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신과학 운동과 집회서 43장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9 ㅣ No.288

[과학과 신앙] 신과학 운동과 집회서 43장

 

 

“내가 기억하기에 보어와의 오랜 논쟁은 거의 결론 없이 끝나는 듯했다. 논쟁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홀로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그 질문을 되풀이해서 새겨보았다. 원자 상태처럼 그렇게 ‘자연’이 불합리할 수가 있을까 하고….” 「과학과 철학」이란 책에 나오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32년) 하이젠베르크의 말입니다.

 

‘불확정성 원리’라는 세기적인 물리학 법칙을 발견한 하이젠베르크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입자들의 세계와는 너무 다른 원자와 아원자(亞原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질서와 운동에 대해 깨닫고는 매우 당혹해하며 한 고백입니다.

 

미시 세계, 더 정확히 말해 아원자 세계는, 과학적 사고보다 철학적 사고로 들여다봐야 이해하기가 더 쉬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동양철학적 사고로 들여다봐야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즈음 조금 주춤해지긴 했지만 1980년대 태동한 이른바 신과학 운동은, 앞서 말한 아원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동양적 사상을 대비하여, 서구사회에서 볼 수 있는 풍요한 물질 이면의 정신적 빈곤을 동양적 사유로 극복하자는 운동입니다. 30여 년 전에 등장한 이념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념입니다.

 

 

뉴턴의 세계관과 양자론적 이론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에 따르면, 새로운 과학은 축적된 지식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모형으로 성립된다고 합니다. 과학사에서는 이 모형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과학의 역사는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이 지배한 것으로 서술합니다. 그러나 이 모형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체계와 갈릴레오의 실험과학이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무너졌지요.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은 17세기 말 뉴턴이란 세기적 천재가 완성하였습니다. 뉴턴은 우리가 사는 이 우주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성과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본 세계는 더는 주관적으로 보일 수 없었고, 뉴턴에 의해 객관적인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밀물 썰물의 조화도, 지상에 떨어지는 사과의 움직임도, 행성의 운동도 모두 뉴턴의 운동법칙에 정확히 들어맞았지요.

 

뉴턴의 새로운 과학 모형은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철학에 힘입어 19세기 말까지 약 400여 년간(아니 오늘까지도) 서양사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주는 거대한 기계로서 그 질서는 그의 운동법칙에 따라 정확히 예견될 수 있다.”는, 그의 객관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문화와 정치, 심지어 예술의 영역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뉴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철저한 관찰자로서 그 외경스럽던 자연에 대립하여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세기 초 약 30년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플랑크에서 시작하여 하이젠베르크, 드브로이, 보어 등이 완성한 양자론은 뉴턴의 모형을 부수고 새 패러다임으로 우뚝 솟았습니다. 원자와 그보다 더 작은 아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은 과학뿐만 아니라 사상체계에 큰 혼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물질은 더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의 변환 형태에 불과하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질량×속도)을 동시에 알 수 없는(불확정성 원리)이 ‘불합리한 자연’은 물론이고, 아원자는 실재(實在)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으로 하나의 통계적 확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자들의 사고를 뿌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서와 같은 공간 개념은 더는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4차원적으로 서로 관련이 되고, 우주는 휘어진 공간이라는 양자론과 상대성원리의 현대 물리학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했습니다.

 

세계는 더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저 너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관찰되는 것으로 인간이 역동적으로 이 새로운 세계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더는 인간과 나눌 수 없는 유기적인 체계(system)이며, 자연의 법칙은 뉴턴의 패러다임에서처럼 인과율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확률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모든 존재가 확실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은 실재를 완전하고 확정적으로 기술할 수는 결코 없고, 그들은 언제나 사물의 본질에 대한 근사치일 뿐이었습니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하이젠 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 물리학은 그 자체가 지닌 언어의 불확실성 때문에 본질에서 철학적 정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양면성(입자성과 파동성)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일 때만 그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성이론이 말하는 시공의 존재, 양자론이 말하는 불확정성 원리 또는 상보성과 같은 개념들이 철학, 그 가운데서도 동양사상과 긴밀히 유추될 수 있음은 최근에 더욱 자주 인식되었습니다.

 

세계를 모든 현상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에 따라 파악하는 것을 시스템적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조직체, 사회와 생태계는 모두 시스템입니다.

 

고대 중국의 사상, 특히 음양 이론은 곧 시스템적 세계관을 나타냅니다. 실재는 연속적으로 유동하고 변화하여 ‘도(道)’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변화의 주기는 양극, 곧 ‘음’과 ‘양’을 통해 역동적으로 진행됩니다. ‘음’뿐이거나 ‘양’뿐인 것은 없습니다.

