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미술ㅣ교회건축

교회 건축의 영성: 초대교회의 정신과 모습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343

[교회 건축의 영성] 초대교회의 정신과 모습이

 

 

수많은 교회 건축물 안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과연 어떤 건축물이 ‘교회’라는 합당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 고민하곤 합니다. 결국 신학적 건축적 물음은 하나로 결론을 맺습니다.

 

초세기 교회의 모습.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 아마 형태도, 삶의 방식도,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교의도, 전례도 지금의 형태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의 상황도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야훼의 백성’(Qahal Yahwe)이라고 불렀습니다. ‘70인역’(Septuaginta)에서는 야훼 앞에 모이는 ‘카할’을 ‘하느님의 백성’(εккλεσια του θεου)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을 하느님의 ‘교회’(Eккλεσια)라고 부릅니다(1코린 15,9; 갈라 1,13).

 

그리스어의 ‘에클레시아’(Εккλεσια)는 공개적 모임이며 정치적 민중집회입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단체를 구약의 하느님 백성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에클레시아’로 부른 것이 라틴어와 라틴 계통 현대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란 하느님의 백성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뒤에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거행되는 것은 그리스어로 ‘시낙시스’(συναξισ : 집회의 의식)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의식(미사)은 내용이 풍부해서 그것을 한마디로 이루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사에 대한 명칭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리스어의 이러한 명칭은 미사에 대한 성격을 드러냅니다.

 

‘집회의 의식’도 그중 하나이지만 감사의 의식, 찬미의 의식, 봉헌, 제물, 빵을 나누는 의식 등이 있고, 라틴어로도 봉사, 직무, 제물, 봉헌, 신앙선언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미사(missa)란 말은 파견(Ite missa est)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지만 위의 표현은 미사가 내포하고 있는 풍부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츠치아 요시마사, 「그 의미와 역사」, 성바오로). 교회 건축은 이러한 내용을 풍성히 담고 있어야 합니다.

 

 

유스티노 성인의 2세기의 미사

 

주일에 도시와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훌륭한 일을 본받으라고 권하며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빵과 물과 포도주를 섞은 잔을 가져다줍니다. 그는 이것을 받아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자신들이 이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뽑힌 데 대하여 오랫동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이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나면 모든 참가자는 “아멘.” 하고 환호성을 올립니다.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회중이 응답하고 나면, 부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든 참석자에게 ‘축성된’ 빵과 물 탄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그곳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단순한 전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지만 세기마다 우리는 거기에 새로운 예식을 덧붙였습니다. 특히 주교들이 정부 고관이 되었을 때 궁정예식을 교회의 전례에 옮겼고, 그로 말미암아 전례는 일반사람들에게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냉소적인 반응과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이 어려운 전례의 발전은 신부들만이 보존하는 가운데 신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방관자적 입장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구경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절이 거행되는 장소는 연기자와 관람자의 극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전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럽의 문화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례와 함께 유럽의 문화를 전파하고자 한다면 이는 전례를 통해 다른 민족에게 유럽 문화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는 바로 교회의 전례적 식민주의가 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식민주의에 대한 증오감이 전례나 교회 자체에 돌아올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더라도 전례는 더욱 단순해져야 합니다”(「가톨릭시보」 1968년 3월). 전례를 담는 그릇을 떠나서 ‘현대의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 더 명확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의 사명 안에서 지역사회의 복음화

 

성경은 한 번도 교회가 무엇이라고 정의한 일이 없지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밭, 그물과 양 떼라는 비유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묘사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가톨릭대사전」 ‘교회’).

 

현대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가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임을 밝혔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더 이상 ‘내’ 교회의 울타리는 없어지고, 본디 교회 정신 안에서 교회는 지역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교회 공간은 지역 주민의 구성원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

 

 

 

역사 안에서 교회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어떤 형식으로 살았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현시대의 교회 구성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순수하게 실천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명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로 복음선포, 전례, 교리교육, 선교와 봉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복음선포와 성찬의 전례, 교리교육, 선교와 봉사의 기능을 담으려고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유다교의 회당을 빌려 사용하다가 점차적으로 주거 안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을 겸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지역으로 확장된 이후 소규모의 가정집들과 박해를 피하여 지하무덤(카타콤바)에서 그 기능을 담아오다 종교의 자유로 넓은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태양신 숭배의 의전적 형식이 추가되면서 초대교회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시대는 교회에 무엇을 요청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현대의 종교시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 고유의 프로그램과 역할을 통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삶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으며, 지역에 하느님을 체험하는 또 다른 장소가 될 것입니다.

 

각 교회 시설이 그 지역사회 안에서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실천하고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자리정립을 하고 이런 공간이 지역사회 안에서 네트워크(관계망)로 연결될 수 있다면 교회의 사명 안에서 지역 사회의 복음화는 성전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더 당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이호 요셉 - 광주대교구 운남동본당 주임신부. 경희대학교 건축대학원과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 계획과 설계를 공부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함평 하상성당, 군산 축동성당, 한성대성당 등의 설계에 함께하였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이호 요셉]



2,35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