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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25: 여사울은 예수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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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4 ㅣ No.1313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5) 여사울은 예수골이었다


19세기 초반 천주교 신자들은 ‘야소(耶蘇)’를 ‘녀슈’로 읽었다

 

 

19세기 초반까지의 기록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의 한자 표기인 야소(耶蘇)를 ‘녀슈’ 또는 ‘여슈’로 발음했다. 사진은 천진암메아리 사이트에 수록된 김학렬 신부의 논문 중 「성경직해」에 보이는 ‘여수’ 표기.

 

 

‘야소(耶蘇)’라 쓰고 ‘녀슈’ ‘여슈’로 읽다

 

여사울의 이름에 대해 한 차례 더 써야겠다. 지난 10회 연재 글에서 한자 지명 호동리(狐洞里)에서 보듯 여사울은 여우골이란 의미이며, 당시에는 ‘여수골’ 또는 ‘여수울’로 불렸을 것이란 설명을 했었다.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이 더 남았다. 「송담유록」의 발견으로 여사울이 여우골이라는 의미를 넘어 ‘예수골’로 불렸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수골은 예수쟁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홍유한의 편지 등에는 여사울의 한자 표기가 ‘여호(餘湖)’와 ‘여사동(餘事洞)’, ‘여촌(餘村)’ 등으로 나온다. 하지만 「송담유록」은 ‘여소동(余蘇洞)’과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했다. ‘야소(邪蘇)’ 또는 ‘야소(耶蘇)’는 예수의 한자식 표기이다. 당시의 발음으로는 ‘녀슈’ 또는 ‘여슈’로 읽었다. 「송담유록」은 앞에서는 여소동(余蘇洞)이라 적고 나서 뒤에는 두 차례나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했다. 둘 다 음은 똑같이 ‘여슈동’이다.

 

19세기 초반까지의 기록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한자 야소(耶蘇)를 ‘야소’로 읽지 않고, ‘여슈’로 발음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여슈’님으로 불렀다. ‘여슈’가 ‘예수’로 정착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그 가장 명확한 증거는 「사학징의」 뒤쪽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서 찾을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5월 22일에 9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이때 관련자의 집에서 압수한 각종 천주교 서적과 성화 및 성물을 처형장 바로 곁에서 소각 처리했다. 「요화사서소화기」는 소각하기 전 압수품의 목록을 사람별로 정리해 목록화한 것이다. 한문 서적의 경우는 한자로 적었고, 한글로 언해한 책은 한글로 표기했다. 이 책 중 제목에 예수의 이름이 들어간 책자가 여럿 있었다. 그 표기는 다음과 같다.

 

「녀슈셩란쳠례(耶蘇聖誕瞻禮)」, 「녀슈셩호(耶蘇聖號)」, 「녀슈슌안도문(耶蘇受難禱文)」, 「공경여수셩심(恭敬耶蘇聖心)」, 「녀슈도문(耶蘇禱文)」, 「녀슈수란도문(耶蘇受難禱文)」. 괄호 안의 한자는 한글 표기를 한자로 유추해 적었다. 모든 책에 예외 없이 예수의 한자 표기 ‘야소(耶蘇)’를 ‘녀슈’로 읽었고 한 차례 ‘여수’로 읽은 예가 보인다. 이 밖에도 초기 교회 필사본에서 예수를 ‘녀슈’ 또는 ‘여슈’로 표기한 문헌은 남은 실물이 적지 않다.(김학렬,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여수님이었다」, 천진암 메아리에 수록된 논문 참조)

 

이렇게 볼 때, 강세정이 「송담유록」에서 여사울을 야소동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여수동’이었고, 그 속뜻이 예수골임을 밝히려는데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는 강세정의 악의적 왜곡이 아닌, 당시 은연 중 통용된 표기였을 것으로 본다.

 

- 「사학징의」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에도 ‘예수’를 뜻하는 ‘여슈’ 표기가 나온다.

 

 

여사울의 예수 공동체

 

앞에서 이존창이 1787년 여사울에서 상민과 남녀노소에게 천주학을 전하여 익히게 하다가 예산 현감 신사원에게 검거되어 천안 감옥에 갇힌 일을 말했었다. 「송담유록」의 제8단락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홍낙민은 또 이기양과 혼인으로 맺어서 몰래 서로 얽혀 호우(湖右) 지역에서 서교(西敎)를 행하였다. 천안 야소동(邪蘇洞)의 이존창은 성품이 자못 교활하고 영리한 데다 문자를 제법 알아 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때문에 이기양과 홍낙민의 무리가 복심(腹心)으로 삼아 그 가르침을 널리 폈다. 또 오석충(吳錫忠)으로 하여금 사서(邪書)를 번역해서 언문 책으로 만들게 해 이존창에게 많이 보내주어, 그로 하여금 어리석은 천인들을 가르쳐 꾀게 하였다.”

