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84년 103위 복자의 시성식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1 ㅣ No.945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84년 103위 복자의 시성식

 


103위 성인의 탄생

 

1984년은 한국 교회에 뜻깊은 해였다. 이 땅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고, 박해 시기에 순교한 103위 복자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해였다. 이때 시성된 103위는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70명과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한 9명, 그리고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24명이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명은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었고,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은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시복되었다. 이 두 가지 시성 건은 1976년 교황청에 시성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통합적으로 추진되었다.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1982년 11월 19일 로마를 방문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했다. 김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교황의 방한을 요청했고, 시성식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주교단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어 한국 교회의 주교단은 1983년 7월 13일 시성식 장소를 한국으로 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보내기도 했다.

 

1983년 9월 27일 교황청은 103위 복자의 시성을 확정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1월 25일에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교황이 방한하여 시성식을 거행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시성식이 로마 밖에서 거행되는 것은 아비뇽 교황 시대, 곧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지낸 시기(1309-1377년)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3일 특별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교황은 첫 방문지로 절두산 순교 성지를 찾았고, 이어 청와대를 예방했다. 그리고 시성식 전날까지, 광주에 가서 1980년에 고통을 겪었던 광주 시민들을 위로했고,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했으며, 대구에서 열린 청소년 대회에 참석하는 등 많은 곳을 찾아 여러 사람을 만났다.

 

5월 6일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와 시성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교황은 아침에 명동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린 뒤 여의도로 향했다. 그리고 60여만 명의 신자들과 함께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했다. 설립 200년 만에 한국 교회에 성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03위 성인의 탄생은 한국 천주교회에 주어진 크나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로써 성인을 모시게 되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시성식은 한국 천주교회 200년의 역사를 신앙적으로 일단락 짓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고, 다가올 3세기를 준비하는 시발점이었다.

 

 

잊히는 103위 성인

 

시성식 이후 33년이 지났다. 우리가 탄생을 갈망하던 성인들은 오늘날 얼마나 현양되고 있을까? 이것을 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필자는 전국에 있는 본당의 수호성인을 조사해 보았다. 2017년 8월 현재 「한국 천주교 주소록」에 수록된 본당은 16개 교구의 1,737개이다.

 

1,737개 본당 중 103위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본당은 305개(17.6%, 시성식 이후에 설립된 본당의 경우는 27.2%)였다. 가장 비율이 높은 전주교구도 27.1%에 불과했다.

 

103위 성인 중 전국 본당에서 수호성인으로 모신 성인은 40명(38.8%)으로, 그 성인들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의 숫자는 수호성인으로 모신 본당 수).

 

1) 김대건 신부(96) 2) 정하상(49) 3) 유대철(18) 4) 최경환(9) 5) 남종삼(5) 6) 김성우(5) 7) 황석두(5) 8) 유진길(4) 9) 현석문(4) 10) 김제준(3) 11) 김효주(3) 12) 손선지(3) 13) 이명서(3) 14) 정문호(3) 15) 권득인(2) 16) 김효임(2) 17) 박희순(2) 18) 앵베르 주교(2) 19) 이광헌(2) 20) 이문우(2) 21) 이윤일(2) 22) 정원지(2) 23) 조윤호(2) 24) 조신철 (2) 25) 모방 신부(1) 26) 오메트르 신부(1) 27) 민극가(1) 28) 베르뇌 주교(1) 29) 유 체칠리아(1) 30) 이광열(1) 31) 이인덕(1) 32) 임치백(1) 33)장주기(1) 34) 조화서(1) 35) 최형(1) 36) 한재권(1) 37) 허계임(1) 38) 박종원(1) 39) 고순이(1) 40) 이호영(1).

 

이외 개별 성인이 아니라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본당이 45개였고, ‘당고개 순교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본당이 1개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63명의 성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63명뿐만 아니라 수호성인으로 모신 40명의 성인 중에서도 성 김대건 신부(96개)와 정하상 성인(49개)에게 쏠려 있다. 여기에 유대철 성인(18개)과 최경환 성인(9개)을 제외하면, 나머지 36명과 수호성인으로 선택되지 못한 63명은 거의 잊힌 성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회가 33년 전에 시성식을 거행한 취지와 상당히 어긋나는 것이다.

 

물론 성인들 중에는 관련 성지에서 현양되는 분들도 있다. 따라서 ‘본당 수호성인과 103위 성인의 관계’만으로 103위 성인이 잊히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실태 파악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2014년 8월에 124위의 복자를 새로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복자를 본당의 수호자로 모시는 경우도 생겼다. 제주교구의 김기량본당은 김기량 복자, 춘천교구의 만천본당은 홍인 복자, 원주교구의 무실동본당은 최해성 복자, 전주교구의 만성동본당은 유항검 복자, 송천와룡본당은 윤지충 복자를 수호자로 모셨다. 복자의 탄생으로 103위 성인이 잊힐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03위 성인 다시 찾기

 

필자는 2009년에도 이러한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2007년까지의 통계를 바탕으로 했는데, 전체 본당에서 ‘103위 성인 수호성인 본당’ 비율은 18.9%로 2017년의 17.6%보다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2008년 이후 103위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선택한 본당이 감소했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2008년 이후에 신설된 226개 본당 중에 103위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본당은 20개(8.8%)에 불과했다. 물론 226개의 본당 중에 수호성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20개 있었다. 그러나 20개 본당을 제외하더라도 10%밖에 되지 않는다. 10년 사이에 103위 성인이 더욱 잊혔다고 할 수밖에 없다.

 

103위 성인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방법으로 ‘한국 성인 세례명 갖기’ 등 몇 가지 방안이 제시된 바 있다. 그와 함께 필자는 한국의 모든 교구와 본당이 한국 성인을 수호성인 또는 제2 수호성인으로 정하기를 제안한다.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 103위를 현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교구와 본당이 있다. 전주교구(전주 순교자 7위)와 의정부교구(김대건 성인)는 한국 성인을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대구대교구는 이윤일 성인을 제2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교구의 천호동본당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과 함께 김성우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1984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 중에도 한국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설정한 본당들이 있다. 이들은 1984년 이후에 수호성인을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모든 본당이 한국 성인으로 수호성인을 바꾸라는 말은 아니다. 신설 본당은 한국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정하거나 제2 수호성인으로 설정하고, 기존의 본당도 한국 성인을 제2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성인과 복자를 더욱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03위 성인의 현양 문제는 모든 교회 구성원이 함께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 한 해 동안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을 집필해 주신 방상근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1,71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