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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2: 달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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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04 ㅣ No.409

[추기경 정진석] (22) 달란트


진석의 머리에서 그려진 성모자애병원이 우뚝 세워져

 

 

- 1963년 4월 당시 인천 부평의 연백성모원.

 

 

진석은 신학기를 무사히 보내고 첫 방학을 맞았다. 진석이 갈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입학 전부터 몸담고 있던 인천 부평의 연백성모원(고아원)이다. 전쟁 중 어머니를 찾던 부산에서 만난 김영식 신부님께 고아원 일을 도와드리겠노라 약속했었다. 진석은 신학교에 갔다고 그 약속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 신부님과 인연으로 사제 성소까지 찾았고 이로써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연백성모원은 진석에게 두 번째 고향이었다. 

 

무엇보다 고아원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야 하는 김 신부님께는 진석의 도움이 절실했다. 진석이 신학교에 가 있는 몇 달 동안은 미군에게 부탁해 물자를 얻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 부식 창고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진석은 고아원에 와서 학교 짐을 풀기가 무섭게 미군 부대로 가서 식자재나 부식을 얻어오며 구걸(?)을 했다. 

 

1954년 첫 방학에 진석이 고아원에 갔더니 김영식 신부님께서 잠시 부르셨다.

 

“미군이 병원을 지어 준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도 한번 물자를 받아서 병원을 지어보자. 연백성모원의 고아들과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병원을 지을 수 있고 운영할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지요?” 

 

“먼저 신청서를 내면 미군이 서류를 심사한다고 해. 그러니 필요한 서류를 네가 한 번 작성해봐.”

 

“네.” 

 

진석이 알아보니 영어로 작성해야 할 신청서가 한 보따리나 될 만큼 복잡한 서류들이었다. 진석은 김 신부님이 시키신 대로 신청서를 쓰기 위한 자료들을 갖고 와 영어로 하나하나 작성하기 시작했다. 신청서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준비해서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 작성했다. 그런데 신청서 중에는 설계도를 첨부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진석이 김 신부님에게 서류를 들고 갔다.

 

- 진석이 그린 병원 설계도에 의해 완공된 성모자애병원 전경.

 

 

“신청서의 설계도, 네가 그려봐” 

 

“신청서에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요?”

 

“너는 공대생이잖아, 네가 그려봐.” 

 

“네?” 

 

진석은 갑작스러운 주문에 당황했지만, 김 신부님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직후에 건축 설계사를 어떻게 찾겠는가.

 

김 신부님은 곧장 진석에게 커다란 방안지(모눈종이) 하나를 주셨다. 그때는 그런 종이를 파는 가게도 근처에 없었고, 고아원 주변도 허허벌판이었다. 진석은 김 신부님이 이미 그 커다란 방안지를 다른 곳에서 구해오셨을 것으로 생각했다. 

 

종이를 받아들고 방으로 돌아온 진석은 그 큰 방안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신부님께서 설계도를 그리라고 해서 한 장을 가져왔지만 이전에 다른 설계도를 자세하게 본 적도 없고 지금에라도 어디 가서 참고할만한 것을 구해 볼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어디에도 모델을 삼을만한 건물이 없었다. 진석은 일단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설명서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두 그려 넣었다. 건물의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 등 여러 장을 그렸다. 그리고 다른 신청서와 함께 신부님께 드렸다. 

 

재미있게도 진석이 다음 방학 때 고아원으로 돌아오니 병원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황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정식 설계도도 아니고 추측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허락을 해줬으니 심사를 담당한 미군은 참 너그러운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진석은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진석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완공된 성모자애병원은 1955년 6월 축복식을 가졌다. 김영식 신부가 초대 병원장으로 부임했고, 내과ㆍ외과ㆍ소아과ㆍ방사선과 등 4개 과 41병상의 입원실과 수술실을 갖춘 어엿한 종합병원의 형태를 갖췄다.

 

- 1958년 3월 19일 진석의 외삼촌 이정규(비오) 신부 사제 서품식 날 대신학교 본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부터 정진석 신학생, 이홍규(진석의 둘째 외삼촌), 이정규 신부, 김영일 부제. 서울대교구 제공.

 

 

허허벌판에 종합병원이… 기적같아 

 

의사 2명, 간호사 2명, 직원 5명으로 병원은 시작됐다. 진석은 자신이 애를 써서 설계도를 그릴 당시 분명 성모님께서 도움을 주셨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 병원이 우뚝 세워진 것을 보면 마치 기적과 같았다.

 

연백성모원에서 진석이 열심히 봉사한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하며 진석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석은 그렇게 소중한 체험을 가슴에 품으며 1952년 8월 15일 연백성모원의 문을 두드린 때부터 1961년 3월 18일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방학 때마다 이곳에서 묵으며 일했다. 방학 내내 신부님의 일손을 돕고, 성모원 고아들과 김 신부님의 조카인 김영일(발타사르) 신학생과 함께 지냈다. 

 

연백성모원에서 룸메이트로 지낸 김 신학생은 진석보다 한 학년 선배였다. 그와 함께 쓴 방은 둘이 함께 누우면 누구 하나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이곳에서 내내 같이 생활했으니 둘은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한 살 터울의 나이에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 다툼이 있을 법도 했지만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서로를 위하고 존중해 줬기 때문이다. 성모원 방 한 칸에 마련된 성당에서 주일마다 함께 미사 준비를 하면서도 둘은 부딪치는 법이 없었다. 글쓰기 좋아하고 꼼꼼한 진석은 주보를 제작하고 성당 곳곳을 꾸몄고, 사람 좋아하고 활달한 김 신학생은 미사 성가 준비를 도맡는 식이었다.

 

방학 동안 필요한 물자를 가져다 놓고 시간이 나면 진석은 영문 서적의 한역 작업에 매달렸다. 대체로 가톨릭 성인들의 이야기나 철학을 다룬 종교 서적이었다. 김영식 신부님께서는 신학생인 진석이 책을 쓰는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석은 방학 때 마음 편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 방학 때 한역한 책이 한 권 나오면 번역비로 용돈이 조금씩 생겼는데, 그 덕분에 진석은 다른 데 손 벌리지 않아도 됐다. 가장 기쁜 것은 먹이고 입힐 식구가 많은 김영식 신부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석은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진리를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당시 가톨릭 신자는 국민의 1%도 안 됐다. 국내 어디를 가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였다. 진석은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만일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날이 커졌다. 이런 생각이 진석이 책을 집필하는 데 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매년 한 권씩 책을 출판하자’ 약속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살아온 동기들이 신학생 생활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 감격에 들떠 있던 어느 날 동창인 박도식 부제가 진석에게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이렇게 성직자가 됐으니, 이 빛나는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자. 그래서 우리가 사제품을 받으면 매년 한 권씩 가톨릭 진리를 알리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로 하면 어때?”

 

“좋은 생각이야! 열심히 계속 공부해서 신자들의 신앙에 필요한 책을 많이 쓰면 좋겠다.” 

 

두 사람은 매년 한 권씩 책을 낸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약속인 줄 알면서도 열정이 가득 찬 젊은 부제의 혈기로 주저 없이 합의했다. 박도식 부제는 신부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진석과 부제 때 한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진석도 그 약속을 늘 기억하며 살게 됐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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