 

이기양과 홍낙민이 호우(湖右) 지역, 즉 충청남도 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고, 이존창이 그의 심복으로 실제적인 가르침을 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의 인물이 새로 등장한다. 이기양과 홍낙민이 오석충에게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시켜 책자로 만들게 해서 이존창에게 보내주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기양은 문의현감으로 현직에 있었고, 홍낙민은 충주로 이주한 상태였다. 오석충은 정약용이 「오석충묘지명」을 따로 남겼고, 그의 첫째 딸이 순교 복자 이경도 가롤로와 결혼하고, 둘째 딸은 권철신의 아들 권상문과 혼인했다. 1801년 천주교 신자로 윤장, 권상문과 함께 임자도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정약용은 묘지명에서 멀쩡하게 둘인 그의 딸을 외동딸로 만들면서까지 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고 극구 변명해 주었으나, 여러 기록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오석충은 틀림없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간 교회 서적의 한글 번역에 최창현 등의 이름이 나온 적은 있어도, 오석충이 번역자로 나온 기록은 「송담유록」이 처음이다.

 

이어지는 다음 단락은 여사울 공동체의 신앙 상황을 보여준다. “야소동은 온 동네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빠져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밖에 인근의 6, 7개 고을에서 야소동의 백성과 혼인을 맺은 상민들이 돌아가며 서로 전하여 익히니 몇백 명이 사학을 외워 본받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무리는 모두 이문의(李文義:이기양이 앞서 문의 현감을 지냈다)와 홍정언(洪正言:홍낙민을 말한다)을 알았다. 대개 두 사람이 그 교리를 행하는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존창이 상민이었기 때문에 비록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게 가르침을 행하였지만, 충청도의 사족(士族) 중에는 한 사람도 물든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충청도 교회가 서울이나 양근, 충주 등지와 달리 양반 신자 없이 일반 백성 중심의 교회로 자리 잡은 이유를 지도자가 속량 노비 출신의 이존창이었던 데서 찾은 것이 흥미롭다.

 

 

여사울 공동체에 대한 다른 증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은 1791년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다. 이 시점에 그의 관할 지역에서 진산사건이 터졌다. 「수기(隨記)」는 이 시기를 전후해서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공식적 보고 기록이다. 이 기록 속에 여사울과 이존창에 관한 이야기가 무더기로 나온다. 먼저 1792년 1월 3일자 보고다.

 

“이존창은 본래 신창(新昌) 사는 성덕산(成德山) 집안의 사천(私賤)입니다. 어려서부터 홍낙민 형제와 더불어 공부하여, 자못 과거 공부를 익혔고, 가장 먼저 사술(邪術)에 물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쏟아 학습하고, 힘을 다해 꼬드겨서 미혹시켜, 친한 사람이면 요사스럽고 허탄한 주장으로 꾀어, 따라 배울 것을 권하였습니다. 따라 배우는 무리가 쉽게 풀이한 글을 가져다가 진서와 언문으로 베껴 전해, 점점 더 전파되니 따르는 자가 날마다 이르렀습니다. 대개 이존창은 홍씨 집안 제자 중에 문자를 알아 정통한 자로, 호서 사학에서 방서(方書)를 얻어 널리 퍼뜨린 자입니다.”

 

성덕산은 덕산 현감을 지낸 성덕형(成德馨, 1682~?)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존창이 애초에 성덕형 집안의 종이었다면 앞서 강세정이 홍낙민이 속량시켜준 종의 아들이라고 한 말과는 상치된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썼다. “종으로 사학을 본받아 배우는 자는 그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대가 없이 양민으로 놓아주었고, 이웃으로 사학을 따르는 자는 그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옷과 양식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문득 기뻐하였습니다.”

 

신분에서 자유롭고, 차별을 떠난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노비가 믿겠다고만 하면 노비 문서를 불태워 양민이 되게 하고, 그 모습을 본 이웃들은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의식주를 도와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이전에 상상해본 적도 없는 실험이 이들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같은 일은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원근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지는 기록은 또 이렇다. “대저 사술을 하는 자들은 서로를 교중(交中)이라 부르면서 종과 주인이 존비의 구분이 없고, 멀고 가까움에 친하고 소원한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반가(班家)의 아낙들도 언문으로 풀이하여 이를 읽고, 상천(常賤)의 어리석은 아낙들은 입으로 가르침을 받아 이를 외워, 노소도 없고 장유(長幼)도 없이, 한번 이 사술에 빠지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시험 삼아 반가의 아녀자로 말한다면, 가령 길가는 사람이 사학을 한다고 제 입으로 말할 경우 성명이나 거주도 묻지 않고, 양반인지 상놈인지도 따지지 않고, 모두 들어와 내실에서 만나보기를 허락하고 큰 손님처럼 공경하며, 가까운 친족같이 아낍니다. 거처와 음식도 달고 쓴 것을 똑같이 합니다. 떠날 때는 또 노자까지 줍니다.”

 

사학하는 이들에게 투전이나 윷놀이를 하자고 시험해보고, 농담이나 욕설로 도발해도, 아예 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보인다. 이들은 도덕적으로도 대단히 엄격한 규율 속에 행동하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8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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