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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유다교위원회, 우리 시대 반포 50주년 기념 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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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9 ㅣ No.814

교황청 유다교위원회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9)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4항) 반포 50주년 기념 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숙고

 

 

서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4항)가 50년 전에 발표되었다. 이 선언의 제4항은 가톨릭 교회와 유다교와의 관계를 새로운 신학적 틀에서 제시하고 있다. 아래의 숙고는 유다교와 가톨릭의 관계에서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또한 미래를 위한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그 관계의 고유한 지위를 종교간 대화의 넓은 차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계시의 의미,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철회되지 않은 계약의 관계, 유다교와 교회의 복음화 사명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 더욱 깊이 논의된다. 이 문서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가톨릭 차원에서 숙고한 것이다. 그 문제들을 신학적 맥락에서 살펴보며 가톨릭 전통을 따르는 이들과 유다교 전통을 따르는 이들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주도록 하였다.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 문서나 교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 발전해 온 현대의 신학적 질문에 대하여 유다교위원회가 마련한 숙고이다. 이 문서는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신학적 측면을 풍요롭고 깊게 하는 신학적 숙고의 발전에 출발점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의 지난 50년 동안의 영향에 관한 약사

 

1. 분명히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가톨릭 교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던 문헌에 속한다. 교회가 유다 민족과 유다교와 맺은 관계의 변화는 과거와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확연해진다. 과거에는 양측이 크게 멀어져 있었는데 그 부분적인 원인은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을 차별하고, 심지어 개종을 강요하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48항 참조).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비대칭적 관계가 놓여있다. 소수의 유다인들은 다수인 그리스도인들과 자주 대립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 의존하여야 했다. 나치스 시절의 유럽에 드리웠던 유다인 대학살(Shoah)의 어둡고 끔찍한 그림자는 교회를 유다 민족과의 유대에 관한 새로운 숙고로 이끌었다.

 

2. 그러나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에 표현된 유다교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으로, 한때 서로 회의적으로 대했던 두 공동체가 오랜 세월 점차적으로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 갈등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동료, 더 나아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은 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 증진을 위한 견고한 기초로 여겨지는 것이다. 

 

3.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74년 10월 22일에 유다교위원회를 설립하셨다. 이 위원회는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산하 조직이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유다교와의 종교 대화를 돕고 촉진하는 직무를 수행한다. 또한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위원회를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와 연계해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다교] 회당과 [가톨릭] 교회의 분리가 선택된 백성들 사이의 첫째가는 가장 심각한 단절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유다교위원회는 설립된 해인 1974년의 12월 1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4항)의 실천을 위한 지침과 제안”이라는 제목으로 첫 공식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문서의 중요한 새로운 관심은 유다교가 스스로 정의한 대로 유다교를 이해하고,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존중을 표현하며, 유다인과 나누는 대화가 가톨릭 교회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이에 관하여 이 문헌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히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종교적 전통의 기본 요소에 관한 지식을 확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이 스스로의 종교 체험에 비추어 자신에게 어떠한 본질적 특성이 있다고 정의하는지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서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 신앙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와 유다교가 나누는 대화의 특성을 고찰한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교 전례가 유다교의 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언급하며, 가르침과 교육과 훈련의 분야에서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술하고, 결론에서는 함께 하는 사회 활동을 제안한다. 

 

5. 설립 11주년을 맞이한 1985년의 6월 24일에 유다교위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론과 교리 교육에서 유다인과 유다교를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공지”라는 제목의 둘째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관계를 고찰하고 유다교에 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를 묘사하며 신약 성경에서 유다인이 표현된 방식을 설명하고 전례의 공통점, 무엇보다 교회 전례력의 중요한 축일들에서 공통점을 찾고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관계에 간결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매우 강력한 신학적-주석적 경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선조들의 땅”과 관련하여,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전통에 뿌리를 둔 이러한 종교적 애착을 이해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일종의 주관적인 종교적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한다. ……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와 그 정치적 선택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입각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속성은 “역사적 사실이며 하느님 계획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표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6,1).    

 

6. 유다교위원회의 셋째 문서는 1998년 3월 16에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우리는 기억한다. 유다인 대학살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유다인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이 문서는 지난 이천년 동안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유감스럽게도 균형을 이루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매우 날카롭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 문서는 독일 나치스의 반유다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되돌아보고 유다인 대학살의 인간적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문서의 서두에 나오는 서한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문서가 참으로 “과거의 오해와 불의에 따른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피력하셨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문서가, 유다인 대학살의 형언할 수 없는 죄악이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미래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 주기를 바랍니다.”

