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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1) 주님께서 성녀에게 보내 주신 완벽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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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31 ㅣ No.1053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1)


주님께서 성녀에게 보내 주신 '완벽한 친구'

 

 

-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신부.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종종 존경의 뜻에서 고귀한 출생을 나타내는 전치사 ‘de’를 덧붙여 ‘드 라 콜롱비에르’라고 쓰기도 하지만, 원래는 ‘라 콜롱비에르’라고 부름) 

 

그는 예수회 소속 신부로 ‘예수 성심’에 대한 사적 계시를 세상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Marguerite-Marie Alacoque) 성녀의 고해 사제이며 영적 동반자다. 1641년 프랑스 생 생포리앙도종(St. Symporien-D’Ozon)에서 태어났고, 1682년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에서 선종했다.

 

성인의 삶은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는다. 17세 때 예수회에 입회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문법과 문학을 가르쳤는데, 평판 좋은 온화한 선생이었다. 그후 시골 마을의 가난한 한 수녀회(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라틴어로는 Ordo Visitationis Beatissimae Mariae Virginis)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던 한 수녀를 홀로 옹호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가 핍박당하고 있던 영국 런던으로 파견됐으나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 건강 악화로 프랑스로 추방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영화 같은 순교나 위대한 업적과는 사뭇 다른 삶이다.

 

하지만 성인의 내적인 삶을 봐야 한다. 성인의 삶은 ‘예수 성심’을 따르는 삶이었다. 예수 성심 즉,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마음과 육체가 거기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보다 ‘심장’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심장’은 콜롱비에르 성인에게 유일한 기준이었다. 당시로선 의심스러운 사적 계시를 전파하고, 격정과 감성을 따랐다는 말이 아니다. 최후의 만찬에 함께했던 주님의 제자처럼 주님의 심장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했고,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삶은 심장처럼 감춰진 삶이었으나 하느님 의식 안에선 가장 드러난 삶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수회 회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룻밤에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고,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것과 같은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주님의 심장을 따른다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콜롱비에르 성인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친구’로 부름 받았다고 믿었다. 알라코크 수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와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와 멸시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알라코크 수녀에게 직접 건넸다고 전해지는 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네게 나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를 보내 주겠다.” 그가 바로 콜롱비에르 성인이었다. 조르주 기통 신부가 쓴「복자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의 삶 : 그의 환경과 시대」는 성인의 생애를 다룬 책 중 분량뿐 아니라 학술 가치 면에서도 중요성을 인정받는 책이다.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은「Perfect Friend(완벽한 친구)」인데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어린 시절

 

성인의 유년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의 가족들을 통해 어떤 분위기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1641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리옹 근교의 생 생포리앙도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베르트랑 드 콜롱비에르(Bertrand de Colombiere)는 법률공증인이었는데 단지 귀족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지혜와 인품을 갖춰 주변 이들에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마르가리타 쿠앙다(Marguerite Coindat)는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는데 지성과 신앙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교회 활동과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다. 다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봉헌 생활 및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유일하게 결혼해 13명의 자녀를 둔 맏아들 앵베르(Humbert) 또한 의원 신분으로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았다. 성인이 거룩함의 길을 갈망하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인의 어린 시절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여섯 살이던 맏형 앵베르가 동생 콜롱비에르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물건을 전달해야 하는 장소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고 외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형 앵베르는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던 생각을 취소했다. 하룻밤 묵어야 하는 방이 너무 좁고 시끄럽기도 했고, 동생이 길 잃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이야기 하나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어린 시절 성인은 다소 겁 많고 유순한 성격이었다. 별로 특출날 것이 없어 보이는 소년이 나중에 성인이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성인 스스로도 원래 수도 생활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좋아하던 모든 것, 친교에서 오는 기쁨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음악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봉헌 생활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추측건대 예수회 학교 체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1650년 아홉 살 되던 해 성인의 부모는 그를 리옹의 예수회 학교에 보내 고전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그곳 학교에서 지성과 덕행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교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위한 신심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성모님께 대한 애정과 신심이 그를 예수회 사제 성소로 이끌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그는 리옹 남부의 5세기 교회 유적지인 ‘리몽의 성모님‘(Notre Dame de Limon) 성지로 종종 순례했고, 성지를 맡고 있던 삼위일체 수도회 수도자들과 친교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29일, 김민철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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