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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예수님 흔적 따라 장벽을 넘다4: 라자로를 살리심 - 베타니아(동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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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87

[예수님 흔적 따라 장벽을 넘다] (4) 라자로를 살리심 - 베타니아(동예루살렘)


일어나 나와라, 주님의 빛으로 나아가라

 

 

동예루살렘 거리풍경.

 

 

동예루살렘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해 관광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받아보면 어디가 팔레스타인인지 알 수 없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 군사점령지인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를 지도에 표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법으로 금지돼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동, 서로 나뉘어 있고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의해 군사 통치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이라는 사실을 아는 외국인은 많지 않다.

 

이스라엘은 1948년과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각각 서, 동 예루살렘을 군사점령했다. 이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정책은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은 통일된 예루살렘(United Jerusalem), 대 예루살렘(Greater Jerusalem)으로 요약된다. 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수를 최대한 줄이고 유다인 수를 늘리며,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로부터 분리시켜 이스라엘에 완벽하게 합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주민 수를 줄이려는 여러 가지 차별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동예루살렘의 약 40%에 이르는 땅을 그린벨트 혹은 공공택지로 묶어 놓고 유다인 정착촌이나 유다인만을 위한 도로 건설에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해서는 한 가구의 집도 짓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구 자연증가로 인한 주택부족과 인구 밀집은 동 예루살렘의 많은 지역을 빈민가로 만들고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스스로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하려는 고도의 점령정책이다.

 

공존이 아닌 분리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독점과 군사력의 지배로 평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오늘날 이스라엘의 비극은 이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평화를 만드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평화에 목마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기초' 혹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느 한 신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예루살렘은 지난 기나긴 역사 동안 각기 다른 시기에 받아들인 세 자녀를 갖고 있다. 이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자녀들 중 하나가 주권자임을 주장할 때마다 그는 다른 형제의 권리를 부정하고 그들을 억압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비잔틴 제국시대와 십자군 전쟁시대에 취한 행동방식이고 무슬림들이 그들의 지배기간 동안 취한 방식이며 이스라엘이 오늘날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각각의 지배시기마다 그들은 높은 도덕성을 운운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배자가 되었을 때마다 그들은 군사적 오만함과 종교적 우월감,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그들을 말살하려 했다.

 

이스라엘도 역시 이전에 다른 지배자들이 했던 것처럼 배타적이고 광신적 애국주의로 정착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특히 동예루살렘의 아랍 팔레스타인 마을에 머무는 동안, 예루살렘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평화에 목말라하는 예루살렘을 통해 진정한 평화의 열쇠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됐다.

 

 

라자로의 무덤

 

이스라엘 성지 중에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라자로의 무덤이었다. 절망 속을 헤맬 때마다 나를 불러 일으켜 세우시던 주님의 목소리, 무덤 속에 있는 라자로를 생각하시며 눈물 흘리시던 예수님 모습은 항상 내게 큰 위로가 돼줬다.

 

- 라자로 무덤.

 

 

라자로의 무덤이 있는 베타니아는 동예루살렘, 지금은 무슬림 마을인 알 에자리아라는 동네에 있다. 군사점령 전에는 올리브 산을 넘으면 바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지금은 분리장벽으로 해서 멀리 돌아가야 하고 또 수시로 있는 검문에 응해야 하므로 일반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낮 12시께였다. 라자로 무덤 앞 쪽에 세워진 기념 성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자 성당 앞 기념품 가게 아저씨가 성당은 점심시간에 문을 닫지만 라자로 무덤은 언제나 열려 있다며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언제나 열려있음.' 2000년 전 예수님께서 그 문을 여신 후 누가 그 문을 닫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열려진 문으로 들어섰다.

 

계단은 10m 정도 아래로 내려가게 돼 있었다. 작은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해서 무덤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내가 성경책을 펴 라자로를 일으켜 세우심에 대한 장면을 읽으려는 순간 불이 나갔다. 잠시 당황했다. 암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계단 위로부터 흘려 들어오는 태양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간은 내게 또 다른 선물이었다. 나는 라자로 무덤 안에 있다. 계단 위쪽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으로 나를 이끄셨다. 여러 날 라자로는 이곳에 누워있었다. 아마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곳에 천에 싸여 어둠 속에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강한 명령의 목소리가 바위를 뚫고 울려 퍼졌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이것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볼 수 없었으나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바위는 굴려 치워졌고 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빛으로 나왔다.

 

나는 어둠 속 무덤 안에 앉아 있었다. 한 시간 동안 계속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나와라." 나는 알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예수님께 보다 큰 믿음으로 머물러 있다면 어느 날 그 말씀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온 우주의 어떤 것도 나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 목소리, 그 말씀 "나오너라"는 나를 어둠으로부터, 죄와 죽음으로부터, 모든 낡은 껍데기와 너울을 벗고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할 것이다. 라자로의 무덤 안에서 나는 나 역시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빛으로 나아갔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15일, 이승정(한국 카리타스 대북지원 실무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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