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의 자비와 거짓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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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5 ㅣ No.492

[레지오 영성] 하느님의 ‘자비’와 ‘거짓 자비’

 

 

우리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지내고, 이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시금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레지오 단원분들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인가?

 

‘밀양’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남편을 먼저 하늘에 보내고, 아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갑니다. 하지만 갑자기 아들 또한 동네 주민에 의해 살해됩니다. 이런 충격에 주인공은 크나큰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보냅니다. 그러던 중 이웃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고, 조금씩 상처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해범의 말을 듣고,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살해범은 자신이 교도소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크나큰 혼란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자신은 아직도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힘겹게 살아가는데, 정작 살인범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하며, 편안히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고나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너무나도 쉽게 죄를 용서받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느님의 쉬운 용서가 ‘하루하루 힘겹게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현실이 아닌가?,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초점을 죄인에 두고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바라 볼 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초점을 피해자에 두면, 너무나도 쉽게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때로는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로써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자비’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하느님의 자비일까요?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와 ‘사랑’을 포함한 ‘자비’라 하는데, 우리는 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둘 사항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첫째, 고해성사의 속성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인이 회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1450항) 그리고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한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할 것이다.”(1459) 그리고 통회에 대해서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145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해성사’는 나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없애는 심리적 방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아파하는 하느님과 함께 나 또한 아파하면서, 다시금 그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과 이웃들과 화해하는 장(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밀양’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살해범의 태도는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거짓되게 이용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입니다. 신학생 때, ‘사랑’에 관해 이렇게 배웠습니다. “Amore est velle alicui bonum”(사랑은 다른 이에게 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곧 무조건적으로 인내하고,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선을 향해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사랑만이 아니라 ‘자비’도 해당됩니다. 진정한 자비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통해서 나의 악습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의 불편한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나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피하고 막기 위해 ‘도구’로써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이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거짓 자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선’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악’으로 갚는 것은 거짓 자비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를 들려주십니다. 임금이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그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다시 임금이 그 종을 잡아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에서 임금은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곧 하느님으로부터 용서와 자비를 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삶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께로부터 크나큰 자비와 용서를 받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산다면, 곧 하느님의 자비를 ‘거짓된 자비’로써 받아들인다면, 복음의 만 탈렌트를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을 받으려 한 종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이 자리에서 영화 ‘밀양’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역이고, 진정한 회개에 대한 부분 또한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과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완전한 회개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거짓 자비’에 기대어, 죄책감에서 벗어나 삶을 편하게 사는 것을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자비에 기댐으로서 나의 죄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과 하느님과 함께 아파하고, 다시금 그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글을 마치며 프란치스코 교종의 칙서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합시다.” <자비의 얼굴 21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2월호, 김석순 마태오 신부(제주교구 동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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