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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 첫 수녀의 탄생: 샬트르 성 바오로회의 김해겸 수녀와 박황월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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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7 ㅣ No.1153

한국교회 첫 수녀의 탄생 : 샬트르 성 바오로회의 김해겸 수녀와 박황월 수녀

 

 

한국인들이 처음 본 수녀

 

한국교회사에 등장한 첫 수도회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다. 1888년 그들이 한국에 진출할 무렵, 교회가 막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복을 입고 입국하여 숨어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수단 차림으로 길에 나섰고, 주교관과 대성당, 신학교, 보육원 등 교회 건물이 한창 세워지고 있었다. 1882년, 조선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된 블랑 신부는 이듬해 주교 성성식을 치르러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 거기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을 본 블랑 주교는 1885년 사이공 관구장에게 수녀 파견을 청했다. 이때 파견된 수녀들은 안남 근처에서 배가 파손되어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3년 후 주교는 다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총원에 서울의 고아원과 양로원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총원에서는 자카리아 수녀를 원장으로 하여 총원의 에스겔 수녀와 사이공 관구의 중국인 수련 수녀 두 명을 한국에 파견키로 했다. 1888년 7월 20일 수녀들은 인천에 도착해서 마중나간 교우들과 프와넬 신부를 만났다. 이들은 이튿날 서울로 향했다. 신부가 말 타고 앞장서고 수녀들은 가마를 타고, 그 뒤로 회장과 교우들 100여 명이 줄지었다. 짐 실은 말이 뒤따랐는데 모원에서 가난한 나라에 간다고 일일이 챙겨준 물건이 실려 있었다. 서울에 들어서자 교우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옷에 하얀 코르넷을 쓰고 기다란 묵주를 허리에 느린 수녀들의 모습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특히 장차 수녀가 되려는 이들은 더욱 그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수녀들의 실제 생활은 높은 코르넷만큼 고고할 수가 없었다. 수녀들의 첫 집은 정동, 러시아 공관에서 멀지 않은 기와집이었다. 프와넬 신부댁과 활판인쇄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방은 수녀들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좁고 낮았으며, 바닥에 누워 자고, 그곳에서 음식을 먹고 일해야 했다.

 

 

다섯 명의 지원자

 

수녀들이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지원자 다섯 명이 들어왔다. 김해겸, 김순이, 김복우지, 박황월, 심 바르바라는 모두 순교자의 자손들이었다. 이들은 주교의 연락을 받고 모친과 함께 수녀댁에 왔다. 지원자들은 먼저 주교에게 절했다. 그리고 수녀들을 마주하고, 그 뒤로 어머니들이 섰다. 원장 수녀가 성명, 나이를 물으면 주교가 통역했다. 이들 중 김해겸 쌩폴과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두 명만 수녀가 되었다. 한 명은 입회한 지 반 년, 한 명은 일 년, 한 명은 수련 수녀로 소천했다. 물론, 지속된 지원자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지원자들이 입원한지 2년 후 수련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때는 정말 가난했다. 노비시아라 부르는 수련원은 사방 두칸짜리 방, 선생용 걸상, 원장 수녀가 앉아서 다리미질하던 책상 대용 상, 그 위에 놓인 책 한 권과 십자고상이 전부였다. 한 번은 방구들이 꺼져서 행랑방으로 이사하여 며칠을 지냈다. 헌 잡지로 도배되고, 장판도 깔지 못한 곳에서 선생 수녀는, “서양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말구유, 가난, 궁고를 알고 믿었고, 묵상했지만 오늘처럼 감동치 못했다. 이 방은 실로 예수 아기의 말구유와 비슷하고, 너희들은 모두 작은 예수 아기로 보인다.”라며 기뻐했다.

 

 

수녀 양성 과정

 

1890년 8월 15일 ‘작은 수건’을 주는 청원 착복예식이 있었다. 미사 전에 청원자 일곱 명이 검은 옷에 흰 작은 수건과 검은 베일을 쓰고 성당에 들어왔다. 오후에는 수련원에서 부주교와 지도신부의 집전으로 수도명 수여예식을 했다. 작은 상 위에 붉은 보를 펴고 수련자의 수도명을 순서대로 기록해 놓았다. 부주교가 부르면 즉시 일어나 “예, 감사합니다.” 하고 수도명을 받았다. 수도명을 받은 수련자들은 수녀원 소임을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수도복을 입는 착복예식을 했다. 입회 후 6년이나 지났다. 사도 바오로 축일 아침에 착복미사가 거행되었다. 청원자 일곱 명이 흰 치마저고리에 흰 면사포를 쓰고 연분홍 화관을 쓰고 손에는 동정의 등잔불인 밀 촛불을 켜들고 둘씩 성당으로 입당하여 자리에 앉았다. 뮈텔 주교는 “처음으로 조선 처녀들이 수도복을 입게 되니 천주의 큰 은혜”라면서, “수녀가 되는 사람은 자기 혼자만 승천하지 못하고 남의 영혼을 많이 구해서 함께 천당에 가야만 스스로 수녀 된 본분을 채운 것”이라고 했다.