 

7. 성좌가 발행한 연재 문서 가운데에서 2001년 5월 24일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발행한,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를 구체적으로 다룬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라는 제목의 문헌을 언급해야 한다. 이는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주석적 신학적 문서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기초한 공통 주제들을 다룬 보화들로 넘치는 문서이다. 유다 민족의 성서를 “그리스도교 성경의 근본 요소”로 여기며, 유다교 성서의 근본 주제들과 그것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수용된 것을 논의하고 신약 성경에서 유다인이 소개된 방식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8. 글과 문서들이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재위하실 때에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가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유다 민족을 향한 호소력 있는 태도로 이러한 대화를 촉진하고 그 깊이를 더하셨다. 성인께서는 나치스의 강제 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방문하시어 유다인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최초의 교황이셨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로마에 있는 유다인 회당을 방문하시어 유다교 공동체와의 연대를 나타내셨다. 역사적인 성지 순례를 하실 때에 이스라엘도 국빈 방문하시며 종교간 만남에 함께하시고 두 명의 수석 랍비를 접견하시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셨다. 성인께서는 거듭하여 바티칸에서나 여러 사도 방문 동안에 유다인 단체와 만나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교황으로 선출되시기 이전부터 많은 강의를 통하여 옛 계약과 새 계약 그리고 유다교 회당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숙고를 제시하시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는 대화에 참여하셨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되신 이후에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모범을 따라 이러한 태도에 힘을 보태시고, 말씀의 힘으로 유다교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시며 당신의 방식대로 이 대화를 촉진하셨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이셨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께서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는 대화 촉진에 크게 힘쓰셨으며 아르헨티나에 사는 많은 유다인들과 우의를 나누셨다. 교황이 되신 지금도 그분께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많은 우의의 만남으로 유다교와 나누는 대화를 위하여 커다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다. 교황의 이와 같은 만남은 2014년 이스라엘에서 처음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교황께서는 유다교의 두 수석 랍비를 만나셨고 통곡의 벽을 방문하셨으며 야드 바솀(Yad Vashem, 나치스의 유다인 학살 추모 센터)에서 유다인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9. 유다교위원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의 사무국을 통한 다양한 유다인 조직들과의 접촉과 관계가 존재했다. 유다교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고, 조직적 일치가 없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접촉 대상을 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화의 의사를 밝힌 모든 유다교 단체나 조직과의 개별적인 양자 간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다교 단체들은 가톨릭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러한 대화를 위한 하나의 조직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황청의 유다교위원회를 상대로 하는 공식 유다교 대표인 국제 종교간 협의 유다 위원회(International Jewish Committee on Interreligious Consultations, IJCIC)이다. 

 

10. 이 국제 종교간 협의 유다 위원회는 1970년에 그 업무를 시작하고 1년 뒤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가톨릭-유다교] 공동 회의가 열렸다. 그 이후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 회의는 국제 가톨릭-유다 연락 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Jewish Liaison Committee, ILC)라는 조직이 주관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국제 종교간 협의 유다 위원회와 교황청 유다교위원회의 협력을 도모한다. 2011년 2월 파리에서 다시 모인 자리에서, 국제 가톨릭-유다 연락 위원회는 지난 40년 동안의 제도적 대화를 감사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지난 40년 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전의 대립 관계가 성공적인 협력 관계로 변하고, 이전의 잠재적인 갈등 요소들에 대한 긍정적인 갈등 관리가 이루어졌고, 과거의 불편했던 공존이 견고하고 유익한 상호 관계로 대체되었다. 그동안 우의의 유대가 안정적으로 형성되어서 심지어 대화를 영원히 단절시킬 위험 없이도 논란이 되었던 주제에 대하여 함께 의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대화가 늘 긴장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무엇보다 새 천년기부터의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견해차와 갈등을 열린 자세로 긍정적으로 다루는 데에 커다란 노력이 기울여져 상호 관계가 더욱 두터워졌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11. 국제 종교간 협의 유다 위원회와 나누는 대화 이외에도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수석 랍비들과의 제도적 대화를 언급해야 한다. 이것은 확실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2000년 3월 이스라엘 방문 동안 두 수석 랍비와 만나신 것의 열매라 볼 수 있다. 그 첫 만남은 2002년 6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이러한 만남이 매년 로마와 예루살렘에서 번갈아 이루어지고 있다. 양측의 대표단이 비교적 작은 규모로 구성되어서 생명의 신성함, 가정의 지위, 성경이 사회생활에 주는 의미, 종교의 자유, 인간 행동의 윤리적 기초, 생태 문제, 세속 권위와 종교 권위의 관계, 세속 사회에서 종교 지도력의 필수적 자질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매우 직접적이고 깊은 논의가 가능하다. 이 만남에 참여하는 가톨릭 대표단은 주교와 신부로 구성되며 유다교 대표단은 거의 대부분 랍비로만 구성되기에 개별 주제를 종교적 관점에서도 논의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수석 랍비와 나누는 대화는 정통 유다교와 가톨릭 교회가 국제적 차원에서 더욱 열린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 만남 이후에 늘 발표되는 공동 선언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된 영적 유산의 부요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소중한 보화들을 증언한다. 10년 넘게 이어져 온 만남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미래를 위한 확고한 기초가 되는 두터운 우의를 확인할 수 있다. 

