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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땅과 바다가 맞닿은 거제도 천주교순례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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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3 ㅣ No.1575

땅과 바다가 맞닿은 거제도 ‘천주교순례길’을 가다


바다는 소리내 운다, 땅 끝까지 숨어야했던 절박함을 아는지…

 

 

순교자성월이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문턱이 마주한 요즈음, 땅의 끝자락과 바다가 마주하고 있는 거제도 ‘천주교순례길’을 찾았다. 산과 바다의 운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절경과 함께 선조들이 목숨으로 증거한 신앙의 역사를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길이다. ‘천주교순례길’은 거제시가 조성 중인 ‘섬&섬길’ 코스 중 하나로, 예구마을 선착장에서 서이말등대를 들렀다 순교복자 윤봉문요셉성지를 거쳐 지세포성과 거제조선해양문화관까지 가는 13.7㎞(5시간40분) 순례길이다.

 

 

순교복자 윤봉문요셉성지

 

보통은 예구마을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지에 먼저 들러 기도하며 순례길을 나서기로 했다. 경남 거제시 지세포3길 69-22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마산교구 순교복자 윤봉문요셉성지(담당 허철수 신부). 

 

성지에 들어서니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순교자 복자 윤봉문요셉성지’ 글귀가 순례객을 반긴다. 좀 더 올라가면 나오는 성모자상을 지나 십자가의 길로 향했다. 한여름 폭염은 이미 한풀 꺾인 날씨지만 한낮의 볕은 여전히 따갑기만 하다. 십자가의 길 입구에 들어서니 맹종죽(孟宗竹)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햇볕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대나무숲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14처를 다 돌고 나면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이른다.

 

서이말등대에서 본 전경. 내도(오른쪽 섬)와 외도(왼쪽 섬), 외도 너머로 해금강이 어렴풋이 보인다.



- 공곶이 해변 몽돌탑.

 

 

전망대 옆으로 복자 윤봉문의 묘소가 있다. 죄수들이 쓰던 칼을 형상화한 순교자탑 아래 마름모꼴로 된 관이 복자의 묘소다. 원래 가파른 산중 쪽박골(족박골)에 안장돼 있던 복자의 유해를 2013년 4월 이곳으로 옮겨 모시면서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 복자 윤봉문 묘소로 통하는 계단.

 

 

복자 윤봉문 요셉(1848~1888)은 거제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윤사우(스타니슬라오)의 둘째 아들로,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거제도로 건너왔다. 이후 열심한 포교활동을 벌이다 1888년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성지 담당 허철수 신부는 “이곳은 무엇보다 거제도라는 천혜의 풍광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성지”라며 “순례길을 통해 신자들이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며 기도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어 허 신부는 “순례객들을 위해 피정의 집과 대성당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예구마을~가매너른바위

 

한적한 어촌마을 예구(일운면 와현리). 이곳에서 공곶이로 가는 순례길이 시작된다. 20분 남짓 걸리는 완만한 숲길을 가로질러 가거나 35분 정도 걸리는 해안 쪽 길로 둘러갈 수도 있다. 작은 언덕과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기에, 어느 쪽으로 가든 간단한 트레킹을 할 각오는 필요하다. 

 

산길을 오르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힌다. 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을 금세 식혀준다. 바람에 실려 오는 파도소리는 덤이다. 산 속에서 듣는 파도소리라니 왠지 더 운치가 있다.

 

10분쯤 가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거제 8경 중 마지막 비경이라는 공곶이로 갈 수 있다. 동백나무 터널 아래로 지나는 ‘333층 돌계단’을 내려가면 닿을 수 있다. 이곳 터줏대감인 강명식(바오로) 할아버지가 직접 쌓은 돌계단이다. 333층인 것은 예수님께서 33년간 지상에 사시면서 3년 동안 공생활 하신 것을 기억하는 의미다.

 

공곶이엔 바오로 할아버지 부부가 손수 가꾼 농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동백나무와 종려나무, 수선화 등 각종 꽃과 나무들이 싱그러운 생명력을 뿜어내는 곳이다. 아쉽지만 계절이 맞지 않아 동백꽃도 수선화도 볼 수는 없었다.

 

- 동백터널 아래 333층으로 만들어진 돌계단.

 

 

농원을 가로질러 해변으로 내려가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안쉼터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자그락 자그락’ 몽돌소리가 들려온다. 파도에 휩쓸려 오가며 다듬어져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글둥글한 모양이다. ‘저 작은 몽돌 하나도 스스로를 다듬을 줄 아는구나’ 싶어 새삼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순례길에 얻은 또 하나의 선물인 듯하다.

 

공곶이를 지나 3㎞ 정도를 더 가면 가매너른(가마 넓은)바위에 다다를 수 있다.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아래는 가마처럼 생겼고 위는 넓다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초기 거제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의미 있는 장소다. 현재 돌고래의 이동과 생태를 관측할 수 있는 돌고래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서이말등대

 

섬의 동쪽 끝자락 언덕 위에 서 있는 서이말등대. 이곳에 서면 내도와 외도, 그리고 외도 너머로 해금강을 볼 수 있다. 화창한 날엔 저 멀리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윤봉문의 아버지 윤사우와 그의 형 경문이 움막을 짓고 함께 살던 외딴 곳이다. 

 

원래 이들 일행은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풍랑이 심해 일본행을 포기하고 정착하게 됐다. 비록 지금은 그 움막 터만 겨우 남아있지만, 현재 순례길이 알려지고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이곳을 정비해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갈 계획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낮에는 숨어있다 밤에 해초를 캐며 생활하는 척박한 삶을 살았던 이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거제의 멋진 풍광에 감탄하는 동시에 모진 박해를 피해 땅 끝까지 숨어들어야만 했던 신앙선조들의 절박했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순례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바다 위로 붉게 번지는 저녁노을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11일, 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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