 

강론이 끝난 후, 주교는 수련자들에게 수도자 지위에서 이행할 여러 사항에 대한 문답을 하고 이들에게 수도복 입기를 허락했다. 수련자들은 밖으로 나와, 주교가 축성한 수도복을 원장 수녀에게 받아 입었다. 그들은 다시 촛불을 들고 성당으로 들어가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주교께 “세속 옷을 벗어버리고 수도복을 입고, 일생 그리스도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 주교는 기도하며 수련자들을 향하여 성수를 뿌렸고, 그 뒤 미사가 이어졌다.

 

이들은 1898년 8월 28일 서원식을 했다. 3일간의 피정을 마친 수련 수녀 세 명이 흰 매괴화와 불사화로 만든 화관을 쓰고 손에 촛불을 들고 성당에 입장했다. 수련 수녀들이 제대 앞에 꿇어 서원 문답을 하려고 주교 앞에 앉았다. 그때 예식서가 한 권밖에 없어서 짧은 대목은 주교께서 불어 원문을 보고 한국어로 하고, 긴 대목은 수녀가 책을 주교께 드려 책을 주고 받으며 예식을 치렀다.

 

종신서원은 1916년 8월 24일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 혼자 했다. 아마도 초기에 수녀원에서는 종신서원을 계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박 수녀가 책을 읽다가 대수도원 종신서원 예절을 알게 되었고, 원장과 주교께 청해서 허락을 받았다. 이후 1925년에 종신서원식이 있었고, 1931년부터는 매년 거행되었다. 수녀들은 첫서원에 썼던 화관을 종신서원 때 다시 썼고, 그것을 두었다가 은경축이나 금경축 때 또 섰고, 죽은 다음 마지막으로 쓰고 갔다. 이 관습은 1968년 벽혁 때 없어졌다.

 

 

누가 ‘수녀 복(福)’을 누렸는가?

 

수녀원에서는 김 쌩폴 수녀, 혹은 박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를 수도회 1호로 소개한다. 김 수녀는 연길을 올리베다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을 지도하던 6개월을 제외하고는 늘 본원에서 제의를 만들었다. 당시 한국 사제들의 제의는 거의 김 수녀의 손을 거쳤다. 한편, 박 수녀는 인천 수녀원 설립을 위해 약 4년 떠난 것 외에는 평생 본원에서 서양 수녀 부엌과 불어 통역을 담당했다. 두 수녀 모두 70년 이상 본원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박 사베리오 수녀의 생애를 통해 초기 수녀들의 집안을 짐작할 수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인 박 수녀의 할아버지는 기해박해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다시 삼성산으로 이장한 분이다. 또 박 수녀의 아버지 박순집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주교와 성직자들의 시체를 거두는데 힘썼다. 박순집은 박해 이후 블랑 신부 등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왔고, 말년에는 인천에서 전교에 여생을 바쳤다. 그가 시복시성재판 과정에서 증언한 내용은 「박순집 증언록」으로 묶여 있다. 박 수녀도 수도회와 박순집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집안에는 순교자가 16명 있고, 수녀도 4명이나 나왔다.

 

어떤 꽃도 거름 없이 피지는 못한다. 초기 수녀원 생활은 무척 고달프고 궁핍했기 때문에 희생도 많았다. 첫 지원자 다섯 명 중에 두 명만이 살아남아 수녀가 되었다. 초대 원장 수녀는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선종했다. 그리고 선교 수녀들은 입국하여 2, 3년 정도 지낸 후 한국말과 풍습에 익숙해질 만하면 죽은 일이 잦았다. 단체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염병에도 속수무책이었다. 1895년에는 수녀와 고아들이 한 달 동안에 80여 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심지어 수련장 엘리사벳 수녀가 사경을 헤매면서 우유를 찾았을 때 며칠 후에야 원장 수녀가 한 잔을 구해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동 한옥에서 시작한 수녀회가 오늘날의 명동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변화는 컸다. 모든 이의 희생이 수녀회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살던 수녀들이 오히려 가장 가난했으며 고아들의 똥오줌 치우는 잔일을 하면서도 내면의 존엄을 키워왔다. 그렇게 그들은 한국의 교회사, 근대사, 여성사를 써왔다. ‘순교자들의 핏방울로 핀 바오로 뜰 안의 옥잠화’라 불리면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가을호(Vol. 47),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사진 제공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 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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