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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뿌리: 최재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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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72

[영성의 뿌리] 최재선 주교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아프리카보다 못 살던 한국. 그 가난한 나라에 주님의 뜻을 따라 찾아온 선교사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누구보다 먼저 실천한 이가 있었다. 바로 최재선 주교다.

최 주교는 1975년 한국외방선교회를, 1984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를 설립했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잠재력을 파악해 한국인 선교사를 해외로 파견하고자 이룬 첫 걸음이었다.

외방 선교에 대한 논의는 한국 외방선교회 창립 이전부터 있었지만 제반 여건상 시기상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 한국 외방선교회를 창립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성소 빈곤을 호소하는 보편교회의 요청에 능동적으로 부응하게 됐고,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는 분기점을 마련했다.

이후 1984년 103위 성인 시성식을 위해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아시아 지역 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중대한 사명을 이야기하고, 아시아 복음화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최 주교는 1912년 2월 24일 경북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26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해 1938년 사제품을 받고 전라북도에 자리한 수류본당 9대 주임으로 임명돼 첫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1942년 5월 경상북도 자천본당 초대 주임으로 전임됐으나 8월에 그곳 경찰 주재소 일본인 소장과 종교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 경찰서에 투옥됐다가 이듬해 1월 병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7년 1월 부산대목구가 대구대목구로부터 분할·설립되자 최재선 신부는 초대 부산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5월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최 주교는 성체대회와 같은 신심 활동, ‘산성 농장’과 같은 개척 사업, ‘부산교구 자선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제 활동, 빈민들을 위한 주택 사업, 성소 계발과 신학생 양성 사업 등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부산 가톨릭신자협의회, 레지오 마리애, 가톨릭 노동청년회 등을 통해 평신도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도 노력했다.

1973년 9월 부산교구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교황청 직속 성직자 포교 연맹 한국지부 회장으로 임명된 최재선 주교는 이후 전 삶을 해외선교에 온전히 투신했다.

최 주교는 한국외방선교회를 설립한 후 선종할 때까지 해외선교에 중점을 두고 사목 활동을 했다. 2001년에는 자비 1억 원으로 중국 요녕성교구의 본계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해외선교에 헌신하고 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위해 기도하던 최 주교는 2008년 6월 3일 부산 성모병원에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월 1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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