 

12. 성좌의 유다교위원회의 노력은 물론 이러한 두 제도적 대화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 위원회는 유다교의 모든 흐름에 열려 있으며 성좌와 관계를 맺으려는 모든 유다 단체와 조직들과의 접촉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 유다인 측은 교황 알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위원회는 늘 그러한 기회를 마련하여 왔다. 유다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이외에도, 성좌의 유다교위원회는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유다교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지역별로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 촉진의 지원을 위한 개별 주교회의와의 협력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3. 지난 수십 년 동안 교회 안의 대화와 교회 밖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이 매우 상호 의존적이며 이들의 대화는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보여주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상호 우의를 통하여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교회는 유다교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에서 구원론적 기초를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놓이게 되어 결국 비역사적 영지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의 일부 신앙이 유다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도, 또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 성경 본문을 함께 읽고 하느님 말씀의 부요를 깊이 이해하도록 서로 돕는 풍요로운 상호 보완성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또한 많은 윤리적 신념을 공유하며 정의와 민족들의 발전에 대한 공동 관심사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49항). 

 

 

2.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특별한 신학적 위치 

 

14. 유다교와 나누는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특별하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뿌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관계를 규정하기 때문이다(「복음의 기쁨」, 249항 참조). 역사적 단절과 이에 따른 고통스러운 갈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의식하고 있다. 유다교는 단순히 다른 종교로 취급될 수 없으며 유다인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대로) 우리의 “형”(1986.12.31. 미사 강론)이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씀대로) 우리 “신앙의 선조”(Licht der Welt: Der Papst, die Kirche und die Zeichen der Zeit. Ein Gesprach mit Peter Seewald, 2010 참조)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이셨고 당시의 유다교 전통에 익숙하셨으며, 이러한 종교적 환경은 그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중동 교회」[Ecclesia in Medio Oriente], 20항 참조). 그분 주위에 모인 첫 제자들은 같은 유다 민족으로서 유다 민족의 전통에 따라 일상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고자 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태 1,15).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방식에 관하여 유다교에는 매우 다양한 생각들이 있었으며 아직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를 당시 유다인의 사고방식에 따라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의 가르침은 유다인의 시각과 이스라엘의 살아 있는 전통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러한 전통을 거스르는 것으로 본다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적지 않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 곧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메시아)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커다란 사건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 그 시대의 유다인,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 왕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전통에 따라 성장하셨으며, 예언자의 후예로서 당신의 민족과 그 역사의 연속성 안에 계신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 신앙에 비추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성자로서 시간과 역사와 지상의 모든 현실을 초월한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다(필립 2,6-11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를 기다린 [이스라엘] 역사와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사명과 기대를 완벽한 방식으로 완성하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사명과 기대를 초월하신다. 여기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차이, 곧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드러난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민족에 속하시는 분으로, 당신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여기시는 유다인 스승님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대리자이신 당신을 통하여 바로 이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사실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님과 당시 유다인 당국자들 사이의 갈등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인 율법 위반의 문제가 아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위로 활동한다고 주장하신 것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예수님이라는 분께서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로서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에서 핵심적인 난점이 되신다. 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 그리고 또한 어느 모로 오랜 세월 유다인들이 자기 이해를 위하여 발전시켜 온 유다교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 출신이시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유다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의 역사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로 영향을 받았다. 

 

15. 그래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대화는 단지 비유적인 차원에서만 ‘종교간 대화’, 곧 서로 갈라져 구분되는 두 종교 사이의 대화라고 불릴 수 있다. 독립적으로, 또는 상호 작용 없이 발전한 다음에 만나게 된 서로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종교의 경우가 아닌 것이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성장시킨 토대는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인 것으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다음 성경 시대 이후의 랍비 중심의 유다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랍비 중심의 유다교에서는 희생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좀 더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구전되거나 기록된 하느님 계시에 대한 해석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쌍둥이의 경우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듯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한 쌍둥이 형제와 같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전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성경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두 종교 모두 이를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와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회당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모였으며 음식에 관한 율법과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고백하였다. 이러한 유다인의 예수 운동은 바오로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고 순전히 유다인들에서 시작된 기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바오로의 생각이 힘을 얻었다. 곧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위해서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먼저 유다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초기 교회에는 이른바 유다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할례를 받은 이들의 교회와 이방인 교회, 곧 유다교에서 나온 교회와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다.

 

16. 그러나 교회가 회당에서 갑자기 분리되어 나온 것은 아니며, 최근의 일부 연구에 따르면 3-4세기까지는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초기의 많은 유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 전통에 따라서 살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다수를 차지하고 유다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에 관한 첨예한 논쟁이 제기되자 비로소 궁극적 분리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형제의 사이는 더욱더 멀어져 적대적으로 변했고 심지어 서로를 비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유다인들을 하느님께서 저주하신 민족,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눈이 먼 민족으로 여겼다. 유다인들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께서 처음에 마련하신 길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교도로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교는 율법에 따른 현실 생활 규범의 해석을 결정하는 유다인의 할라카(halaka)에 대비되는 ‘길’이라고 불린다(사도 9,2; 19,9.23; 24,14.22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에게서 더욱 멀어지고 심지어 잔인한 갈등에 빠져, 서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을 포기했다고 비난하였다. 

