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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30: 란프랑쿠스와 성 안셀모의 캔터베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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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30 ㅣ No.729

[성당 이야기] (30) 란프랑쿠스와 성 안셀모의 캔터베리 대성당

 

 

지난 회에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영국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의 신망이 두터운 신학자 란프랑쿠스는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장에서 영국의 캔터베리로 임지를 옮겨 주교좌성당(Cathedral 카테드랄)의 대주교로 부임합니다. 캔터베리 대성당은 베네딕도회가 관리하였는데, 그 첫 번째 주교는 영국의 사도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605년)입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596년 로마의 성 안드레아 베네딕도회 수도원 아빠스였던 그를 앵글로-색슨족의 선교사로 파견하였고, 이듬해인 597년 아우구스티노는 캔터베리 대성당을 봉헌하였습니다. 도시 성곽 밖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수도원을 지었는데, 수 세기 동안 캔터베리의 대주교들이 그곳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캔터베리 대성당을 비롯한 영국의 성당들은 자연스럽게 앵글로-색슨족의 건축 양식을 띠었습니다. 그러다가 윌리엄의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선진 건축술인 노르망디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전파된 것입니다.

 

앵글로-색슨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은 윌리엄의 영국 정복 1년 후인 1067년에 화재로 전소됩니다. 이후 노르만 왕조의 첫 번째 주교로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란프랑쿠스(1070~1077년 재위)는 부임하자마자 파괴된 대성당의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폐허가 된 대성당의 잔해들을 치우고, 그가 있었던 캉의 생테티엔 성당의 설계를 기초로 그 지역의 석재를 수입하여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대성당을 새로 건축했습니다. 란프랑쿠스의 대성당은 네이브가 3랑식 8베이로 나르텍스(전실)와 트란셉트를 갖추고 있습니다. 트란셉트는 종방향으로 1베이, 횡방향으로 5베이로 구성되었으며, 트란셉트의 5베이가 성가대석 방향으로 확장되면서 제형(말발굽형)의 슈베를 이루었습니다. 슈베의 중앙에 성가대석이 놓였고, 양쪽 팔에는 소성당이 두 개씩 들어섰습니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슈베에는 영국 로마네스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가대석이 동쪽으로 길게 확장된 것입니다. 란프랑쿠스의 대성당은 슈베가 약 4베이 정도 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이것은 8베이인 네이브의 절반에 해당하는 길이이고, 란프랑쿠스의 후임자 성 안셀모의 증축 때는 네이브와 비슷한 길이의 슈베를 볼 수 있습니다. 슈베가 길어진 것은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쪽으로의 네이브의 확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의 캔터베리 대성당은 네이브 길이가 54미터, 성가대석 길이가 55미터, 성당 전체 길이는 160미터에 이릅니다.

 

네이브월은 아케이드층, 갤러리층, 클리어스토리의 3단 표준형으로 되어있으며, 클리어스토리에 벽체 통로를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천장은 폭이 좁은 부분에는 석조 그로인 볼트가 시공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네이브와 같이 폭이 넓은 부분은 란프랑쿠스가 캉의 생테티엔에서 석조 볼트를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목조로 볼트 천장을 올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2020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의정부주보 7면, 강한수 가롤로 신부(민락동 성당 주임, 건축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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