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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진리를 위하여,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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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6 ㅣ No.1767

진리를 위하여,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우리나라 방문은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한민족 모두에게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방문 기간 중인 8월 16일에 한국 천주교회가 요청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諡福式)을 거행하는 것은 매우 감격스럽고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시복이 결정된 지금까지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103위 성인도 잘 모르고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는데 124위 시복이 꼭 필요한가?”

 

 

복자 124위는 누구이며, 그들을 왜 시복해야 하는가?

 

복자 124위 중 86위는 기해박해(1839년) 이전,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한 후 초기 50년 동안 순교하신 분들이다. 우리나라에 천주교회를 탄생시키고 자율적으로 성장시킨 분들인 것이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 공경 면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 교회를 자국민 스스로 세웠다며 자랑하지만 그 주인공들은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초기 교회 순교자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실제 공경한 대상은 그분들이 아닌 그 후대의 성인들인 것이다.

 

천주교회에서 누군가를 공적으로 공경하려면 시복이나 시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앞서 순교하신 분들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중에 순교하신 분들이 먼저 성인이 되었기에 이런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러한 불균형은 넓게는 교회 안에서, 좁게는 한 가정 안에서 생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년) 신부의 집안이다.

 

김대건 신부 집안의 첫 순교자는 김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1739-1814년)이다. 김 신부의 작은할아버지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1816년)도 순교하였다. 두 분 모두 기해박해 이전에 순교하였으나 성인품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분들의 후손인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1796-1839년)와 당고모 김 데레사(1796-1840년)와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 이후에 순교하였어도 현재 모두 성인품에 올라 있다.

 

한 마디로, 김대건 신부 집안에서 기해박해 이후에 순교한 세 분은 모두 성인이 되었지만, 기해박해 이전 박해 때 순교한 조상은 성인품은 물론 복자품에도 올라 있지 않다. 124위 시복 대상자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순교자와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순교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그동안 교회 안에 있던 불균형이 어느 정도 해소될 전망이다.

 

이번에 이루어지는 124위 시복은 다른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한국 천주교회가 124위 시복 수속 과정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여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1925년 7월 5일에 한국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있었고, 1968년 10월 6일에 24위 순교자의 시복식이 있었지만, 이 두 차례 시복 과정의 모든 수속은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번 시복 수속은 한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진행하여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인들을 어떻게 공경해 왔는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성인들을 언제부터 어떻게 공경해 왔을까? 성인 공경의 전통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달레(Ch. Dallet, 1829-1878년)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갑진년(1784년) 봄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가져온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에 “그날그날의 성인 행적”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성년광익(聖年廣益)》을 가리킨다. 《성년광익》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Mailla, 馮秉正, 1669-1748년) 신부가 한문으로 옮겨 쓴 책이다. 교회 전례력에 따라 기념하는 성인 365명과 그 행적을 소개한 후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묵상서이다.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은 이승훈이 가지고 온 《성년광익》을 읽으면서 성인이나 순교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각별히 공경하였다. 그것은 초기 신자들이 세례명을 선택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1754-1785년),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42/51-1792년) 등 초기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례명을 선택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무렵 북경에서 영세한 이승훈 베드로가 이 성사를 이벽과 권일신에게 주었다. 세례명 선택은 되는 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벽은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세례명을 세례자 요한으로 하였고,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를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렇게 성인들의 생애에 맞추어 세례명을 선택한 것을 보면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성인이나 순교자를 크게 공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창기 신자들의 성인 공경은 그들이 신미년(1811년)에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성인과 순교자 공경이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초기 교회 때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1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회가 스러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 데에는, 노인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힘든 상황에서도 성인들을 잘 공경하는 전통을 따르며 성인들을 본받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안간힘을 쓴 노력이 있었다. 이렇게 대를 이어 가며 전해진 신앙의 전통이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 집안처럼 대를 이은 순교도 가능할 수 있었다.

 

 

순교자 신심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가?

 

“신심은 하느님의 신비나 하느님과 연관된 어떤 창조된 실재에 마음을 향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려는 인간의 자세”라고 정의할 수 있다(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위원회, 《사목회의 의안 5 신심운동》 21항). 그래서 하느님을 섬기는 ‘하느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는 다양한 신심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더욱 열성적이고 헌신적으로 하기 위한 마음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심에는 삼위일체 신심, 성체성혈 신심, 성 십자가 신심, 예수 성심 신심, 예수 성명 신심, 성령 신심, 성모 신심, 천사 신심, 성 요셉 신심, 사도 신심, 성인 신심, 한국 순교자 신심 등이 있다(《사목회의 의안 5 신심운동》 30-41항 참조).

 

“한국 순교자 신심이란, 한국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순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에 일치시키는 신심”을 말하는 것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복음을 생활로 증거”하도록 하는 신심이다(《사목회의 의안 5 신심운동》 41항).

 

주님을 위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살다가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숨을 바치는 순교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고갱이다.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회를 얻어 목숨을 바치든, 아니면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섬기며 사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박해 시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순교자는 계속해서 신자들의 모범이 되고 사표(師表)가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본받으려는 순교자 신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자신과 사회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어느 때보다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 천주교회 신자들부터 눈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좇지 않아야 한다. 진리를 위하여,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 124위 복자를 본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 윤민구 신부는 수원교구 소속으로 197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청원인으로 로마에서 활동했고,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지금은 용인시 동천동에 있는 손골성지의 전담 사제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윤민구 도미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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