 

17. 이른바 대체 이론 또는 대체주의는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다교와 관련된 표준적인 신학적 기초를 대표하는 것으로 많은 교부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하느님의 약속과 관심은 더 이상 그들을 향하지 않고 이제 진정한 새 이스라엘, 곧 새로 선택된 하느님 백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전된다는 것이다. 같은 토양에서 자라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열 이후에 수세기 동안 이어진 신학적 대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야 비로소 완화되었다.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유다교에 내려져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신학적 틀에서 분명히 고백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믿음, 더 나아가 암묵적인 믿음을 통한 구원을 확언하면서도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두 개의 실체, 곧 이방인의 교회와 이 교회에 밀려 자리를 빼앗긴 회당을 대립시켜 보는 대체주의 신학은 이제 그 근거를 상실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본래 밀접했던 관계는 오랜 기간에 걸친 긴장 상태로 이어져 오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점차적으로 건설적인 대화 관계로 바뀌었다.

 

18. 이 대체 이론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확인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이 서간의 대상은 유다인이 아닌 유다 출신의 지치고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서간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궁극적인 참된 대사제, 새 계약의 중개자이심을 강조하며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그들이 견디어 내도록 격려하는 데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이 서간에서 그저 지상에 머무는 첫째 계약과 그보다 더 나은 둘째 계약(히브 8,7 참조)인 새 계약(9,15; 12,24 참조)을 대비한 부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계약은 낡고 오래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정의되는 반면에(8,13 참조) 둘째 계약은 영원한 계약으로 정의된다(13,20 참조). 이 서간은 이러한 대비의 근거로 예레미야서 31장 31-34절에 나오는 새 계약의 약속을 제시한다(8,8-12 참조).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 옛 계약의 약속들이 거짓임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들을 유효한 것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약속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확신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주제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대비, 또는 [가톨릭] 교회와 유다교의 대비가 아니다. 대신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천상 사제직과 [인간의] 일시적인 지상 사제직이 대비되고 있다. 새로운 상황에 놓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근본 주제는 새 계약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그리스도교 선언’(4항)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9-11장에 나오는 바오로 성인의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19. 가톨릭이 아닌 이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 선언’은 가톨릭 교회와 전 세계의 종교들의 관계를 동등성을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이 문서의 작성 과정과 본문 자체는 그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유다인에 관한 숙고’(Tractatus de Iudaeis)를 반포할 것을 제안하셨으나 결국은 ‘비그리스도교 선언’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삼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문서에 가톨릭 교회와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지만 유다교와 맺는 새로운 신학적 관계를 다루는 제4항이 거의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다교와의 관계는 다른 세계 종교들과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촉매가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20. 그럼에도 신학적 관점에서 유다교와 나누는 대화는 다른 세계 종교들과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며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곧 구약 성경에 나타난 유다인의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종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신앙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에서 분명히 예수님만이 유일한 열쇠가 되신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사도 4,11; 1베드 2,4-8 참조). 그러나 유다교와 나누는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든 종교와는 다르게 유다교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는 대화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종교간 대화’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일종의 고유한 종교 내부적인 또는 가족 간에 나누는 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 4월 13일 로마의 [유다교] 회당을 방문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유다교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우리 종교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관계를 유다교와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매우 사랑하는 형제들이며 어느 모로 여러분은 우리의 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계시 

 

21.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 계획을 찾아 볼 수 있다(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4항 참조). 이 구원 계획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성경 역사의 시작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창세 12장 이하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어 인류에게 말씀하시며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의 백성으로 모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선별하셨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계속 파견하신 이들인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을 참 하느님, 유일하신 하느님, 살아 계신 하느님, 구원하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내셨다. 이러하신 하느님의 선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게 되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첫째 개입, 곧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과(탈출 13,17 이하 참조)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의 수립(탈출 19장 이하 참조) 이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참다운 한 민족이 되고 하느님 백성이 되었음을, 곧 하느님의 메시지와 약속을 전달하는 이들이며 민족들 가운데에서 민족들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증인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이사 26,1-9; 54장; 60장; 62장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사명을 완수하는 법과 그들에게 맡겨진 계시를 전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율법을 주셨으며(탈출 20장; 신명 5장 참조), 이 율법은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도록 해 준다. 

 

22.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보화를 깨지기 쉬운 그릇에 담고 있다. 이스라엘과 주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충성과 배신의 역사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신 도구들이 작고 미약하지만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자비와 당신 은총의 자애, 그리고 인간의 그 어떤 불성실함으로도 무효화될 수 없는 당신 약속에 대한 진실성을 드러내신다(로마 3,3; 2티모 2,13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걸어가는 길의 모든 걸음마다 최소한 ‘얼마 되지 않는’(신명 4,27 참조) ‘남은 이들’(이사 1,9; 스바 3,12; 이사 6,13; 17,5-6 참조) 곧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1열왕 19,18 참조) 소수의 충실한 이들을 남겨 두셨다. 이 남겨진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셨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대상은 언제나 선택된 백성으로 머물러 있고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류 전체가 하나로 모이고 하느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다.

