머리로 하는 ‘묵상’ 마음으로 하는 ‘명상’

 

이러한 차이를 갖게 된 배경 중에 하나는 ‘마음’(心)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는 ‘mind’인데, 서구인들에게 mind는 ‘머리’에 있으며 이성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 동양인이 말하는 ‘마음’(心)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heart’(심장)이다. 서구에서 말하는 Meditation은 심장으로서의 마음의 활동이 아니라, ‘머리’로서의 마음의 활동이다. 이는 동양의 ‘명상’이라기 보다는 ‘묵상’으로 보는 편이 더 낫다. 가령 복음서의 구절을 ‘묵상’할 때, 이성적인 추리를 사용하여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 보거나 그 상황 속에 자신을 대비해 봄으로써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어떤 결실을 보게 된다. 이는 동양에서 말하는 명상과 차이가 난다. 이성을 사용하거나 텍스트를 분석하기보다는 동양의 명상은 마음을 비워내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관(觀)의 개념과 가깝다.

 

토마스 머튼은 후기에 이러한 동양의 명상 개념과 그리스도교의 관상 개념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동양의 명상, 특히 선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명상에 대해 배우고자 했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명상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관상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서로 차이가 있음을 머튼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관상과 명상, 묵상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였으니 관상(동양에서 말하는 명상)의 보편적인 현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특별한 자세를 하고 일정한 호흡에 맞춰 ‘명상’하는 것은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 대부분의 고등 종교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절대자 혹은 신(神)의 이름을 부르든, 무(無)를 반복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하든 상관없이, 깊은 영적인 영역에서 자기 소멸과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인간의 영원한 갈망이기도 하다. 심지어 플라톤 철학에서도 관상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플라톤은 관상을 통하여 영혼이 절대 선의 형태 혹은 다른 신적 형태의 지식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오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도 헤노시스(henosis, 신비로운 일치)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바로 관상이라고 보았다.

 

 

예수님 바라보고 일치되는 ‘관상’

 

신약성경 안에서도 관상은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하거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과 일치하는 길로 묘사되고 있다. 가령,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 예수님을 바라보던 사마리아 여인(요한 4,26), 예수님 곁에 머물던 마리아(루카 10,38-42)는 관상의 예표가 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도 관상(theoria)은 ‘하느님을 보는 것’, ‘하느님의 환시 체험’ 등으로 이해되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 상태에 이르는 관상의 과정으로 헤시키즘(Hesychasm)을 가르쳐왔는데 이는 하나 안에서 마음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금욕적 전통에 따른 수행이다. 7세기의 요한 클리마쿠스는 관상을 죄지은 옛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변화의 과정이며 선과 신성을 지닌 우리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누군가가 하느님 현존에 있다면 ‘하느님화’되고, 하느님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관상의 실제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지 이론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깨달은 자의 사랑이 갖는 보편성

 

이러한 동방 교회의 관상에 대한 이해는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별히 ‘하느님화’라는 개념은 머튼에게 있어,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이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대승불교의 깨달은 자인 보살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서원을 하며 가르침과 자비를 베푸는 것에 힘쓰는 모습과 비교하는 개념이 된다. 다시 말해 머튼은 깨달은 자의 사랑과 자비의 열매는 종교를 넘어 하느님의 보편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서방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월 5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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