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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돈에 대해 진짜 바라는 것들 - 마스터, 현실과 영화 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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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0 ㅣ No.997

[영화 속 신앙 찾기] 돈에 대해 진짜 바라는 것들 - ‘마스터’,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소 타기

 

 

이것은 언뜻 누군가의 완벽한 ‘드라마’ 또는 ‘성공 신화’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거짓으로 이루어진 사기의 연대기다. 지난 연말 개봉한 조의석 감독의 영화 ‘마스터’는 건국 이래 최대의 사기극을 벌이는 원 네트워크의 대표 진현필(이병헌 분)과 김엄마(진경 분), 전산실장 박장군(김우빈 분)의 화려한 등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을 검거하는 동시에 비리의 윗선까지 소탕하려는 형사 김재명(강동원 분)과 지능 범죄 수사대의 활약이 펼쳐진다.

 

영화가 파헤치는 의문점은 하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피해자 수천수만 명의 계좌에서 흘러나간 3조 원이 별 ‘무리’없이 국경을 넘고 공중에서 ‘세탁’을 거쳐 한 개인의 사익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거의 마술에 가깝다. 실제로는 어이없게 종결되어 버린 ‘조희팔 사건’을 참고했다고도 한다. 숱한 권력 실세들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돈은 왜 자꾸 모호한 숫자가 돼 갈까

 

새삼스럽게 돌아본다. 돈이란 무엇인가?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실은 거의 실감이 안 난다. 무엇보다 ‘조’라는 단위의 돈에 대해 감각이 무디다.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어림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1만 원권 지폐로 1조라는 돈을 쌓으면, 그 무게가 대체 얼마나 나갈지, 운반하려면 트럭이 몇 대나 필요한 것인지 부피와 무게에 대한 계산 감각이 없다. 10의 12제곱이라는 개념은 그저 머릿속에만 있다.

 

이미 돈은 개수나 무게나 부피를 가진 물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관념’이 된 듯하다. 돈에 지배받으며 돈에 찌든 풍조를 흔히 ‘물신주의’라고 일컫지만, 21세기 금융 자본의 시대에는 이 또한 들어맞지 않는 단어 같다. ‘물신’(物神)이 아니라 ‘신’에 가까워진 게 아닐까? 구체성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데도 과연 여전히 ‘물’ 일까? 모두 알(物)고 있다. 돈은 이미 사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스터’는 새롭다. 이 영화의 미덕은 돈을 막연한 숫자가 아닌 구체적 실체로 보여 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돈은 어느새 아무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마치 원격으로 어디선가 오는 방식을 취한다. ‘플라스틱 머니’, ‘사이버 머니’ 등으로 돈의 이름은 계속 고안되고, 갈수록 ‘환상적’으로 진화한다.

 

돈을 만져지는 상태로 들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이제 돈은 다만 한순간, 어딘가에 잠시 찍혀 있다가 사라지는 부호일 뿐이다. 그나마 어쩌면 유일한 돈의 ‘기록장’이던 통장도, 폐기 절차를 밟고 있다. 일부러 귀찮음을 무릅쓰고 은행 창구에 가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어도 좋다는 식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통장 사용을 고수하는 일도 쉽지 않다.

 

돈은 점점 더 모호한 숫자들 속으로 아니 컴퓨터 화면 속으로 깜빡이다 사라져가는 점 같은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입력하고 ‘엔터’키를 치면 끝나는 게임 같은 것으로 현실감을 상실해 간다. 돈을 아무도 ‘세지’ 않는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에 ‘앱’으로 깔아 누구나 ‘통째로’ 들고 다니는 식이 되었다. 기업들은 편리함만을 광고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해 얘기하는 경우란 없다. 돈은 사이버상의 것이 되어 버렸다. 내가 사용자 또는 소비자일 때에 한해서는 그렇다.

 

그러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돈의 얼굴은 확연히 달라진다. 돈이 ‘갚아!’라는 명령어를 띠고 한 개인에게 다가올 때는 폭력 그 자체가 된다. ‘돈 사고’가 난 뒤의 상황은, 그야말로 원시적이다 못해 야만적이다. 피해자의 몸은 노예처럼 속박 당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기의 그물망으로 돈을 깔고 거둬들이는 모든 ‘시스템’의 모든 절차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금융 시스템이 숨기고 있는 진실이다.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단계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손이다.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없다.

