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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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18 ㅣ No.132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6)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1) ‘말씀’을 유배(流配) 보낸 교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 -17)

지금까지 교회의 많은 위기들을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염려되는 것은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독일 주교님들이 한국 교회 소공동체를 견학하러 왔었다. 한국의 여러 교구에서 하고 있는 소공동체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 주교님들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들이 왜 눈물을 흘렸을까? 지금 유럽 교회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신자들은 평일 저녁에 자기들이 사는 동네나 가정에 모이지도 않을 뿐더러, 모여서 성경을 읽는 모습조차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 교회를 일컬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해버린 교회라고 한다. 만일 우리 한국 교회도 사목과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지금의 유럽 교회처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 참담한 교회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유럽 교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이미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한국 교회도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유럽 교회를 닮아가고 있고, 다른 차이점을 볼 수 없는 것 같다.

말기암(癌)은 실상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살 희망이 없고 수술도 소용이 없다. 소공동체를 하는 것은 소멸 직전에 있는 교회를 소생시키자고 하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교회에 생기와 신바람을 불어넣고 의무적으로 다니는 교회를 ‘다니고 싶은 교회’로 만드는 것이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활기와 기쁨을 찾기 위함이다. 병들어가는 교회를 살려서 더욱 건강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교회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성사성과 정체성을 잃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또한 우리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거나 어둡다면 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는 다름 아닌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과 너무나 오랫동안 멀리 하고 있었던 나머지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또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복음 나누기를 해보면 신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정말로 답답하고 한심한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절망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 나누기가 부담스럽고 어려운 나머지 소공동체가 재미없게 느껴진다. 과거에는 묵주신공 같은 방식으로 기도문을 그냥 외우기만 하고 듣기만 하면 되었지, 내 스스로 복음을 읽고 들은 것을 스스로 묵상하고 스스로 복음 나누기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제들의 강론이나 훈화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 ‘먹여주는 교회’에 길들여진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자연적으로 피동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신심행위’로 일관하던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이 ‘복음 위주’로 많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묵주신공 일변도이던 것이 요즈음은 ‘복음 나누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거룩한 독서’, ‘성경 공부반’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마도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소공동체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느 수녀원에 특강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수녀원의 큰 성당에 들어가보니 수녀님들의 개인 자리에서 있어야 할 성경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수녀님들의 앞자리가 다 그랬었다. 깜짝 놀랐다. 그 수녀원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십여 년 전 군종 신부 시절에 강의나 강론 준비 중에 성경 구절을 찾아야 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옆에 계시는 목사님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목사님은 일 초 만에 금방 그 성경 구절을 찾아 주신다.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런 망신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 자신 혼자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제의 입에서 무슨 감동적인 강론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성직자나 수도자가 이렇다면 평신도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성경지식은 개신교 신자들과 비교해서 무식에 가깝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말씀’을 찾고 멀어진 ‘복음’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다. 소공동체 사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함께, ‘말씀 중심의 사목’을 하는 것이다. ‘말씀 중심의 사목’을 하려면 강론 때에도 성경으로 강론하고 신자들도 성경을 항상 전례 때에 지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잘 안 된다. 성경이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기가 매우 힘들고 불편하단다. 한 달 후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편리한 매일미사 책이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항상 성경을 지참하고 다니는 것에 비하여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천주교 신자들은 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교회가 복음과 멀어져 있다. 신자들은 말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서 말씀을 빼앗아 유배(流配)보낸 큰 실수를 했다. 그것도 1300년대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무려 700여 년 동안이나! 교회가 성경을 빼앗고 묵주나 성인전이나 준주성범 같은 신심서적을 신자들에게 주었다는 심한 말도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는 레지오 마리애 중심의 사목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 성장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레지오 마리애도 좋다. 그러나 레지오 마리애 중심의 사목에 대한 심각하고도 진지한 반성과 용기있는 성찰이 필요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복음화’를 부르짖는 지금이야말로 과연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있고 ‘복음화’, 그리고 ‘새로운 열의’, ‘새로운 표현’, ‘새로운 방법’을 부르짖는 ‘새로운 복음화’에 걸맞는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때라고 생각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6-9)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13)

[월간빛, 2013년 3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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