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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81: 17세기 (4)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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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1 ㅣ No.121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1) 17세기 ④ 프랑스 절대주의와 갈리아주의


국가와 교회의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영성생활

 

 

16세기 유럽 본토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 해석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개신교 설립의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시대에 영국 왕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1547)는 이혼과 재혼을 위한 개인 가정사 때문에 가톨릭교회와의 단절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영국 의회는 1534년에 ‘수장령’을 통해 영국에서 국왕만이 영국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언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길을 열었습니다. 17세기에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군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또 다른 가톨릭교회 수장이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세속 군주들의 이러한 시도는 가톨릭교회 수호와 신앙 보존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절대주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봉건제도를 가장 잘 완성시킨 나라였으며, 봉건제도에 따라서 신하 국가인 영국의 종주국이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VI, 재위 1328~1350)가 유럽 본토에 있는 영국령을 문제 삼아 몰수하려고 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1377)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의 우위를 앞세워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선포하면서 양국 사이에 ‘백년 전쟁’(1337~1453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양국에서 봉건 귀족들은 몰락했으며, 왕의 권력은 강화되어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백년 전쟁 이후에 영국은 자국 내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간에 ‘장미 전쟁’(1455~1485년)을 치르면서 봉건 귀족들이 한 번 더 몰락했고,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1509)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백년 전쟁이 끝날 무렵의 왕이었던 샤를 7세(Charles VII, 재위 1422~1461)부터 17세기 초에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까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프랑스 왕권은 종교 영역에도 크게 관여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주장과 활동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 개신교 신도들은 처음에 루터주의에 관심을 갖다가 점점 칼뱅주의로 관심을 옮겼습니다. 프랑스 칼뱅파 개신교 신도들은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렸는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ois I, 재위 1515~1547)는 위그노에게 관대했으나 프랑수아 2세(Franois II, 재위 1559~1560)는 위그노를 엄하게 규제했습니다. 한편 샤를 9세(Charles IX, 재위 1560~1574)를 섭정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가타리나(Caterina de’ Medici, 1519~1589)는 1562년 1월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관용을 베푸는 내용을 담은 ‘생제르맹(Saint-Germain)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던 기즈(Franois de Guise, 1519~1563) 공작이 그 해 3월에 파리 근교 바시(Vassy)에서 예배를 보던 위그노 신도들을 학살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교회와 위그노 사이에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했습니다. 게다가 1572년에 있었던 위그노 신도들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의 배후로 가타리나가 지목되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루이 14세.

 

 

앙리 3세(Henri III, 재위 1574~1589)가 죽자 위그노 신도였던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1552~1610)가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로 즉위했으나, 개신교 신도라는 이유로 파리 시민들은 그가 수도로 입성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 신자로 다시 개종하고 1594년 샤르트르(Chartres)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나서야 파리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애정이 있었던 앙리 4세는 1598년에 위그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Nantes)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칙령은 위그노 신도들이 파리 이외의 지역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며,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요새를 만들고 비용도 지불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칙령의 반포와 함께 36년간의 위그노 전쟁이 끝났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재임 1592~1605)는 앙리 4세가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했으나 프랑스 왕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갈리아주의

 

한편 절대 왕권을 바랐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는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가톨릭 국가를 재건할 계획으로 1685년에 ‘퐁텐블로(Fontainebleau) 칙령’을 발표, 과거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 많은 위그노 신도들은 해외로 이주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7세기 내내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상황을 바꾼 루이 14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왕권 강화를 꿈꾸던 프랑스 왕과 가톨릭교회가 친분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PP. XI, 재임 1676~1689)는 프랑스 내에 주교 임명권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루이 14세는 1681년에 파리에서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했으며, 모(Meaux)의 교구장 보쉬에(Jacques Bnigne Bossuet, 1627~1704)가 작성한 「네 가지 조항에 대한 선언문(D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을 70명의 성직자들이 지지하면서 ‘갈리아주의’(Gallicanism)를 강조했습니다. 즉, 프랑스 왕은 세상사에 있어서 교황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고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으며, 과거 프랑스 교회가 독립적으로 누리던 자유는 여전히 유효하고 교황의 결정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

 

 

결국 가톨릭교회는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PP, XII, 재임 1691~1700)도 루이 14세를 설득해서 1693년에 갈리아주의 4개 조항의 폐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왕과 성직자들이 합심해 프랑스 국내 문제에 대해 교황청의 간섭을 거부하려고 했던 시도는 프랑스 국교회가 탄생할 뻔한 사건이었으며, 프랑스 내에서 영향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주의적인 국가관으로 시작되었던 갈리아주의(Gal- licanism)는 국수주의적인 교회관으로 발전하면서 18세기에 독일에서 주교단 지상주의(Episcopalism), 페브로니아주의(Febronianism), 요셉주의(Josephinism)로 확산되었으나 점점 이단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외면받게 되었으며, 19세기에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국가가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에 가톨릭교회 당국이 주도적으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살피지 못하자, 신자들은 스스로 대중 신심을 찾아서 발전시키거나 몇몇 영성작가들의 가르침을 통해 영성생활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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