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4) 얼굴 없는 신앙인과 예수님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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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4 ㅣ No.511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4) 얼굴 없는 신앙인과 예수님의 세례

 

 

어둠이 가면 새벽이 오듯이, 맺히면 푸는 것이 우리 민족사의 움직임이자 삶의 실타래였다. 그 점은 오늘이라고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막히면 뚫고 얼면 녹이는 것, 그것이 삶의 이치요 섭리이다. 그리고 닫히면 열게 되어있는 것, 그것이 역사이고 인생이다. 민간전승을 소중하게 유지해 온 우리나라에는 굿판이나 춤판에서 맺힌 것을 푸는 것, 곧 ‘푼다는 것’은 종교의식 바로 그 자체이다. 현실에서 부딪쳐 일어나는 문제들이 꼬이고 꼬여서 맺힌 한(恨)들을 풀고자 했던 현장이 바로 예술이고 종교였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역할은 전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관을 지으며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사람들은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고,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다른 참신하고 신명나는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근원적인 욕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의 문을 두드려 본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며 과거의 악습을 끊어버리기로 하느님께 서약하고 물로 씻는 예절을 통해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세례 때의 감격과 처음의 열성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식어버린 것을 기억한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인으로서 세례 때 했던 하느님과의 첫 서약을 저버리고 그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주일미사만 간신히 참여하는 주일신자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가끔은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 훌쩍 다녀올 때가 있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전설을 안고도 천백여 년의 세월을 버텼다고 하니, 세상사 말 되는 도리를 차마 백년도 못사는 주제에 지켜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기상에 압도당해 버린다.

 

 

얼굴 없는 ‘신앙인’들 편리한 대로 예수님 모습 만들어

 

세상은 갈수록 ‘얼굴 없는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사회가 혼란스러워도 책임질 사람이 선뜻 나서질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요즘은 무서운 아이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먼저 등을 돌리고 두 손을 쳐든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분량의 무책임과 방종이라는 항복문서에 날인을 해왔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도피성과 무관심으로 사회는 이제 어른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며 벌써부터 톡톡히 그 쓴맛을 보고 있다. 어른이 없는 사회의 예의염체가 오죽할까? 우리는 그동안 그 소중한 얼굴과 인격을 어디다 구겨놓았는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는데, 그렇게 살면 험난한 이 세상에 못살아 간다면서 오히려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핀잔을 듣는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 흉내 내기가 원숭이한테는 욕이 될 것 같다.

 

신앙인들조차도 얼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미사 오 분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하여 미사 후 오 분이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진다. 오히려 성당에서 얼굴이 팔리면 고달프고 귀찮은 일을 맡게 될 것 같다고 한다. 이따금씩 “혹시나 예수님이 지금의 교회를 외면하시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정작 본당과 사회 안에서 신자들의 모습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큰 차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는 ‘다른 예수’를 믿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교리에 따른 ‘고백용 그리스도’일 뿐, 실제로 못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새 편리한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로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선호하는 온갖 색깔을 입혀 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예수로는 진정한 예수님의 삶을 살 수 없다. 고작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욕심이 채워지기만을 바라는, 또한 십자가 아래서 못난 기도만을 올리는 못난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예전에 한 절에서 어느 세파에 찌들어 찾아온 젊은이가 주지 스님께 “스님, 괴로워 죽겠습니다. 제발 좀 조용히 쉴 수 있는 암자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더니 그 스님 답변인 즉, “예끼 이놈아! 그런 데 있으면 내가 먼저 가겠다.” 하더란다. 아무 데고 그런 곳은 없다는 것이겠다. 온통 관광객 등쌀에 쉴 곳이 없다는 것이다. 성당이고 절이고 간에 신앙이 무슨 관광 온 것처럼 희한한 구경꺼리나 이벤트나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제 마음만 편하자고 다닌다면 죽을 때까지 원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름 하나 얻고 살아가는 한, 신앙생활이란 것 역시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 무풍지대란 있을 수 없다.

 

 

세례로 성령 받은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아야

 

예수님의 세례는 드러나지 않았던 당신의 ‘사생활’에서 모든 이에게 나타나 사명과 본분을 수행하셨던 ‘공생활’로 넘어가는 분기점이었다.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은 죄 많은 민족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군중 대열에 끼어 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다. 죄인들 가운데 죄인들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고 자신을 낮추신 순간, 하느님의 성령이 그분 위에 머무르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마르 1,11; 루카 3,22)라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신다.

 

하느님께서 친히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분의 마음에 꼭 드셨던 예수님을 주님 세례 축일(1월 9일) 구약의 첫 번째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선택된 분이고 하느님의 영을 충만히 받으실 분으로 소개한다. 그분은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이사 42, 2-4)

 

사람이 하는 일에도 기(氣)와 향(香)이 있는 모양이다. “서권기문자향(書卷氣文字香)”이란 말이 있듯이,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고, 글 구절에도 향기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갖추어진 사람일 땐 일할 때나 걸을 때 땅의 기운을 들이마실 수 있고, 나무나 풀의 향기를 마셔 내면에 화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가 세례 받은 신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은 우리는 공연히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도 않고,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쉽사리 잘라버리지 않으며,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경솔하게 등불을 꺼버리지 않고,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어둡고 차가운 세상에서도 실망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그리하여 쉽사리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이 없이 끝까지 올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증거해 나가야겠다. 그럴 때 우리는 언젠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고 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4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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