 

23. 교회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참조)으로 불리지만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 백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2항 참조). 교회는 하느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기초로 세워졌기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그러한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참조).

 

2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어 인류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셨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응답할 것을 권유한다. 사람들의 응답이 하느님 말씀에 일치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토라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전통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토라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가르침이다. 토라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선조들의 교훈』[Pirkei Avot] 2, 7). 토라를 따르며 유다인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자기의 몫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서 일치를 찾고 유다교는 토라에서 그들의 일치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은 무엇보다도 토라에 현존합니다. 이 두 신앙 전통은 한 분이신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 곧 당신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를 추구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향하고, 유다인은 토라의 가르침을 향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교와 유다교 국제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신 연설, 2015.6.30.).

 

25.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유다교 신앙과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 백성이 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두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경전은 이 두 방법에 모두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른 구원에 대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은 우리를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해 준다. 하느님께서 여러 상황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당신의 구원 의지에 달려 있어도 그러하다. 성경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임을 보여 준다(창세 12,1-3; 이사 2,2-5; 1티모 2,4 참조). 그러므로 “유다인들은 토라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충실하다.”는 말처럼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보편적이며 모든 인류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 말씀은 분리되지 않은 단일한 실재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다. 

 

26.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살아 있는 토라’로 여길 수 있다고 단언한다. 토라와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증언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당신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선재는 핵심 교리이다. 그리고 랍비 전승에 따르면 토라와 메시아라는 명칭은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창세기 라바』[Genesis Rabbah], 1,1 참조). 게다가 유다인들의 관점에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종말 때에 토라를 해석하시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로는 때가 차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한데 모이게 되는 것이다(에페 1,10; 콜로 1,20 참조).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새 모세’로 제시한다. 마태오 복음 5장 17-19절은 예수님께서 토라를 권위 있고 바르게 해설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준다(루카 24,27.45-47 참조). 그런데 랍비 문학에서는 토라와 모세를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새 모세’이신 그리스도께서 토라와 관련되실 수 있는 것이다. 토라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께서 현존하시는 자리를 마련하신다. 이러한 현존을 모든 예배 공동체가 체험한다. 히브리어 “다바르”(dabar)는 말과 사건을 모두 의미한다. 그래서 토라의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에 열릴 수 있다는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4.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

 

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시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민수 23,19; 2티모 2,13 참조). 이전의 계약들에 나타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늘 선택하시는 충실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로마 9,4; 11,1-2 참조). 새 계약은 이전의 계약을 폐지하지 않고, 이전의 계약을 완성시킨다.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벌어진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옛 계약과 새 계약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계약은 고유한 특성을 지닌 것이다(레위 26,12의 계약 양식 참조: “나는 너희와 함께 살아가면서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새 계약은 옛 계약의 구원 약속의 정점이기에 옛 계약과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옛 계약은 새 계약의 바탕이며 토대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옛 계약을 맺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계약이 가능하도록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옛 계약의 시대에 사시면서도 새 계약의 구원 사업으로써 옛 계약의 차원들을 확인하고 완성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계약이라는 말은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다르게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새 계약은 결코 옛 계약을 대신할 수 없고 옛 계약을 전제로 한다. 또한 새 계약은 옛 계약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고유한 본성을 강화하고 이를 모든 민족들 가운데 충실하게 응답하는 이들 모두에 대한 개방성으로 규정한다(즈카 8,20-23; 시편 87[86] 참조).

 

28.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일치점과 차이점은 먼저 하느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나타나게 된다. 구약 성경이 하나인 그리스도교 성경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존재하기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뿌리 깊은 소속감과 내적 유대가 존재한다. 그리스도교는 구약 성경에 뿌리를 내려 여기에서 끊임없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으로 여겨지는 분이시다. 신약 성경이 존재하기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내용이 구약 성경의 내용을 대신하거나 무효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2세기에 마르키온이 이러한 입장을 내세웠다. 그는 신약 성경이 약속의 책인 구약 성경을 낡아 버린 것으로 만들어, 해가 떠오르면 달빛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새로운 것의 광채 안에서 구약 성경이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 성경의 뚜렷한 단절은 결코 그리스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리스도 교회는 144년에 마르키온을 쫓아내며 그가 주장한, 구약 성경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순수한 그리스도 성경이라는 개념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주인이신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증언하여 두 성경의 일치, 곧 계약들의 일치(concordia testamentorum)를 견지하였다. 

