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서평: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김정숙, 경인문화사, 2015)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5 ㅣ No.893

시간 속의 교회, 일상의 소소함. 그리고 그 잊혀진 것을 위하여

김정숙,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경인문화사, 2015

 

 

책읽기의 괴로움 혹은 즐거움

 

책을 늘 접하는 사람이지만 전공분야 이외 전문서적을 읽을 때면 참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용어도 어렵고 분량도 많아 손에 잡고 하루아침 순식간에 읽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동시에 부분과 부분의 관계를 따져야 하므로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철학서이나 문학서의 경우 때로는 문장과 문장의 관계는 물론, 심지어 행간 너머의 의미는 읽는 사람을 고민하게 한다. 그러니 책 읽기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논문처럼 심사의견을 내야 하는 글이라면 그 괴로움은 배가 된다.

 

지식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학자나 전문가들의 몫이었던 지식이 인터넷 등 정보환경의 변화로 일반인들도 보편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상이나 철학, 문학, 역사와 문화 등 인문학의 경우, 대학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로 점차 축소되는 흐름이나 사회 일반에서는 오히려 관심이 높아졌다.

 

가히 ‘인문학의 열풍’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 기저에는 고도로 발전된 사회 속에서 오히려 존재적 불안을 느끼는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인문학 서적에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중의 요구에 영합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숙 교수의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는 일평생 역사를 연구한 학자가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회사’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내력과 삶으로서의 신앙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평소 궁금하면서도 생활에 치여 그냥 넘어가던 일을 꺼내어 쉽게 잘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전문서이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또 그 내용에서 깊이를 느끼는 것은 김정숙 교수가 지니는 학자로서의 자각이나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자가 일반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자기 학문에서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면서부터이다. 학문에 입문하고 노력을 지속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자기 세계가 분명해 지고, 또 학문과 현실이 다르지 않음을 인식한 후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원숙함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또 사회적 책임을 자각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이어지는 기술 방식으로 지루하지 않았고, 책 읽기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아, 그때는 그랬었지!’ 하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쁨도 있었다. 전문서적이면서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관심분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저자의 지향과 책의 편제 등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정숙 교수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2012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100년사의 출간과정에서 각 사건의 맥락과 상호영향에 중점을 두는 공식적인 교구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즉 교회 행정이 중심이 되는 교구사로서는 신자들의 활동이나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책의 출간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 책에는 ‘대구대교구의 성립과 발전’과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라는 두 개의 장과 각 장마다 네게의 큰 꼭지 밑에 모두 35편의 글이 독립된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글은 그 주제에 따라 3~7편으로 나누어 큰 꼭지로 구분되기는 하였으나 한편의 완성된 글로서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렇게 부분의 독립성이 보장된 편제는 선후관계나 각장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따져가며 읽어야 하는 정교한 학문 서적에 비해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수월한 형태가 된다. 한꺼번에 읽을 필요도 없다. 읽는 중간에 잠시 손을 놓다가 다시 읽을 때에도 큰 흐름에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고, 한편으로 일부분만 읽어도 읽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다.

 

 

시간 속에 숨겨진 것들 - 교회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역사는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저자가 밝혔듯이 역사학이란 시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역사학은 시간 이해를 통해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하고, 또 ‘오늘’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의 ‘제1장 대구대교구의 성립과 발전’을 읽다 보면 마치 그 옛날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집안의 내력이나 어떤 물건들이 우리 집안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조곤조곤 말씀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 손자의 눈에 보이는 그림, 항아리, 제기, 하다못해 마당의 나무 등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도 할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더해지면 보이는 것 이상의 소중한 것이 된다. 여기서 소중한 것이 된다는 것은 사소한 일상에 내재된 사연을 통해 그 의미가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접한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도 그렇다. 여기서 인접한 역사 속에서 독립된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별개의 사건으로 보여도 사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시간 속에서 내적인 인과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병인박해(1866)와 신교의 자유 허용(1886), 그리고 천주가사집의 출현은 별개로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들 사건은 시간 속에 내밀한 선후관계를 이루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역사학자들의 몫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에 입각하여 그 내밀한 사연들을 추적하고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 그것이 바로 역사이며, 역사학자들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이다.

 

제1장 ‘대구 대교구의 성립과 발전’은 지역 천주교의 역사를 기술한 내용이다. 역사의 시간으로는 길지 않은 불과 100년 전까지의 대구지역 천주교 교회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만의 천주교회사는 아니다. 오늘을 사는 가톨릭 신자에게 신자로서 자신의 위상과 삶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대구지역의 특성은 지역 천주교사이면서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사가 된다.

