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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가을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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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1 ㅣ No.859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가을의 빛깔

 

 

결실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은 나이가 들어 원숙해진 삶을 비유할 때 자주 쓰입니다. 사람들은 노인을 사회의 짐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의 결실을 맺은 분들입니다. 노인들이 삶에서 거두어들인 결실은 많은 젊은이가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노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거두어들인 결실들을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맺은 성숙한 결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양분이 됩니다.

 

가을의 특징은 다채로운 색상을 가졌다는 겁니다. 동시에 가을의 빛깔은 부드럽습니다.

 

가을에는 온갖 나무의 잎이 물듭니다. 우리는 노랗고 붉게, 갖가지 색으로 물든 숲으로 가지요. 우리는 태양이 물들인 나무들을 표현할 때 ‘황금빛 10월’이라고 말합니다. 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 삶의 다채로움에 대해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매우 다양한 색과 특성,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대화하고 침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용기와 소심, 과격함과 다정함, 강함과 약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자신만의 삶의 다채로움을 허락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종종 자신만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인격으로 성숙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유일하고도 독특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사실 하느님이 그들에게 만들어 놓으신 모습입니다.

 

가을의 빛깔은 부드럽습니다. 이목을 끌려는 요란한 색이 아니라 다른 색을 수용하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엔 별난 사람처럼 돋보이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게 하려고 빛나고 눈부시게 살아가려고만 합니다. 별나게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끄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지 전혀 알아채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중심을 차지하며 빛을 발하는 이에게 금방 싫증을 냅니다. 상투적인 색깔 때문에 그는 지루한 사람이 됩니다. 다른 색들을 수용하는 가을의 부드러운 색은 우리에게 삶의 다른 차원을 실현하라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만의 색이 모든 것을 수용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의 역할에 굳어지지 않고 생동감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을의 부드러운 빛깔은 우리에게 또 다른 태도를 요구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을 석양이 그 부드러운 빛으로 천지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약점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부드러운 시선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해당되겠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가 가진 모든 오점을 덮어 씌우려고 어떤 사람들을 속죄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자신의 더러움을 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늘 새로운 속죄양을 필요로 합니다. 부드러운 시선은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시선을 가진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태양 아래 있다하더라도 많은 것들이 분명하거나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요. 부드러움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움’을 뜻하는 독일어 ‘밀데’(Milde)는 ‘(곡식 등을) 갈다’를 뜻하는 동사 ‘말렌’(mahlen)에서 왔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삶의 맷돌에서 갈린 사람입니다. 그가 당했던 고통스러운 경험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을 부질없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의 부드러운 시선은 손자 손녀에게 좋습니다. 조부모는 부드러운 부모입니다. 그들 곁에서 손자 손녀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떤 판단도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대로 있어도 됩니다. 아이들은 받아들여지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조부모는 아이들의 약함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조부모의 부드러운 시선은 스스로 자라며 성숙해 지도록 아이들을 신뢰합니다. 노인의 부드러운 시선은 우리 사회에도 좋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부드러운 시선은 누군가가 실수를 해도 그가 자신의 실수를 들여다보고 개선하리라 믿어 줍니다. 부드러운 노인은 재판관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세상만사가 완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실수에서 배우고 겸손하고 낮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가을은 우리 삶의 결실을 바라보고 감사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감사는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힘이 듭니다. 감사는 오늘날 바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입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자기 삶의 다채로움을 허락하라고, 다른 사람과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색을 수용하라고, 그리고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 부드러운 가을과 은혜로운 가을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기를 바랍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가을호(Vol. 31), 안셀름 그륀 신부(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번역 김혜진 글라라(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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