 

29. 물론 이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맺고 있는 관계의 일부일 뿐이다. 구약 성경의 공동 유산은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유대의 중요한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두 신앙 공동체들의 관계에 근본적 긴장을 야기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에 비추어 구약 성경을 읽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확신을 지닌 것이다.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구약 칠경 발췌 주해」[Quaestiones in Heptateuchum], 2,73). 이러한 의미에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의 선포이며 신약 성경은 구약의 최고의 주해라고 정의하였다(「에제키엘서 강론」[Homiliae in Ezechielem], I, VI,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6항 참조).

 

30.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주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의 완성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쉽게 줄 수 있다. 이러한 인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서기 70년의 제2성전 파괴라는 재난 이후에 유다교도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전에 묶여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하였기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고유한 방식을 이미 발전시켰던 바리사이들을 따르는 랍비들이 유다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 성전 없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31. 이에 따라 이 상황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두 방식, 곧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주해와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 유다교의 랍비 방식의 주해가 나타난 것이다. 이 두 방식의 주해는 저마다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담고 있기에 그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와 성전 파괴 이후의 랍비 중심의 유다교는 나란히 발전하였지만 서로 대립하고 서로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에 이 문제를 신약 성경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수세기에 걸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이 두 방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어 “풍요로운 상호 보완성”을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부요를 깊이 이해하도록 서로 돕도록”(「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49항) 하는 것이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과제가 되었다.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표한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ble)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의 성경 해석이 가능한 해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인정해야 하며 “그것은 제2성전 시대의 유다교 성서와 연속성을 지닌 해석으로서 병행적으로 발전한 그리스도교 해석과 유사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각자의 신앙관과 연관되어 있는데, 해석은 그 신앙관의 결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 해석을 다른 해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22항). 

 

32. 이 두 해석은 저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 신앙이 아브라함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자명하다. 이는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스도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계약의 역사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 다시 말해서 계약의 표징으로 거행하는 할례와(창세 17장 참조) 모세와 맺으신 계약,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탈출 19,5; 24,7-8 참조),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탈출 31.16-17 참조) 관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로(베네딕토 16세,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117항 참조) 노아와 맺으신 계약에서 모든 피조물에 이르게 된다(창세 9,9 이하 참조).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약속하신다(이사 55,3; 61,8; 예레 31,31-34; 에제 36,22-28 참조). 각각의 계약은 이전의 계약을 통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는 새 계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새 계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의 영원한 계약이므로 옛 계약의 예언자들이 약속한 것에 대한 궁극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가 표현한 것처럼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에 대한 “예”와 “아멘”인 것이다(2코린 1,20 참조). 하느님의 쇄신된 백성인 교회는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선택하여 주셨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으뜸 자리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부인되거나 그 사명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계약은 옛 계약의 폐지나 대체가 아니라 옛 계약이 약속한 것의 완성인 것이다. 

 

33.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먼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선조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약의 공동체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결코 폐지되지 않으며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충실을 바탕으로 유효하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백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새 계약은 오로지 옛 계약의 확언과 완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 아브람을 부르신 본래의 목적인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보편성이 새 계약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고 확신한다(창세 12,1-3 참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의 이러한 연결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교회가 이스라엘 없이는 구원 역사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잃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관해서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없다면 이스라엘이 지나친 개별성에 머물러 하느님 체험의 보편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위험에 빠진다는 시각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는 계약에 따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다.

 

34.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계약의 역사는 오직 하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결코 폐지되거나 철회되지 않는(로마 9,4; 11,29 참조)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민족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맺으신 옛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스라엘은 새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중적 사실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가 열정적으로 맞서 싸운 배경이 되는 믿음이다. 바오로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공정하게 다루면서 이스라엘의 뿌리에 이민족의 야생 가지가 접붙여진 모습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로마 11,16-2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푸른 올리브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를 지니고 계신다고 할 수 있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모든 약속의 뿌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요한 8,58 참조). 이러한 모습은 바오로가 신앙에 비추어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 열쇠가 된다. 이러한 모습으로 바오로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와 차이라는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이 모습은 접목된 야생 가지가 접목한 나무에 원래 있던 가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현실과 하느님 구원 사업의 새로운 차원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리스도 교회가 단지 이스라엘의 가지나 한 열매로 이해될 수는 없다(마태 9,10-13 참조). 다른 한편으로, 그 모습은 그리스도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뿌리에서 영양과 힘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접목된 가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뿌리에서 잘려 나가게 되면 시들거나 심지어 죽게 될 것이다(베네딕토 16세, 후속 권고 「중동 교회」[Ecclesia in Medio Oriente], 21항 참조).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철회되지 않는 계약

 

3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셨기에 하느님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이나 방법이 존재할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데에 그리스도 없는 유다인의 길과 그리스도인들이 나자렛의 예수님이라고 믿는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길들이 있다는 생각은 사실 그리스도 신앙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적이며, 그래서 또한 배타적인 중재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에 속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당신의 계시로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으로 온전히 드러나셨다.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여기며 기도드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지기에 그러한 것이다(이사 56,1-8 참조). 그래서 교황청 유다교위원회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설교와 교리 교육에서 유다인과 유다교를 소개하는 바른 방법에 대한 공지」(Notes on the correct way to present the Jews and Judaism in preaching and catechesis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1985)는, [가톨릭] 교회와 유다교가 “구원에 이르는 두 개의 나란한 길”로 제시될 수 없고,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의 구원자로 증언”하여야 한다고 확언하였다(I, 7항).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보편적 중재자이시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고 고백한다. 

