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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사향가의 적대자와 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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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02 ㅣ No.1017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사향가’의 적대자와 호교

 

 

‘사향가’는 현세가 잠시 지나가는 풍진세계로서 눈물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는 곳이므로 본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선하게 살아가기를 권고하는 노래이다.

 

 

적대자가 천주교를 비난하다

 

‘사향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적대자가 직접 등장하여 천주교와 천주교 신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한다는 점이다. 「금베두루본」 소재의 ‘사향가’는 4음보 416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150-184행이 그러하다. 적대자의 처지에 선 시적 자아가 천주교의 허황된 교리와 신자들의 그릇된 태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150-165행을 보면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이 대단히 구체적이다.

 

허탄하고 요망하다 조물진주(造物眞主) 있단말가

절로생긴 하늘땅을 그뉘라서 지어낸고

천지만물 허다한걸 무엇으로 지어낼고

천주먼저 있다하니 어디에서 좇아난고

기운모여 얼굴되니 영혼육신 무슨말고

생존사멸 무기(無期)하니 천당지옥 있을쏘냐

사람죽어 귀신되니 신마유분(神魔有分) 요언이다

상제강생 무슨말고 동정생자(童貞生子) 있단말가

말끝마다 허탄하고 들을수록 기괴하다

전능전지 분명하면 남의손에 죽을쏘냐

돌기둥에 편태(鞭笞)받고 십자가에 죽었거든

무슨능이 부활하며 무슨능이 승천할고

어찌하여 한몸위에 만민죄를 다속(贖)할고

사심판과 공심판은 어디가서 받단말가

환향백골 썩었거든 어느몸에 상벌할고

썩은흙만 남았거든 육신부활 무슨말고

 

적대자는 먼저 천주 존재와 천지 창조를 전면적으로 부인한다. 이어 영혼 불멸, 천당과 지옥에 관한 가르침을 부인한다. 또한 동정 마리아의 잉태와 예수님의 강생, 예수님의 수난 · 죽음 · 부활 · 승천, 상선벌악에 따른 사심판과 공심판, 육신 부활 등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낱낱이 부정한다. 이어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를 비판한다. ‘나라에서 금한 것을 숨어 가며’(172행) 행하고, ‘집안에서 말란 일을 제 조상을 배반’(173행)하니 ‘군부(君父)께는 배반’(175행)하는 일이 아니냐며 비난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참도리라 여기는 가르침을 그야말로 ‘이리이리 훼방하고 저리저리 모욕’(185행)한다. 천주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비판이 이어지는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는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내린 ‘조상 제사 금지령’에 따랐다. 그럼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유학자들로부터 ‘아비도 없고 군주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난적’으로 낙인찍혀 백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는 전통적인 유교의 가르침을 거부한 셈이었고, 유교는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의례를 부인한 천주교 가르침을 이단으로 척결한 셈이었다.

 

이에 따라 ‘사향가’의 적대자는 천주교 신자들이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를 아주 끊고 아니 함으로써(177행), 주공 제례(周公祭禮)를 고치고 정주 가례(程朱家禮)를 폐할 수 있겠느냐(178행)고 반문한다. 더욱이 부모가 세상을 뜨고 난 뒤에 지내는 삼 년제(三年祭)도 지내지 않으니(179행) 어찌 부모와 조상을 배반하는 일이 아니며, 어찌 대죄인이 아니냐(184행)며 힐난한다.

 

 

적대자의 비난을 반박하다

 

이러한 적대자의 비판에 대하여 시적 화자는 186-240행에서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조그만한 집안에도 주장한이 다있거든

하물며 천지간에 주재한이 없을쏘냐

주재한이 없다하면 화성만물(和成萬物) 누가한고

네몸안에 항상있는 영혼삼사(靈魂三司) 모르거든

하물며 무한하신 천주영능 어찌알며

천주영혼 모르거든 천당지옥 어찌알며

원조범명(元祖犯命) 모르거든 강생도리 어찌알며

천주영능 모르거든 강생동신(降生童身) 어찌알며

천주강생 모르거든 부활승천 어찌알며

천주진자(天主眞子) 모르거든 수난사정 어찌알며

천주강생 모르거든 치명사정 어찌알며

전능화성(全能和成) 모르거든 육신부활 어찌알며

 

시적 화자는 적대자를 ‘우물 밑에 개구리’(190행)이자 ‘밭도랑에 노는 고기’(191행)로 비유하면서 하늘과 바다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어찌 알 것이냐며 반박의 포문을 연다. 유교나 불교 또한 외국의 소산인데, 마치 천주교만 그렇듯이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 모르거든’, ‘… 어찌알며’라는 어구의 반복을 통해 앞서 세속인들이 비난한 천주 존재부터 육신 부활까지 천주교 교리의 세목을 거론한다. 천주교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부언낭설만 듣고 비난하는 세속인들의 태도를 전반적인 범주에서 비판한다. 앞서 등장한 적대자의 비난의 목소리가 곧 무지와 몰이해에서 야기된 것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호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적대자를 등장시킨 의도

 

‘사향가’에 등장하는 적대자의 비판은 천주교를 비판하고자 창작된 ‘벽이가사’(闢異歌辭)인 ‘경세가’에서 천지 창조 · 천주 존재 · 천당 지옥 · 영혼 불멸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심진곡’과 ‘낭유사’에서 천주 존재 · 천당 지옥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벽이가사’ 작품들에서는 대단히 일반적이고도 제한된 수준에서 천주교를 비난하지만, ‘사향가’에서는 「주교요지」나 「성교요리문답」과 같은 교리서의 세목을 거의 빼놓지 않고 열거하며 비판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사향가’의 비난 대목은 역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뚜렷하다. 적대자가 천주교 교리와 신자들의 삶을 무려 35행에 걸쳐 세밀히 비판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비난하는 데 대한 반발로 보인다.

 

곧 이 대목은 표층적 의미와 달리 세상 사람들이 막연히 비난하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막연한 비난을 정면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적대자를 등장시켜 가상현실을 상정함으로써 호교를 위한 체계적인 반박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것이다.

 

여기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 우리 신자들은 천주교의 교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2014년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에 따르면, 천주교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59%(1984년 84%), 창조설에 대한 믿음은 45%(1984년 80%), 사후심판설에 대한 믿음은 38%(1984년 76%), 천국에 대한 믿음은 65%(1984년 72%), 사후 영혼설에 대한 믿음은 64%(1984년 82%)였다.

 

수치만을 놓고 보면 천주교 신자 상당수가 핵심 교리를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 믿음이 약화되고 있다. 전교나 호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이다. 박해 시기에 창작된 ‘사향가’를 오늘날 새삼 되새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이며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기획홍보위원장으로 계간지 「평신도」 편집장을 맡고 있다. 중국 선교 답사기 「둥베이는 말한다」, 장편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 등을 펴냈으며, 「천주가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김문태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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