 

 

‘마스터’, 진동하는 돈 비린내의 향연

 

‘마스터’는 돈더미를 관객의 코앞에 들이밀 듯이 전개한 영화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의 국제적 맥락과 공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감도로 그리며, 말도 안 되는 그 연결 고리마다 대단히 탁월한 ‘창조적’ 전문가 집단이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절대로 ‘변종’이 탄생할 수 없다. 공부를 끝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마스터’하고도 모자라 완전히 대칭되는, 그러니까 (범죄적) 심연 판도라의 상자까지 열고 만 ‘달인’들이 대형 사기 사건을 움직이는 실체다.

 

평범한 사람이 접근하거나 위반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모든 조감도를 굴리는 것도‘  돈’이다. 돈은 뻥튀기가 되고 세탁되며 저수지가 된다. 물론 극히 적은 숫자의 ‘의뢰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돈 자체는 절대로 생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통화량은 정해져 있다. 사기 사건이 대형화될수록 피해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해진다는 뜻이다. ‘조 단위’ 사기에는 별보다 더 많은 피해자의 이름과 계좌가 은하수를 이루고 있다. 피해자에게 그 돈은 한 장 한 장 세어서 갚아야 하는 구체적 살점이다. 무슨 사이버 신선놀음이 아니다. 최대한 환상적으로 보여야 하는 게 마케팅의 핵심이다. ‘마스터’가 응시하는 과녁은 그것이다.

 

희대의 사기꾼임이 드러나기 전 진현필의 직업은 ‘금융 스페셜리스트’이다. 대체 무엇이 그리 ‘특별’했던 것일까? 진현필의 특별했던 ‘신분 보장’에는 수많은 지폐 더미가 동원되었다. 그는 이른바 장부 관리의 도사였다. 그의 집에는 장부만을 위한 별도의 방이 있었는데, 어찌나 철통 보안 속에 고이 잘 모셔져 있는지, 그야말로 영화 속 세트 같다. ‘마스터’는 대단히 공들여 이 장부의 방을 꾸몄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쩌면 이 한 권의 장부라는 듯이 말이다.

 

꼼꼼하게 손으로 기록된 장부에는 수많은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름별로 직통 휴대 전화도 따로따로 있다. 전화기는 한 번 사용하면, 사용 즉시 그 자리에서 폐기해 증거를 없앤다. 차명계좌와 대포폰의 관리는 그렇게 철저한 ‘스스로 꼬리 자르기’에 있다.

 

꼬리 자르기의 방편 중에는 살해도 있었다. 청부업자들에게 은밀히 연락해 ‘무제한 스페셜’을 주문하는 장면은 소름을 끼치게 한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한 어떤 죽음들이 겹쳐지기도 한다.

 

 

제자리로 돌려놓기의 가치

 

‘마스터’는 한국 영화 최초로 필리핀 도심을 통제하고 촬영했으며, 마닐라 대성당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필리핀까지 진현필을 쫓아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영화 곳곳에서는 돈 비린내가 진동한다.

 

이 영화의 눈물 나게 뭉클한 결말은 (현재로써는) 완벽한 판타지다. 하지만 보는 동안 깨닫게 된다. 이거야말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원천 무효, 돈이 흘러나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려지는 일. 그게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다.

 

돈을 받은 자들은 돈으로 죄를 갚지 않는다. 돈을 빼앗긴 자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위에 돈도 얹어 내야한다. 때로는 사용해 보지도 못한 그 허망한 숫자들을, 모든 것을 바쳐 구체화해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규칙은 애초에 불공정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금융 감

독원’을 사용한 방식이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돈으로 된 ‘상품’이 ‘판매’될 때는 교환이나 환불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상품이다. 한 번 잘못 결정해 ‘독이 묻은 돈’을 골랐다가 파산당해도 하소연할 데조차 없는 현행 금융 시스템은, 한마디로 시장 논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천벌’이나 다름없는 식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 원천무효일 것이다.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그렇게도 불가능한 일일까?

 

영화 끝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은 보기 좋았다. 71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마스터’의 흥행 비결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정말 보고 싶은 세상은 어쩌면 단순하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6).

 

* 김혜원 로사 - 문화 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4월호, 김혜원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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