 

36.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라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에서,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지 않기에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은 바오로 성인의 구원론적 이해에서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할 것이다. 바오로 성인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구원의 역사에는 그 어떤 단절이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 유다인들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요한 4,22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특별한 사명을 맡기셨고, 당신의 “맏아들”(탈출 4,22)을 포함하지 않은 채로 모든 민족들을 위한 당신의 신비한 구원 계획을 성취하지 않으신다(1티모 2,4 참조). 그래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는 그 스스로가 품었던 의문,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거부하신 이유에 대한 의문을 단호히 배척한 것이 명백하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로마 11,29)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구원에 함께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 고백 없이도 구원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비를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에 대하여 바오로가 로마서 9-11장에서 전개한 생각이 다음의 웅장한 찬가에 이르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 de Clairvaux)는 그의 「고찰」(De Consideratione, III/I,3)에서 유다인들에게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특정한 때가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37. 가톨릭 신자들의 또 다른 초점은 매우 복잡한 신학적 문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 구원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이, 이에 못지않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결코 철회되지 않는 계약에 대한 명백한 신앙 고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맞추어진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은 교회의 믿음이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두 갈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 그리고 또한 이방인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 사업의 신비를 마주하게 된다. 곧 유다인들을 개종하려는 선교적 노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때, 곧 “만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참조) 되는 때를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신비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38. 유다교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 곧 ‘비그리스도교 선언’의 4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철회되지 않는 계약에 관한 결정적인 신학적 틀 안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모든 신학적 의문이 이 문서로 해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문들을 ‘비그리스도교 선언’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더 깊은 신학적 숙고가 필요하다. 물론, 유다교에 초점을 맞춘 더 오랜 된 교도권 문헌이 있지만, ‘비그리스도교 선언’ 제4항에 처음으로 가톨릭 교회의 유다인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개요가 제시되었다.

 

39. 이 공의회 문헌은 놀라운 신학적 전환점이었기에 종종 확대 해석되고 본문에 실제로는 없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이해되기까지 한다. 확대 해석의 중요한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변치 않으며 결코 그 효력을 잃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이지만, ‘비그리스도교 선언’ 제4항에서 명시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사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이를 처음으로 매우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교황께서는 1980년 11월 17일 독일 마인츠 시의 유다교 대표들과 만남에서 하느님께서는 결코 옛 계약을 철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 대화의 첫째 차원, 곧 하느님께서 결코 철회하지 않으시는 옛 계약의 당신 백성과 …… 새 계약의 당신 백성의 만남은 우리 교회 안의 대화이며 성경의 1부와 2부의 만남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마인츠 유다 공동체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3항). 이와 같은 신념은 1993년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확인된다. “옛 계약은 결코 철회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항). 

 

 

6. 유다교와 교회의 복음화 사명

 

40. 이른바 유다인 선교가 유다인들에게는 매우 곤란하고 민감한 문제라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이 문제는 유다 민족의 생존 자체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로 민감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 구원의 의미와 그에 따른 교회의 세계 선교가 근본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의 복음화를 다른 종교나 세계관을 지닌 이들의 복음화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는 가톨릭 교회가 유다인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제도적 선교 활동의 촉진과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다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적 선교가 원칙적으로 거부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다인들에게도 증언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이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라는 것을 인식하여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신앙을 증언하여야 하며, 특히 유다인 대학살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명심하여야 한다. 

 

41.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선교의 개념이 올바르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부르심에 참여하게 하시고(마태 10,6 참조),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모든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르심에도 참여하게 하신다(마태 28,19 참조). 이리하여 하느님 백성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세례를 바탕으로 유다인들과 이민족을 부르시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에페 2,11-22 참조). 사람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인 당신의 몸으로 들어오게 된다(교회 헌장 14항 참조).

 

42. 개인의 삶과 복음화에서 그리스도인의 선교와 증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원칙은 폭력을 행사하기보다는 폭력을 견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 아시는 방법으로 보편적인 구원 사업을 이루신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지 스스로 인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이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집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승리에 이르는 활동에 대한 강한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의 역사적 실현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선교 교령 7항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을 체험하고, 이 체험을 다른 이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한 봉사로써 나타낸다.

