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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51-56: 구인란 토마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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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106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1) 구인란 토마스 주교1) I

 

 

이번 호부터 6회에 걸쳐 춘천교구의 제2대 지목2)이었으며 훗날 춘천교구의 첫 주교가 되는 구인란 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춘천교구의 초대 지목은 임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였으나 현지에서 사목은 하지 않았기에 이분에 대한 언급은 기회가 있을 때 하기로 하고, 춘천교구의 초창기부터 교구의 기틀을 놓는데 헌신한 구인란 주교의 사목에 대한 기록을 나누기로 한다.

 

춘천교구의 제2대 지목구장 구인란 토마스 주교는 아일랜드 중남부 티퍼레리(Tipperary) 주 출신으로 성 요셉 신학교를 거쳐 종교 연구의 인문학 과정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신학교인 텔레스(Thurles)의 성 패트릭 대학에 진학했다. 그 무렵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려던 성 골롬반 선교회 창립자들은, 1916년 10월 아일랜드 주교회의에서 선교를 위한 신학교와 선교회 설립 허가를 받고, 1918년 6월 29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교황청의 공식 인가를 받기 전부터 아일랜드의 달간(Dalgan Park)에 신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개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서 성 패트릭 대학에 입학했던 구인란 주교는 1918년 1월 선교회 신학대학이 개교하면서 다시 이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20년에 서품을 받았는데, 선교회 신학대학 출신 중 첫 번째 그룹이었다.

 

같은 해 선교지역에 파견되는 첫 사제단(16명)의 일원으로, 첫 번째 선교지였던 중국의 한양교구(漢陽 敎區)로 떠나 칼빈(Edward Galvin) 주교 아래에서 여러 가지 주요 역할을 하며 11년 동안 선교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 후 1931년에는 교황청이 골롬반 선교회에 위탁한 중국 중남부의 장시성(江西省) 난청(南城)현으로 파견되었는데, 중국 한양에서 보낸 11년간의 경험은 새로 시작하는 난청에서의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교구의 역사를 연구 · 정리하는 교회사연구소에 전해진 기쁜 소식 하나는, 우리 교구 최현규 이냐시오 신학생이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에 관한 연구’로 논문을 완성한 일이다. 『골롬반 문서』라는 사료를 기초로 하여 구인란 주교의 사목활동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교구의 역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만하다.

 

1) 구인란 주교(Thomas F. Quinlan, S.S.C., 1896.9.13.-1970.12.31)는 중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였기에 한자 이름을 이미 가졌고 이 이름을 한국에서도 사용했다. 퀸란, 구 토마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원고에서는 구인란(具仁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 시기에 따라 신부, 지목구장 몬시뇰, 주교로 부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시기를 나누지 않고 주교로 통일을 하겠다.

 

2) 포교지 교구 또는 준교구의 하나로서 대목구보다는 규모가 작은 것. 지목구의 교세가 발전하면 대목구(代牧區)가 되며, 그 교세가 더 늘어나면 정식교구로 승격된다. 이 지목구의 장이 지목이다. [2020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2) 구인란 토마스 주교1) II

 

 

구인란 주교는 14년간의 중국 선교 활동을 마치고 1933년, 안식년을 맞아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같은 해 가을,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이 성 골롬반 선교회에 새로이 위탁한 조선의 새 선교지역 목포(현 광주대교구)로 발령을 받고 1934년 6월에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목포에 도착한 후 6년간 사거리 준본당, 광주(현 북동) 본당 등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펼치며 이 지역의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사거리 준본당의 초대 주임을 맡았던 그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협조를 얻어 부지를 매입하고 기금을 마련한 후, 1935년 6월에 목조로 된 40여 평의 성당을 신축하여 광주 지목 임 맥폴린 몬시뇰의 주례로 봉헌식을 하였다. 또한, 관내의 8개 공소를 부지런히 순회하며 성무를 집행하는 등 본당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닦아 나갔고, 장성 등 다른 지역에도 본당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후 광주의 첫 본당인 광주 본당의 보좌신부와 4대 주임신부로 재임하면서 1937년 10월 2일 벽돌조의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6월에 완공한 후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38년이 되자 교황청은 강원도 지역 사목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위임하였다. 그해 10월 21일, 구인란 주교는 안 바드리시오(Patrick Brennan), 도 야고보(James Doyle) 신부와 함께 강원도 지역의 첫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구인란 주교는 춘천지목구의 설립을 위해 미리 강원도에 파견되어 춘천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1939년 4월 25일에 강원도는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춘천 지목구로 독립하였고, 1940년 12월 초대 지목 임오원 맥폴린 신부를 대신하여 2대 춘천 지목으로 구인란 주교가 임명되면서 그때부터 몬시뇰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 1938년 파리 외방 선교회가 제출한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당시 강원도에는 11개의 본당이 있었고 신자 수는 11,235명이었다.

