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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평신도 희년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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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23 ㅣ No.84

[지금 여기 평신도] 평신도 희년을 돌아보며

 

 

한국 교회는 지난 1년간 ‘평신도 희년’을 지냈다. 일곱 번의 안식년을 지낸 뒤에 맞는 거룩한 해이자 해방을 선포하는 해인 ‘희년’(레위 25,8-22 참조)을 복되고 경사스럽게 지냈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우리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신심을 본받아 살고자 했는지 회고해 본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 신앙 선조들

 

정조 3년(1779년)인 기해년, 경기도 여주의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주도하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윤하 등의 남인 학자들이 참여하여 ‘한문 서학서’를 강학했다. 그때 이 소장 유학자들은 천주교 서적들을 강독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이를 계기로 이승훈이 1784년에 중국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이 땅에 천주교회를 건립한 평신도 신앙 선조들은 백여 년간 지속된 박해에도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신심을 꺾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1791년에 홍문관과 강화도 외규장각에 수장되어 있던 천주교 서적들을 소각하였고, 1801년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압수한 서적과 성물들을 형조에서 불태웠다. 그래도 교세가 확산되자 관련 서적을 중국에서 들여오지 못하도록 금압 조치했다. 그럼에도 평신도 지도자들은 ‘한문 서학서’를 지속해서 들여와 우리말로 번역하고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외인들에게 선교했다. 아울러 북경교구와 교황청에 성직자 파견을 청원했다. 그에 따라 주문모 신부를 위시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입국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을 비롯한 한국인 사제들이 탄생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의 위상이 정립되었다. 그해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고, 마침내 1968년 7월 23일 대전교구 대흥동성당에서 ‘한국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평신도로서 평신도 희년을 보내다

 

“하느님 백성의 사도직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바라는 거룩한 공의회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 … 평신도들은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하여 실제로 사도직을 수행한다”(평신도 교령, 1항, 2항).

 

이 교령에 따라 한국의 평신도들은 지난 50년간 교회 안팎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며 교회를 지탱하여 왔다. 그리고 올해 ‘평신도협의회’ 출범 50주년을 맞았다.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한국 평협)는 ‘평신도 희년’ 선포를 한국 교회에 요청하였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7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이를 만장일치로 승인하였다.

 

교황청 내사원은 이 평신도 희년을 더욱 뜻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한국 교회의 요청에 따라 ‘전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보내왔다.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평신도 주일인 2017년 11월 19일에 희년 선포 미사를, 2018년 11월 11일에 희년 폐막 미사를 드렸다. 이 기간에 다양한 평신도 행사가 진행되어 많은 이가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나 또한 한국 평협의 일원이자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평협이 주관한 행사에 참여하여 봉사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국 평협은 계간지 「평신도」에 평신도 희년을 주제로 한 특집 기사를 네 차례 담았고, 한국 평협 50년사 「한국 천주교 평협 50년, 기억 · 희망 · 증거의 삶」을 기획, 편집하였다. 아울러 평신도 김익진의 삶을 그린 희년 기념 연극 ‘빛으로 나아가다’ 제작에도 함께했다. 2018년 7월 21일, 50년 전 한국 평협이 창립된 장소이기도 한 대전교구 대흥동성당에서는 ‘한국 평협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한국 평협 50주년 선언문 ‘세상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평신도’가 낭독되었다. 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나에겐 남다른 감격의 순간이었다.

 

생업을 미루다시피 하고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내게 주어진 이 일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특별한 소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한꺼번에 밀려드는 힘들고 고된 일을 피하고 싶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하느님과 교회와 평협이 아닌 나 자신을 드러내고 앞세우려는 유혹에도 종종 시달렸다. 그때마다 신앙 선조들의 대가 없는 열정과 바위와 같은 신심을 떠올리며 한없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순교도 불사한 그 뜨거운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살벌한 위협과 모진 감옥살이, 그리고 가혹한 고문과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을 증언하던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어찌 닮아 살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평신도들의 모습은

 

한국 교회는 그간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불과 이백여 년 남짓하지만, 「2017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신자 수가 581만 3770명으로 전체 인구의 11%를 차지한다. 또한 본당이 1,734개에 공소가 737개에 이르고, 주교가 42명, 신부가 5,318명, 신학생이 1,319명, 수사가 1,593명, 수녀가 1만 143명이나 된다. 정하상과 유진길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머나먼 북경을 이웃집 드나들듯 오가며,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던 초기 교회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가서 성체 조배를 할 수 있고 사제와 수도자를 만나 영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비롯한 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다.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청껏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노래와 기도를 하며 내 영혼을 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평신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주일 미사 참여자는 19.4%, 부활 판공 참여자는 31.9%, 성탄 판공 참여자는 30.1%에 불과하다. 외형은 커졌지만, 내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교회 내의 고령화가 사회보다 더 빠르게 진행될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수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성탄 성야 미사와 부활 전야 미사뿐만 아니라 주일 미사 때에도 앉을 자리가 모자라 서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교회 안팎은 신자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이고, 그들의 온기로 후끈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교회가 한산해졌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지탱해오던 평신도들의 열정과 신심이 그만큼 시들해지고 나약해진 것이다. 신앙 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땀 흘리며 세우고 다져 온 한국 교회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신앙 선조들의 삶이 이 땅에 재현되기를

 

‘한국 평신도 희년’이라는 명목 아래 뜻깊은 미사와 행사들이 개최되었지만, 지금의 평신도들이 진정 복되고 경사스러운 마음으로 희년을 지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해 준 신앙 선조들을 기리고 그들을 닮아 살고자 하는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인 마음가짐이 있었는지 반추해 본다. 초기 신앙 선조들이 각오하였던 적색 순교는 아닐지라도 육체보다 영혼을, 물질보다 정신을, 찰나보다 영원의 기쁨을 추구하고자 하는 백색 순교를 지향하려 했는지 자문해 본다.

 

이제 평신도 희년이 막을 내렸다. 이는 곧 새로운 희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한다. 2068년, 지금으로부터 50년 뒤 다시 맞이할 희년에 우리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 평신도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과연 그들은 우리를 본받을 만한 신앙 선조로 여길까.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처럼, 나를 비롯한 우리 평신도들이 자신의 자질과 능력과 지향이 아니라 나를 뽑아 세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맡기려는 마음을 앞세워야 하며, 평신도 개개인의 영광과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름을 드높이 올려 빛내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신앙 선조들처럼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변화하고자 할 때 등 돌린 신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또한 미지근하고 나약한 신자들도 세례 받을 당시의 뜨거운 열정과 굳은 신심을 회복할 것이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목숨마저 초개처럼 여겼던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들의 삶이 이 땅에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미망은 아닐 것이다.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기획홍보위원장이자 계간지 「평신도」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중국 선교 답사기 「둥베이는 말한다」, 장편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 등을 펴냈으며, 조선 후기 천주교 교리와 신앙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든 「천주가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김문태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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