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유마오로 · 권중심 · 이요한 · ​정은바오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1-13 ㅣ No.1872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유마오로 · 권중심 · 이요한 · 정은바오로

 

 

유마오로(1821~1866)

 

유마오로는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부모에게 가톨릭 신앙을 배웠으며 장성한 뒤 전마리아와 혼인했다. 1868년 서울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유안드레아가 그의 장남이고, 1879년 서울에서 순교한 유요셉이 그의 차남이다.

 

유마오로는 안양 수리산 교우촌(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9동)으로 들어가 교우들과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60년에 열살 된 장남 안드레아를 제천 배론 신학교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그는 안양 수리산에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박해 상황을 살피러 상경했다가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됐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문초와 형벌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 결과 사형 판결을 받은 그는 양화진으로 압송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권중심(1825~1866)

 

권중심은 충청도 신창 창말(현 충남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랑드르 신부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창지역으로 내려온 서울 포교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압송되기 전 아내에게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어린 것들을 데리고 살다가 만일 체포되거든 부디 배교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순교해 영원한 천당에서 만납시다”라고 당부했다.

 

포교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제법 천주교 신자답다”라고 하면서 그를 수원으로 압송했다. 수원에 도착한 권중심은 자기 뜻대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요한(1829~1866)

 

이요한은 경기도 죽산 남광리(현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장성한 그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먹방리(현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 산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충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까지 쫓아온 경기도 광주 포교들에게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관장이 “네가 천주교 신자라면 배운 것을 말해 보아라” 하자 이요한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교리 문답과 12단 기도문을 큰 소리로 외운 다음 “죽어도 천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로 고백했다. 그 결과 이요한은 사형 판결을 받고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문막달레나(1848~1866)

 

문막달레나는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성한 뒤 고의진(요셉)과 혼인했다. 이후 그는 남편과 시댁 가족을 따라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녀의 남편 고요셉이 가족 중 가장 먼저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문막달레나는 시부모를 따라 산속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당시 임신한 그는 겨울 산속에서 해산하게 됐으나 힘든 기색 없이 고통을 견디어냈다.

 

그러던 중 문막달레나와 시아버지 고야고보는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돼 죽산 도호부로 압송됐다. 이때 그는 갓 태어난 자식과 헤어지는 극한의 슬픔을 이겨내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문막달레나는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정은(바오로, 1804~1867)

 

정은은 경기도 이천 단내(현 이천군 호법면 단천리)에 살다 우연히 병을 치료해 주러 오던 양지 사람 조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후 그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양지 은이에 머물며 비밀리에 사목할 때, 김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친척들은 그의 집에 찾아와 가족들에게 교회 서적을 불사르고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던 중 1866년 12월 19일 광주 포졸들이 정은을 체포하기 위해 단내에 들이닥쳤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정일동(프란치스코)과 정수동(필립보)는 울면서 정은에게 피신을 강권했으나 그는 “나는 다리 힘도 부족하고 신을 신발도 없다. 또 피한다고 해서 무엇하겠느냐?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순순히 집을 나서 포졸들 앞으로 나아갔다.

 

정은은 재종손자인 정 베드로와 함께 체포돼 광주 관아로 압송됐다. 이후 둘은 옥살이를 하다 1867년 1월 13일 광주 남한산성 형장에서 백지사형(얼굴에 물을 뿜고 한지를 그 위에 붙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형벌)으로 순교했다. 당시 정은의 나이는 63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10일, 리길재 기자]



1,15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