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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예수 성심과 레지오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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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1 ㅣ No.467

[레지오 영성] 예수 성심과 레지오 정신

 

 

6월은 예수성심께서 주신 무한한 선물과, 레지오 역사와, 레지오 영성에서 예수 성심께서 차지하시는 자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시기입니다. 예수성심께 드리는 기도가 뗏세라의 짧은 호칭기도에서 첫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매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레지오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람된 일들 중의 하나인 가정에서 예수 성심을 모시는 아름다운 사도직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사도직이 세계적으로 특히 서방 선진국에서 훨씬 더 시급하게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서간 ‘사랑의 기쁨’에서 서방 선진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결혼과 가정생활의 문제점들에 대해 매섭게 비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성심께 대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봉헌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단주회(斷酒會)의 사업을 레지오가 널리 알린 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영혼을 말살시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독성이 강한 약물이나 외설물 그리고 무분별하게 퍼져있는 오락물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으로 자신들을 예수 성심께 봉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활동이 긴급히 필요합니다. 이는 레지오가 도전해볼 만한 보람된 일입니다. 레지오가 예수 성심께 대한 봉헌을 확산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성심과 삶 속에서 모범을 보이셨듯이, 특히 젊은이들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사랑의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예수 성심의 자리는 마음가짐과 행동의 원천이어야

 

저는 레지오의 설립자이신 프랭크 더프와 그의 예수 성심께 대한 뿌리 깊은 봉헌의 삶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침실에 커다란 예수 성심을 그린 그림을 걸어 두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눈이 그 그림을 향하도록 하였고, 잠들기 전에도 그가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이 예수 성심의 그림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 그림은 60년 이상이나 그의 침실에 있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1914년에 예수 성심 단주회에 가입하여 1980년 서거할 때까지 66년간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성심께 대한 특별한 봉헌활동이었으며, 더프 형제는 모든 회원들에게 권유되었던 대로 하루에 두 번씩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습니다. “오, 예수 성심이시여, 더욱 큰 영광과 위안을 받으소서. 저는 당신을 위해 좋은 표양을 보이고 극기하오며, 술을 절제하지 못한 죄와 무절제하게 음주하는 이들의 회심을 위해 보속하오며, 평생 동안 술을 끊기로 약속하나이다.”(교본 385쪽) 프랭크 더프는 여러 사례를 통해 과도한 음주의 폐해를 알았기 때문에 회원 등록부에 이름만 올리는 허울뿐인 회원이 아니었으며 예수 성심께 충심으로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성심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영혼이 형성되었으며 날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은연중 예수 성심과 관계를 맺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이번 훈화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레지오 영성에서 예수 성심께서 차지하신 자리가 결과의 유무와 상관없이 특별한 활동거리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성심께서 차지하실 자리는 훨씬 더 근본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가짐과 행동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신비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레지오 영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일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저서 ‘반대를 받는 표징’에서 “창세기를 통해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창조주 앞이 아니라 예수 성심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하고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창조를 통해서 이익을 얻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창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창조물의 깊숙한 곳에 하느님의 커다란 심장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특히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심장 속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심은 변함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대한 유일한 정의 즉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서 위대하신 하느님의 성심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 앞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다

 

이런 참된 믿음들은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 세계에 직접 내려오신 강생(降生)의 신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셨으며 우리의 인성을 공유하셨고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일체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은 훨씬 더 명확해 집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죄 중에 있었지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영적으로 그리고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병든 자들,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자들, 그리고 매우 사악한 자들을 향하여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러 오셨다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심은 복음에 대한 최고의 증거들이며, 성체와 성사를 지속적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의 실재적 현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요 심장인 그런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깃들었으면 합니다.

 

따라서 예수 성심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 하느님 정체성에 대한 신비, 그리고 그분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생명의 신비와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의 모습이요, 인간의 언어입니다. 예수 성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무엇보다 앞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이러한 사실을 자신들의 내면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고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사도직 활동에 필요한 정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동료 레지오 단원들에게 예수 성심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드리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여,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성서 구절이 있어 인용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로마 8: 35, 37~39)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글 비드 맥그리거 O.P.(꼰칠리움 영적지도신부), 역 김경남 알베르토(광주 Se. 국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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