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11년 조선대목구의 분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5 ㅣ No.905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11년 조선대목구의 분할

 

 

2017년 5월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침묵의 교회인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를 포함하여 열여덟 개의 교구(군종교구 포함)와 한 개의 자치 수도원구(덕원)로 구성되어 있다. 1831년에 하나로 시작된 교구가 열여덟 개로 늘어난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성장해 왔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1911년 조선대목구의 분할은 이러한 성장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교구 분할이었다.

 

 

조선대목구의 설정

 

신유박해(1801년)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신태보 베드로, 이여진 요한 등은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성직자를 다시 영입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811년에 북경 주교와 교황께 서한을 보내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은 1816년 정하상 바오로에 의해 재개되었다. 정하상은 아홉 차례나 북경을 왕래했고, 1823년에는 역관 출신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합류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교우들은 1824년(또는 1825년)말에 교황께 다시 한번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저희들의 최고 감목(監牧)이신 교황께 조선 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은 인사와 깊은 공경을 드리나이다.”로 시작하는 이 서한은 포교성성(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마카오 대표부 책임자였던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이 서한을 1826년 11월 29일에 라틴어로 번역한 뒤, 이듬해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조선 선교에 전심할 수 있는 수도회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교황청으로 보냈다.

 

당시 포교성성 장관은 몇 년 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1831-1846년 재임)이 되는 카펠라리 추기경이었다. 그는 1827년 9월에 서한을 접수했고,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에 공감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선교를 담당할 선교 단체를 찾기 시작하였다.

 

카펠라리 추기경이 처음에 교섭한 선교회는 예수회였다. 그러나 예수회에서는 선교사가 부족하여 조선 선교를 맡을 수 없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추기경은 파리외방전교회에도 의사를 타진했다. 그렇지만 파리외방전교회 또한 인원 부족, 비용 부족, 입국을 위한 정보 부족, 회원들의 동의 문제 등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가운데 파리외방전교회는 1828년 1월 6일에 아시아 지역의 회원들에게 포교성성의 제안을 알리고 의견을 묻는 공동 서한을 발송했다. 그리고 이 서한을 본 샴 대목구의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입장을 반박하며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8년 2월 5일에 샴 대목구의 부교구장 주교로 지명되었고, 1829년 5월 28일에 샴 대목구의 플로랑 주교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6월 29일 주교 수품). 그럼에도 그는 조선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은 1831년이었다. 그해 2월 2일 카펠라리 추기경이 신임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새 교황은 자신이 관여했던 조선 교회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포교성성에서는 1831년 7월 4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을 허락하며,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를 조선에 설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두 달 뒤인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조선대목구의 설정 칙서와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한다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대구대목구의 신설

 

1831년에 설정된 조선대목구는 1836년 이래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입국하면서 체계를 잡아 갔다. 그리하여 1865년에는 조선 전역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신자 수도 2만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866년부터 8년에 걸쳐 진행된 병인박해는 한국 교회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는 1876년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재건되었고,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는 가운데 성장을 거듭했다. 그 결과 1910년 당시 조선의 신자 수는 73,517명이었고, 본당은 54개였으며, 공소는 1,024개였다. 그리고 주교 1명, 선교 사제 46명, 조선인 사제 15명 등 총 62명의 성직자가 사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교세가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교구 분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곧, 한 명의 주교가 한국 전체를 사목하기에는 조선대목구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좀 더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서는 교구의 분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교구장 뮈텔 주교는 당시 조선대목구의 신자 수, 관할 지역의 크기, 지속적인 교세 증가 등을 고려하여 조선대목구의 분할을 추진하고자 했다.

 

교구를 분할하려는 뮈텔 주교의 구상은 1908년 이전에 이루어졌고, 1909년에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1910년 4월 이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도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0년 12월에 포교성성은 조선대목구의 분할을 허용했고, 1911년 1월에는 새 대목구장 선출을 위한 투표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비오 10세 교황은 1911년 4월 8일에 칙서를 반포하여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를 분리해 신설하는 한편, 기존 대목구의 명칭을 서울대목구로 변경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설 대목구의 관할 구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하였고, 새 대목구의 중심지는 대구로 결정했다. 분할 당시 대구대목구의 신자 수는 26,004명이었고, 본당 수는 18개였다.

 

비오 10세는 대구대목구장에 드망즈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 소식은 1911년 4월 23일 파리에서 온 전보를 통해 알려졌고, 교황 칙서는 5월 30일에 도착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의 서품식은 1911년 6월 1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뮈텔 주교는 본디 조선대목구에서 남부 지역(대구대목구)과 함께 북부 지역도 분할하여 세 대목구 체제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 번에 세 대목구로 나눌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성소(聖召)의 감소 등을 우려하여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만 분리했던 것이다.

 

대구대목구가 설정될 당시 조선에는 4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15명의 조선인 사제가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서울대목구에는 주교 1명과 33명의 사제가, 대구대목구에는 주교 1명과 14명의 사제가 소속되었다. 그리고 15명의 조선인 사제 중에는 10명이 서울대목구 소속으로 남았고, 5명이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결정되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

 

드망즈 주교의 임명에 대해, 당시 「경향잡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리 조선에 교우가 많이 늘었으므로, 우리 교우들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천당 길로 인도하는 일을 더 쉽고 더 넓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조선의 모든 교우들에게 즐거운 일이고 천주께 감사할 일이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실천 사항도 신자들에게 주문하였다. “‘가만히 있는 물은 썩는다.’는 속담처럼, 게으른 습관을 버리고 주교와 신부들의 인도함을 받아 자기 영혼을 위하여 힘쓸 것. 요긴한 도리를 배워 새로 생기는 유감에 빠지지 않도록 힘쓸 것. 자녀들을 전보다 잘 가르쳐 영혼의 신덕을 견고하게 할 것. 외교인들이 신덕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 힘쓸 것. 박해 중에 있던 교우들의 열심을 생각하여 천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구령(救靈)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제일 요긴한 것임을 알 것.”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내용이었다. 특히 ‘박해 시대 신자들의 열심’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은 가슴에 와닿는다. 역사는 우리의 스승이며, 아는 만큼 보이듯이, 아는 만큼 믿음도 살찌울 수 있다. 교회사 공부를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계상 2017년 5월 현재 한국 교회에는 25명의 주교가 현직에서 사목 중이다. 여기에 15명의 은퇴 주교를 합치면 40명의 주교가 우리 곁에 있다. 1911년에 하나의 교구가 새로 설정되고, 한 명의 주교가 새로 임명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우리는 당시의 신자들보다 몇 배의 은총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은혜를 깊이 깨달아, 우리의 신앙이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순 시기는 지났지만, 항상 성찰하고 감사하는 신앙인,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 보자.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 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5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2,58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