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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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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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0 ㅣ No.924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하느님 안에서 삶의 근본 의미 찾을 수 있어

 

 

찬미 예수님.

 

지금까지 우리는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의 작은 결론으로 영성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떠세요? 이제 영성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그렇지 않으시죠? 영성이 삶의 원리라고 한다면, 그럼 ‘그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당연히 뒤따라 나올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삶의 원리라고 하면 어떠세요? 뭔가 거창한 것이 있을 것 같으신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원리라고 말씀은 드리지만,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물음은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고, 이는 다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지요. 그래서 영성이 거룩하고 고상한 무언가가 아닌,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꼭 영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 첫 시작은 어린 시절의 사춘기 무렵일 수 있겠죠. 철없이 마냥 행복하게 뛰놀던 때를 지나 조금씩 철이 들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삶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잠 못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모습으로 방황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도 잠시. 그 이후로 이어지는 우리 삶의 환경은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힘이 듭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가서는 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준비로 정신없이 지내게 됩니다. 요즘 같아서는 일자리를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혹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어도 상황은 여의치 않습니다. 일을 해나가는 것도 어렵거니와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죠. 결혼을 하게 되면 또 새로운 상황들, 부부 사이의 일들, 시댁·처가와의 관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가 커나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도 모두 그때그때 새로운 일들이죠. 그렇게 울고 웃으며 아이들을 다 키워내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또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떠나게 되면, 어느덧 인생의 절반이 지나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시간들 안에서 찾게 되는 행복과 기쁨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첫 시절에 가졌던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을 잊고 지내왔다는 것, 나는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다시금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물음들 안에서 빠지지 않고 늘 등장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관계성’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다 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관계들을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연이야 어떻든, 누구나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 이상, 가족이나 친구처럼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사람이든 아니면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늘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게 됩니다. 이처럼, 나는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찾기 위해서는 내 삶에 주어져 있는 관계라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관계성’이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주춧돌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깊이 맺어진 관계일지라도 그 관계가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불안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분명히 있지만,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으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더 크게 느끼는 불안은 바로 ‘삶의 의미에 대한 불안’일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의미가 있었는지, ‘나’라는 사람이 괜찮게 잘 살아왔는지, 마지막에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한 불안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만 내 존재와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데 그 관계들이 영원하지 않아서 우리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게 될까요?

 

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아시겠죠? 결국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존재의 첫 시작부터 마침까지를 모두 주관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우리 신앙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죠. 성경이 일러주는 대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창세 1,26-27 참조),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신앙인들이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비신자는 아직까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들인 것이죠.

 

그래서 삶의 원리, 영성이라는 것은 다시금 하느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존재는 하느님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 하느님 안에서만 내 삶의 근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비록 아직까진 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시편 42,2: 공동번역)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4월 9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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