 

춘천 지목구 설정과 함께 재단법인 설립이 진행되어 안정적으로 교구 운영이 이루어지나 싶었지만, 재단법인 설립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법인 이사장으로 추대될 지목구장(임 맥폴린)의 주소지가 강원도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인란 주교는 1939년 11월 아일랜드 총원으로 보내는 서한에서 포교성성에서 보조금으로 5천 엔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하루빨리 새로운 지목구장이 임명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써 보낸다. 그리고 현재 자신은 지목 대리이지만 앞으로 지목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선교 본부 건물에 대한 계획도 피력한다. 부동산 구매 비용을 선교회에서 받아 토지를 이미 구매한 만큼, 본부 건물 건축에 대한 필요성과 시급함을 언급한 것이다. 목포에 지은 본부 건물의 두 배 규모로 건물을 구상하고 있을 정도로 강원도에 지을 선교 본부 건축에 대한 그의 포부는 매우 컸다. 더불어 강원도에 40명의 사제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언급한다.

 

* 1938년 6월 23일 아일랜드 성 골롬반 선교회 총장의 편지 내용을 보면 오웬 맥폴린 초대 지목과 구 토마스 신부가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실무를 맡으라는 내용이 있다. 새로운 지목구의 책임자로 구 토마스 신부를 이미 내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3) 구인란 토마스 주교1) III

 

 

1941년 12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성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 미국 · 호주 · 뉴질랜드 출신 7명의 신부는 본국으로 송환시켰고, 아일랜드 신부들은 가택연금 시켰다. 구인란 주교는 춘천과 홍천 두 곳에서 연금 생활을 했고,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3명의 골롬반 회원들은 첩보 활동 및 불온사상 소지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 1941년과 1946년 연보(교세통계) (위 포함).

 

 

1942년 아일랜드의 중립적 위치가 인정됨에 따라 신부들은 각자 자기 본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사목활동은 금지된 채 가택에 연금되었다.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사실상 골롬반 선교회의 선교 활동은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이때 춘천의 지목 서리는 노기남 바오로 서울 주교가 맡았다. 구인란 주교는 해방 후 다시 춘천 지목에 부임하였으나,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됨에 따라 춘천지목구의 세 본당(평강 · 이천 · 양양)과 교우 3,400여 명을 잃게 되었다.

 