 

43. 비록 [초대 교회의] 유다 그리스도인과 이민족 그리스도인의 수적인 비율이 다른 인상을 줄 수 있어도, 새 계약의 교회가 유다인과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질적인 규정은 사실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구약과 신약의] 두 계약이 서로 무관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민족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백성과 단절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구원 사업에서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역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된 유다인과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백성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구원의 보편적 중재자시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차원에서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모든 이는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과 관련된다. “먼저, 계약과 약속이 주어졌던 저 백성이 참으로 그렇다. 인성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서 태어나셨으며(로마 9,4-5 참조), 선택에 따라 보면 그 백성은 조상 덕택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소명을 다시 거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로마 11,28-29 참조)”(교회 헌장 16항).

 

 

7. 유다교와 나누는 대화의 목적

 

44. 대화의 첫째 목적은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상호 이해를 깊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더 깊이 알게 되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을 참되고 깊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깊은 지식은 상호 풍요를 낳아 대화 상대를 은사의 대상으로 만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 선언’ 제4항은 풍요로운 영적 유산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유산은 성경과 신학의 연구, 그리고 대화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다교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보물의 발굴이 중요한 목적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성경 해석이 언급되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2001년에 발표한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의 머리말에서 당시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구약 성경의 유다교적 해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존중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천 년도 넘게 이어져 온 유다교의 주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도 그리스도교의 주석 연구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 주석 분야에서 많은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현재 함께 일하며, 그들이 서로 다른 종교 전승에 속하기에 그러한 협력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5. 이러한 상호 인식의 증진이 전문가들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가톨릭 교육 기관, 특히 사제 양성에서 ‘비그리스도교 선언’과 사도좌의 후속 문헌들을 그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교회는 유다교 공동체가 이와 유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비그리스도교 선언’ 제4항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다음 세대에게도 알려 주어 그들이 이를 받아들여 확산시키도록 하여야 한다. 

 

46.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대화의 중요한 목적에는 분명히 정의, 평화, 피조물 보존, 세계의 화해를 위한 공동 노력이 포함된다. 과거에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진리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그에 따르는 완고함으로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들은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야 한다. 종교들이 대화에 성공적으로 참여하고 이를 통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할 때에만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세속 권위가 종교 자유를 보장할 때에 그러한 대화와 평화의 전제 조건이 충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수 종교에 대한 대우와 그들의 권리 보장 여부가 기준이 된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에서 이스라엘 안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이스라엘만큼이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의 유다인들을 마주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성지에는 아직 평화가 없기에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지속적으로 바쳐야 한다. 이러한 성지의 평화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47.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유다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의 모든 현상과 모든 형태의 반유다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 반유다주의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가장 눈에 안 뜨이게 나타난 반유다주의가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곧 유럽 유다인의 3분의 2가 말살된 유다인 대학살이 그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두 신앙 전승은 늘 깨어 있고 감수성을 발휘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가톨릭 교회는 유다인과 가톨릭 신자들의 우정의 강한 연대로써 우리의 친구인 유다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반유다주의 경향을 물리치도록 하여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특히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반유다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신다.

 

48. 그런데 정의와 평화는 대화에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회적 자선 분야는 활동을 위한 충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유다교 윤리와 그리스도교 윤리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아픈 이들을 도와주라는 계명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성좌의 유다교 위원회와 국제 종교간 협의 유다 위원회(IJCIC)는 2004년 아르헨티나의 금융 위기 때에 가난한 이들과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공동 운영하고 결핍 아동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식사를 제공하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 교회들에는 대규모 자선 단체들이 있는데, 유다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단체들은 인간의 곤경을 해소하는 데에 협력할 수 있다. 유다교는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걷는다.”(신명 11,22 참조)라는 계명이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바빌로니아 탈무드 [Babylonian Talmud], 소타[Sotah] 14A)을 돌보는 것으로써 하느님 닮기(Imitatio Dei)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원칙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다(마태 25,36-46 참조).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가난과 인간의 고통을 방치할 수 없고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49.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인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할 때에 하느님의 자애로운 배려를 증언하게 된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적대적으로 맞서지 않고 서로 협력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1980년 11월 17일 마인츠에서 독일의 유다인중앙협의회와 랍비연합회에 한 연설에서 그러한 협력을 요청하셨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세상을 위한 축복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과 민족들의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협력하여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온전함과 깊이를 지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헌신을 기꺼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2015년 12월 10일

교황청 유다교위원회

의장 크루트 코흐 추기경

부의장 브라이언 패럴 주교

사무총장 노베르트 J. 호프만 신부

 

<원문 : Commission for Religious Relations with the Jews “The Gifts and the Calling of God are Irrevocable”(Rom 11:29) A Reflection on Theological Questions Pertaining to Catholic-Jewish Relations on the Occas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Nostra Aetate”(No.4), 2015.12.10., 독일어와 이탈리아어판도 참조>

 

영어 :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relations-jews-docs/rc_pc_chrstuni_doc_20151210_ebraismo-nostra-aetate_en.html

 

독일어 :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relations-jews-docs/rc_pc_chrstuni_doc_20151210_ebraismo-nostra-aetate_ge.html

 

이탈리아어 :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relations-jews-docs/rc_pc_chrstuni_doc_20151210_ebraismo-nostra-aetate_i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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