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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도 학문인가? - 신학대전의 첫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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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7-29 ㅣ No.540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도 학문인가? - 「신학대전」의 첫 질문

 

 

「신학대전」에서 첫 번째로 다루는 주제는 ‘거룩한 가르침’, 곧 ‘신학이란 학문인가?’라는 질문이다. 스콜라 철학 초기만 해도 이런 질문은 낯선 것이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인데 참된 지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발견된다는 초기 교부들의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사상의 귀족’이라고 불렀던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신학이야말로 참된 철학이며 학문의 여왕이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는 아우구스티노의 정신을 이어받아 훨씬 더 예리하게 다듬어진 논리학과 문법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이성에 근거한 논증을 펼쳤다. 두 사람은 철학과 신학이라는 두 학문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되면서 철학이 다만 다른 학문의 도구(Organon) 역할에서 벗어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신학과 철학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와 동시에 「분석론 후편」에 나오는 엄격한 학문의 원리도 당시의 학계에 소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에서 학문적인 이상을 엄격히 세우게 되는데 ‘진정한 학문이란 엄격하게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문장에 기초를 둔, 증명 가능한 학문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모든 학문은 그 자신이 고유하게 고찰할 수 있는 대상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 대상은 사물의 형상처럼 필연적이고 불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두 가지의 새로운 전제에 직면해서 그때까지 학문의 기준으로 군림했던 신학은 학문으로서의 정당성을 확증해야만 했다.

 

 

‘은총의 빛’과 ‘이성의 빛’에 따른 구분

 

이러한 과제를 위해 “철학적 학문 분야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이 필요한가?”라는 「신학대전」의 첫 번째 질문이 제기된다(Sth I,1,1).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철학이 완성된 지혜인 신학에 얼마나 다가갔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철학에 맞서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토마스는 매우 자주 (1) 인간 본성에 속하는 이성의 빛(lumen intellectus)과 (2) 신으로부터 부여되는 은총의 빛(lumen gratiae)을 구분하여 양자가 각각 자기의 고유 영역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1′) 철학은 ‘이성의 빛’에 의존하기에 인간의 이성으로 알게 된 원리들을 사용한다. 물론 신의 은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추리 성과로 결론을 내린다. 철학자가 이해하는 원리들은 오로지 이성에만 의거한 것이다.

 

(2′) 신학자도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만, 그 원리들을 ‘은총의 빛’에 근거한 권위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원리들은 계시된 것으로서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를테면 삼위일체와 육화, 부활, 최종 심판 같은 교의는 신앙으로 받아들인 하나의 계시된 전제이지 철학적 논증의 결론은 아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이성의 영역에 관해서는 모두 철학으로, 이성을 넘어서는 영역은 모두 신학으로 넘겨주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구분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대상에 대해, 예컨대 인간이나 신에 대해서는 철학에서도 말하고 신학에서도 말하기 때문이다.

 

신학의 주제인 신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철학의 일부인 ‘자연 신학’(theologia naturalis)에서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신학자는 신이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 준대로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곧 철학자들이 결론에 가서야 도달하는 것을 신학자들은 자기 학문의 전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와 철학자는 같은 진리를 선포하더라도 거기에 도달하는 방도나 그것을 고려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토마스는 이 구분을 배경으로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인간은 여하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진정한 행복’(至福直觀)이라는 초자연적 목적(2″)으로 운명 지어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자신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철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신의 본성을 인식한다는 목표는 문자 그대로 초자연적, 곧 인간 이성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은총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목표로 지향되었다는 전제 아래에서 신적인 계시에 기초한 가르침은 필수적이다.

 

토마스는 계속해서 이성이 그 자체로 도달 가능한 신에 관한 진리(1″)에서도 거룩한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진리에 대한 인식에 인간의 구원 여부가 달려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그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성 능력의 부족으로 이런 깊이 있는 탐구에 적합하지 못하다.

 

다른 많은 사람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바빠 그들이 비록 형이상학적인 성찰 능력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성찰을 할 여유가 없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성찰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다. 능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조차 인간 이성에만 의존할 경우 우리 지성의 취약성과 결론으로의 성급한 비약, 정념 등의 개입 때문에 많은 오류가 뒤섞인 상태에서만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 이성의 능력은 인간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 도달 가능한 진리들조차 신앙의 대상으로 계시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과 철학의 긴밀한 관계

 

토마스는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면서도, 이를 병렬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금지령, 라틴아베로에스주의와의 논쟁 등을 통해 두 학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이런 경우에 판단 기준으로 자신이 최고의 학문으로 인정한 신학을 제시한다.

 

결국 철학과 신학으로 말미암아 도달한 결과가 서로 상치될 경우에 철학은 신학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본디 인간 구원의 관건이 되는 초자연적인 진리 그 자체를 입증할 수 없고, 다만 그에 반대되는 논지를 무력화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신학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철학과 신학의 명확한 구별이 지녔던 장점, 곧 각 학문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것을 약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신학대전」에서는 단 한 번뿐이지만 철학을 비하하려고 반변증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철학은 신학의 하녀’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I,1,6,ad 2).

 

그러나 토마스는 세속 학문이 신학에 의해서 이용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이 학문이 신학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 대상의 규정, 원리, 방법은 자유를 지니며 적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다.

 

 

은총을 통한 자연 이성의 완성

 

토마스가 「신학대전」의 첫 질문에서 다룬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다음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주는 은총은 피조물들이 지닌 본성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STh I,1,8,ad 2).

 

토마스가 자주 강조했듯이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두 개의 다른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철학적 진리’는 상호 경쟁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일 뿐이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강화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약화하기는커녕, 그 발전의 도움을 통해서 더욱 충만해진다.

 

토마스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확신에 차서 어떠한 철학적 진리도 계시된 진리에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철학적 진리가 계시된 진리와 충돌을 일으킬 때는 철학적 진리의 진실성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는 이처럼 명확하게 두 학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경우를 해결하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하지만, 자신이 철학과 신학의 구별을 통해서 보장했던 학문의 적절한 독립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 영역은 침범되지 않아야 하고, 다른 학문은 독재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과 각 학문의 관점 차이, 방법론과 관심의 명백한 차별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신학자들이 부당하게 다른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회가 토마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마스의 균형 잡힌 태도는 더욱 발전되는 현대 학문과의 대화에서도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7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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