구 토마스 몬시뇰은 1945년 9월 10일에 성 골롬반 선교회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차기 춘천 지목으로 미국인 안 바드리시오(Brennan) 신부를 추천하며, 그가 미군과의 관계도 원활하고, 학식과 성덕도 높고, 리더십도 좋다는 이유를 부연 설명한다. 그의 춘천지목구에 대한 책임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5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1946년 구 토마스 몬시뇰이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 처음으로 교구 통계를 보고하는 내용이 있다. 그는 1946년의 연보와 함께 1941년도 연보를 동시에 첨부하여 비교하도록 하였다. [2020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주주보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4) 구인란 토마스 주교1) IV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일주일 만에, 미사를 드리던 구 몬시뇰은 함께 있던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춘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 후 7월 16일 밤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후송되었고, 다음 날 저녁에 다시 기차를 통해 사흘 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9월 5일까지 구금되었다가 그 뒤로 만포·고산을 지나 중강진까지 모두 250리의 산길을 걷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 을 하였는데, 극한의 추위에 길에서 숙식을 하며 행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제와 포로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구인란 주교는 친구인 초대 교황사절 방 파트리치오(Patrick J. Byrne) 주교와 아들처럼 여기던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죽음의 행진 후 구인란 주교는 1953년 4월 중강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를 거쳐 기적적으로 고국인 아일랜드로 생환하였다. 구인란 주교는 석방 이후 휴식을 위해 아일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극한의 고통과 체험을 나누게 된다. 전쟁 중에 한국주재 교황사절 방 주교가 사망하자 일본주재 교황사절이 한국 교황사절을 겸임하였다. 교황청은 일본주재 교황사절의 청을 받아들여 한국인 주교와 프랑스 주교들과 잘 지낼 것으로 보이는 구인란 주교를 1953년 10월 한국주재 교황사절 서리 겸 춘천 지목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듬해 4월 22일 한국에 돌아온 구인란 주교는, 1955년 9월 20일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자 춘천 대목을 맡게 되었으며, 성 골롬바노 축일인 그해 11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수차례의 서한을 통해 겸임에 대한 고뇌와 주교가 없는 춘천교구의 상황에 대해서 애타는 마음을 호소하며 교황사절 직책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원했다. 결국, 1957년 12월 교황사절의 임무는 내려놓고 춘천대목구의 활성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60년 1월 3일에는 주교 교령으로 춘천대목구의 27개 지역이 준본당으로 설정되었고, 이어 1962년 3월 10일 교황청 포교성성 교령에 의해 한국에 정식 교계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준해 춘천대목구도 정식 교구로 설정되어 그해 7월 26일 구인란 주교의 춘천교구장 착좌식이 죽림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2020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5) 구인란 토마스 주교1) V

 

 

구인란 주교 재임 당시 본당과 신자 수의 통계 내용이다. 현재 많은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이 되었고, 또한 많은 공소가 폐쇄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름마저 낯선 지명이 많다. 기록을 비교한 결과 공소 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6) 구인란 토마스 주교1) VI - 1955년 춘천교구의 교세

 

 

구인란 주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학교를 운영할 수도회를 물색하였고, 마침내 춘천에 여자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성심 수녀회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성심 수녀회는 포교성성의 도움과 춘천교구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64년 3월 춘천에 대학 설립에 필요한 부지(현 한림대학교 자리)를 마련하여 ‘성심여자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선교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선교 수녀회를 유치하고자 1959년에 옛 교육원 건물을 건축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교구에서 활동하게 했고 그들의 양성을 주재용 신부에게 맡겼다.

 

구인란 주교는 유엔한국민사지원단(UN韓國民事支援團,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에 관여하며 특별히 식량난 해결과 의료기관 설립을 통한 질병 퇴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춘천에 성 골롬반 병원이 제일 먼저 지어졌고, 홍천과 강릉 등에도 병원을 건축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원조의 발길이 끊기게 되어 건축이 이어지지 못해 아쉬워하였다. 그렇지만 훗날 춘천에 이어 삼척과 강릉 등지에도 구 주교의 염원대로 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전란으로 폐허가 된 춘천교구를 25년 동안 맡아서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건한 결과 8천여 명의 신자가 5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1957년 철원 · 학성동 · 정선, 1958년 간성 · 북평 · 문막 · 울진, 1959년 김화, 1960년 단구동, 1961년 장성, 1962년 양덕원, 1965년 화천과 평창 등에 본당을 신설하는 등 30여 개의 본당과 약 150개의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5년 3월 22일에는 강원도 남부지역을 분리하여 원주교구를 분할·독립시키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

 

1966년 2월 11일 구인란 주교는 70세의 노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자신이 지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련원(옛 교육원)에서 거주하다가, 1968년 삼척의 성내동 본당 내에 자신이 세우고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던 성 요셉 의원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던 중 극도의 심장 허약 증세 끝에 1970년 12월 31일에 선종하였다. 구인란 주교의 유해는 1971년 1월 4일 성내동 본당 뒤뜰에 안장되었다가, 1972년 4월,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나는 금년이나 내년에 성청에서 나의 짐(주교직)을 벗게 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에게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언을 요청할 것입니다. 물러나게 되면 나는 현장의 어느 구석에서 쓸모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한동안, 아마 이곳에 머물 것입니다.”(구인란 주교가 선교회 총장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2020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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