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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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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0-25 ㅣ No.1260

[주님의 기도와 교부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누구에게나 있는 시련과 유혹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련과 유혹을 당한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직후 마귀에게 세 번씩이나 유혹을 받으셨다. 구약의 욥 성인도 마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성경은 좋은 시험과 나쁜 시험을 구분한다. 좋은 시험은 인간을 단련시키는 결과를 내는 시련을 말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유로운 존재를 사랑하십니다. 유혹에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를 가르쳐서 우리를 알도록 해 주고 그래서 우리의 비참함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기도론」, 29항).

 

반대로 나쁜 시험은 인간을 악으로 유인하는 유혹을 뜻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다지기 위하여 인간의 내적 성장에 필요한 ‘시련’과,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유혹’을 분별하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847항).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주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시험을 당하였다(창세 22,2 참조). 그러나 그는 뜸을 들이지 않고, 곧바로 주님의 명령에 따랐기 때문에 큰 축복을 받았다. 좋은 결단은 빨리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아브라함이 뜸을 들이면서, 부인에게도 물어보고, 아들과도 얘기한 다음에 결정하려고 했다면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보다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얻으려다가 하느님을 놓치게 될까봐 염려하여 지혜롭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옮겨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시험을 당했다. 많은 사람이 모세에게 불평하면서 ‘차라리 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에서 지냈더라면’ 하면서 대들었다. 그 결과로 불평하던 이들은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탈출 14,11-13; 16,2-3 참조).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야고 1,2-4).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이 없을 수 없다. 특히 좋은 일, 예컨대 기도하는 일, 선행하는 것, 건강을 유지하는 운동, 내적 견고함을 유지하는 일 등은 쉽지가 않다.

 

 

마귀의 유혹

 

마귀가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는 시험에 대해서도 성경은 언급한다.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위장한 마귀로부터 유혹을 당했다(창세 3장 참조). 욥도 시험을 당했다(욥 1,13-22 참조).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11 참조).

 

유혹이 언제나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마귀가 악을 선으로 변장시켜 유혹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자주 겉으로 보기에 좋을 듯해 보이는 요인들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진실이와 허실이가 더운 날 시원한 계곡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그런데 허실이가 먼저 나와 진실이의 옷을 입고 가는 바람에 그 뒤로는 허실이가 더 진실이처럼 보여 사람들이 진실을 따르기보다 거짓에 쉽게 속게 되었다고 한다.

 

 

복합적인 유혹은 견디기 힘들다

 

처음부터 스스로 유혹을 원하고 악을 행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상황이 복잡해지고 판단이 어려워질 때 유혹에 떨어지게 된다. 예컨대, 사울 임금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면서 사무엘 예언자에게 어서 와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온다던 사무엘은 이레 동안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날마다 겁에 질려 탈영병은 늘어나고, 적군은 날이 갈수록 기세가 등등하여 아군에 큰 피해를 끼쳤다.

 

사울은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마음이 약해져 스스로 하느님께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냈다. 그때 나타난 사무엘이 말했다. “임금님은 어리석은 일을 하셨고,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 이제는 임금님의 왕국이 더 이상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1사무 13,8-14 참조).

 

따라서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의 뜻은 ‘하느님, 저희를 그와 같은 복잡한 곤경에서 구해 주소서.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시고 다만 우리가 인간임을 굽어보소서.’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기도이다.

 

이런 청원은 겸손한 기도로서, 하느님의 보살핌과 관대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된다. 하느님은 무한 인내를 가지고 우리의 잘못을 참아 주시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할 때,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어 속아서 유혹에 응해 버리거나 고통을 받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우리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입니다”(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12.22).

 

교회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846항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죄로 이끄는 길을 택하도록 우리를 버려 두지 마시기를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과 영 사이에서’ 싸움을 하는 중이다. 이 청원은 분별력과 용기의 영을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투쟁하는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활의 투쟁에 맞설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권고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기도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도움이라는 깨우침을 주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없이는 옳게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없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우리가 어떤 순간을 헤쳐 나가고자 직접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있다. 어떤 문제는 우리에게 힘겹다는 사실을 아시고, 우리의 미약함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고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생활의 전환점이 되는 어떤 순간에는 기도만이 우리 자신을 넘어지지 않게 해 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 불행히도 자신의 삶이 파괴될 때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제자들 또한 알아듣지 못했으며, 기도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오히려 잠들어 버렸다(마태 26,40-46 참조).

 

“이러한 싸움과 승리는 기도로만 가능하다. 처음부터, 그리고 고뇌에 찬 마지막 싸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유혹자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신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이 청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싸움과 고뇌에 결합시키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849항).

 

그러나 기도를 도피처로 삼아 문제를 회피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회피하려고 기도에 잠겨 드는 자를 단죄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기도는 우리의 승리를 위한 막강한 무기이다. 기도가 약해지면 우리가 비틀거리고 흔들린다. 팽이가 힘차게 돌아갈 때는 흔들림이 없이 반듯하게 서서 돌지만, 힘이 약해지면 흔들거리다가 넘어지듯이, 우리의 생활도 기도로 힘을 얻을 때만 신앙생활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날마다 “하느님, 절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원로 사목자로 강화꽃동네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지낸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10월호, 장인산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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