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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58: 13세기 (6) 여성 신비체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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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3 ㅣ No.109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8) 13세기 ⑥ 여성 신비체험가


영성생활 발전 견인한 여성 수도자들

 

 

- 나자렛의 베아트리스.

 

 

중세 후반 여성 그리스도인에게도 수도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자, 베네딕토회와 시토회를 중심으로 많은 수녀원이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어권 지역의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실천하던 여성 수도자 중에 신비체험가와 영성 작가들이 다수 출현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생활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플랑드리 지역 여성 신비체험가들

 

벨기에 티넌(Tienen) 출신인 나자렛의 베아트리스(Beatrice of Nazareth, 1200쯤~1268)는 일곱 살에 약 일 년 동안 인근 베긴회 회원들과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녔고, 열 살가량에 네덜란드 브루먼달(Bloemendaal) 시토회 수녀원에 머물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열일곱 살 즈음 지원자로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1236년부터 벨기에 리르(Lier) 근처 작은 마을인 나자렛에서 새로 시작하는 ‘나자렛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Abbey of Our Lady of Nazareth)’으로 옮겨 초대 원장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베아트리스는 매우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환시를 체험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불타는 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뚫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고대 네덜란드어 산문체로 쓴 「거룩한 사랑의 일곱 단계(Seven Manieren van Heilige Minnen)」의 저자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초기 사변적인 신비체험 문학 중 하나로 사랑의 일곱 단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여정을 묘사했습니다. 즉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정화되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신부-신비체험’의 사조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했던 하데위치(Hade- wijch, 13세기 중반)는 아직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지 않은 경건한 여성들의 공동체 지도자이자 영성 작가였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그 공동체를 베긴회와 연관 짓기도 합니다. 하데위치는 저서 「환시(Visioenenboek)」에서 자신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종교적인 체험을 이성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환시들로 환원해 제시했습니다. 몇몇 대목은 하느님과 일치의 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데위치는 저서 「편지(Brieven)」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하데위치의 관점은 12세기 프랑스 영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하데위치는 저서 「시구 안에 시(Strophische Gedichten)」에서 그 당시 음유시인의 형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향한 신비적인 사랑에 관한 서정적인 시를 작성했습니다. 결국 하데위치의 신비사상은 14세기 플랑드르 신비신학자인 얀 반 뤼즈브룩(Jan van Ruusbroec, 1293/94~1381)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독일 지역 여성 신비체험가들

 

독일 작센 지방 출신인 막데부르크의 메히틸트(Mechthild von Magdeburg, 1209쯤~1282/94)는 열두 살에 성령께서 그녀를 환대하는 첫 번째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1230년 메히틸트는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기를 원하면서 막데부르크의 베긴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의 지도를 받아가며 40년간 열정적인 기도와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으로 불거진 주변의 적개심 때문에 1270년 막데부르크를 떠나 헬프타(Helfta)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으로 이주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메히틸트는 저서 「신의 흐르는 빛(Das flie- ßende Licht der Gottheit)」에서 신비체험, 사랑의 노래와 비유, 환시, 윤리적인 반성 및 견고한 충고 등에 관한 영성적인 시를 썼습니다. 특히 메히틸트는 저서에서 구약성경 ‘아가’의 시상과 문체를 빌려 사용하곤 했습니다. 메히틸트는 저서를 통해 건전한 신비신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 및 자비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잘 드러냈습니다. 이는 메히틸트가 11~12세기 신비신학자들의 사상을 잘 숙지한 결과입니다.

 

독일 작센 지방 아이슬레벤(Eisleben) 인근 헬프타 출신인 하크본의 메히틸트(Mechthild von Hackeborn, 1240/41~1298)는 일곱 살에 부모님과 함께 로더스도르프(Rodersdorf)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살던 언니인 하크본의 제르트루트(Gertrud von Hackeborn, 1232~1292)를 방문했던 일을 계기로 수도원 학교에 입학해 언니의 보살핌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훗날 수도자가 됐습니다. 1258년 언니 제르트루트가 헬프타 수도원으로 옮길 때에 함께 간 메히틸트는 그곳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애 동안에 초자연적인 은총을 체험했던 메히틸트는 1292년 자신의 내적인 삶의 비밀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으며, 특별한 지식이 없는 가운데 7년 동안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을 저술했습니다. 메히틸트는 저서 「특별한 은총에 관한 책(Liber Specialis Gratiae)」을 교회력에 따라서 전례적이고 삼위일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성했습니다. 특히 메히틸트는 저서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사용하는 것을 논했으며,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강조했습니다.

 

독일 헬프타 출신으로 추정하는 헬프타의 제르트루트(Gertrud von Helfta)라고도 불린 대(大) 제르트루트(Gertrud die Große, 1256~1302)는 다섯 살에 헬프타 베네딕도회 성 마리아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제르트루트는 처음에 하크본의 제르트루트 지도를 받았고, 이후에 하크본의 메히틸트 지도를 받았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수도원 공동체에 입회한 이후에도 세속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며 학문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제르트루트는 스물다섯 살부터 신비생활에 대해 알게 되고 환시와 내적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중병을 앓게 된 제르트루트는 1281년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난 후에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있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제르트루트는 관상생활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갔으며, 예수 성심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제르트루트는 저서 「하느님 사랑의 사자(Legatus Divinae Pietatis)」에서 예수 성심 신심을 강조했습니다. 제르트루트의 변적인 신비신학은 그 당시 독일에서 시작하던 신비신학과 유사한 특징을 지녔습니다.

 

이와 같은 여성 영성가들은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만큼은 큰 존경을 받아 ‘성녀’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의 활약을 통해서 그 당시 여성 그리스도인도 정규 신학교육이나 정규 수도생활을 접하면 이단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영성생활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 당시 독일어권에서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신비신학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정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4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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