 

중국 후한시대의 사상가였던 왕충은 극단적인 두 힘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양과 음의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해 물러나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고 했습니다. 모든 자연현상은 양극 사이의 연속적 진동의 표현이며, 모든 변화는 ‘음’과 ‘양’ 사이의 역동적 평형으로 진행됩니다.

 

시공과 인과율은 절대자의 품속에서 합일됩니다. 이러한 동양적 세계관(전일적 세계관)은 신통하게도 현대 물리학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종종 동양적 명상과 선(禪)이라는 방법을 통해 체득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대기가 엮어지고 / 바람과 목숨 있는 모든 생령(生靈)이 엮어진 것을 / 하나의 영혼인 그이만이 알고 있네”(문다카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브라만(凡)은 우주적 그물을 통일시켜 주는 그물 실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S-행렬 이론’이라는 것은 무척 난해하지만 그 이론이 뜻하는 것은, 우주는 상호 연관된 사건의 역동적 그물이라는 것입니다.

 

“한 소립자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석이 불가능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상 밖으로 다른 것들에 미치는 일련의 관계이다.” 이 말은 어떤 현대 물리학 책이 아니라, 중국의 「역경(易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새로운 패러다임

 

금세기 초 30여 년간 현대 물리학은 놀라운 과학적 발견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와 사상, 문화 모든 영역에까지 그 세계관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의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은 아직도 뉴턴의 세계관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와 로봇, 우주 개발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뉴턴의 운동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21세기 오늘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현대 물리학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까요?

 

과학과 기술은 첨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명은 기계화하여 유전자 조작으로 생명의 합성까지 가능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금성과 토성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경제학자는 인플레이션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경찰은 증가하는 범죄에 속수무책일까요?

 

인간은 화학비료를 개발해 녹색혁명은 가능했지만 토양의 산성화는 왜 막을 수 없을까요? 우주는 개발하면서도 그가 사는 도시의 문제는 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할까요?

 

첨단을 달리는 전자 병기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저 건너,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또다른 지구촌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뉴턴의 세계관으로 자연을 객관화하고 첨단산업만 고집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핵의 위기와 대기오염, 생태계 파괴 등으로 병들어가는 ‘하나뿐인’ 지구를 구하려면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 동양적 명상과 전일적인 세계관으로 도약해야 하는 커다란 전환점에 서있다.” 이것이 바로 ‘신과학 운동’이 주창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30여 년 전 제시된 새로운 모형(패러다임)으로 다시 돌아가, 사상과 인식, 또한 가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과학 운동의 전망

 

1980년대 F. 카프라의 두 권의 저서 「물리학의 도」와 「전환점」, 그리고 G. 주커브의 「춤추는 물리」를 중심으로 시선을 끌게 된 이 운동의 근원은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핵 운동, 여권 운동, 환경보존 운동과 궤를 같이 하나, 더 근본적인 가치전환의 움직임인 셈입니다.

 

양자론의 세계관은 불확정성 원리니 확률(존재하려는 경향)이니 유기체적이니 하는 용어들에서 동양의 전일적인 세계관(역동적인 우주, 절대적 명상 속에서 합일하는 시간과 공간, 자아가 자연에 합치될 때 이룰 수 있는 ‘도’ 등)으로 가치관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 운동은 주장합니다.

 

198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 등지에서 이 주장에 호응하여 신과학 운동에 관한 저서나 워크숍, 세미나 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이 운동과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하여 이 운동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는 계층이 자연과학자뿐만 아니라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까지 학제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현대 과학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움직임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여 물리, 화학, 생물, 철학, 정치학 분야의 학자가 모여 이에 대한 토의를 가진 바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여 21세기를 풍미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문명의 위기에서 자연에 참여하여 인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이 운동의 주장은 오늘날 병든 지구의 문제, 곧 암, 범죄, 오염, 핵전쟁, 인플레이션, 자원의 고갈, 정신분열증, 기아, 아직도 피지배적인 여권 등을 해결할 하나의 방법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집회서 43장을 묵상하며

 

성경을 통독하다가 집회서(42,15-43,33)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태양과 달, 별과 무지개, 그밖의 모든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묵상하였습니다.

 

묵상 가운데 문득 과학기술자로서 첫 발을 막 내디딜 때 저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신과학 운동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리고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경건한 사람이 되어 주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슬기롭게 다룰 수 있는 지혜”(집회 43,33 참조)를 주십사고 기도드렸습니다.

 

기도 중에, 저와 같은 과학기술자들은, ‘아름답고 찬란한 그분의 업적’인 이 만물을 ‘살아있고 영원히 지속’시켜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과학기술자로서, ‘주님의 뜻에 따라 생겨났고 존재하는’(묵시 4,11 참조) 그 만물 앞에 겸허한 자세로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6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3,3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