 

대구대교구는 1911년 교구로 독립되고 이후 1962년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그 승격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저자는 교구와 대교구의 차이, 북경교구에서 조선 대목구로 독립하여 대구대교구가 되기까지 한국 교구 변화를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설명한다. 이어 외형적으로 대구대교구의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하는 성당 건축, 특히 한옥 성당 건축의 내력을 전한다. 한옥 성당의 건축은 선교사들의 지향이 서구문화나 신앙의 이식(移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으며, 우리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교회의 지향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성당하면 떠오르는 십자가를 통해 대구지역 천주교 활동과 하느님을 향한 지향도 풀어내고 있다.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에서 시작하여 ‘왜’, 그리고 ‘어떻게’로 이어진다. ‘성소의 못자리’ 는 천주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사제의 양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 준다. 구체적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인사제 양성의 지향에 따라 설립된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 사제 양성을 위해 한국 교회 전체가 노력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성유스티노신학교의 기념관을 바라보면서 오늘날 교구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으며, 신학교와 그곳에서의 생활에 담긴 사연, 나아가 신학생들을 사랑했던 드망즈 주교의 사연이 기술된다.

 

‘드망즈 주교와의 대화’에서는 하양성당의 소년소녀들이 성모동굴을 짓게 된 내력과 드망즈 주교의 각별했던 성모신심, 그리고 전례용 포도주를 제조하기 위한 주교관 주변 포도밭을 조성했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관덕정 순교기념관에 전시된 주름상자식 사진기를 통해 오늘날 대구교구사의 중요한 사료가 된 드망즈 주교의 기록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드망즈 주교의 사진은 1925년 바티칸 만국 전람회에서 전시되었던 것으로 이를 통해 한국교회를 전 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이 사진들이 교회사뿐만 아니라 교회를 넘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아낸 귀중한 자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한국 교회는 선교 200여 년 만에 크게 성장하였다. 교세 현황을 살펴보면 연평균 신자 증가율이 16.61%에 이르렀던 1950년대와 평균 7.5%에 달한 1980년대에 급격한 신자 증가율을 보인다. 특히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1950년대, 휴전 직후 한국 교회는 외국 선교사와 수도회의 인적 지원과 미국의 가톨릭 구제회(NCWC)와 독일의 미제레올, 오스트리아의 부인회 등의 물질적 도움으로 전쟁으로 발생한 손실을 복구하고 이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들어오는 선교, 나가는 선교’는 외국의 도움을 성장의 밑바탕으로 삼는 대구대교구의 노력을 보여 준다. 외적 도움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교회 내적으로 치열하게 준비되고 있었음을 소개한 것이다. 내용은 6·25 당시 대구 교구장이었던 최덕홍 주교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최 주교는 전쟁 속에서도 사제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교구로 결집시켰으며, 특히 공산치하에서 월남한 원산의 베네딕도 수도회를 대구교구로 품어낸 분이다. 그의 활동상은 관심을 주지 않으면 역사적 사건의 행간에서 사라질 수 있는 내용으로, 교회 지도자로서의 지향과 노력이 역사의 밑바탕이 됨을 알려준다. 이어 군종 사목을 시작하게 된 내력과 경과를 소개하면서 군종 사목이 대구교구와 무관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감동적인 것은 흥남 철수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메러디스호의 선장 마리노 수사의 이야기다. 여기서 1950년 12월 25일 화물선에 무려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로 월남하는 과정의 내밀한 사연들을 전한다. 피난민의 태도와 선원들의 노력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라루 선장은 이후 삶의 방향을 바꾸어 나머지 삶을 마리노라는 이름을 받고 수사로서 하느님께 봉헌하게 된다.

 

한편 공산치하에서 추방된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의 수녀 아줌마들의 이야기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수도복 대신 사복을 입고 개인별로 남하한 그들을 받아준 것이 대구교구였기에, 이들은 지금까지 대구대교구의 굳건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구에 가르멜 수녀원이 창립된 세세한 사연도 눈에 띈다. 가르멜 수녀원은 봉쇄수도원이다. 이들은 저 깊은 봉쇄 수도원 안에서 침묵을 통해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안에 일치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녀원이 대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엘리야 수녀, 예수의 데레사 수녀 등이 중심이 된 봉쇄 수녀원의 창립은 기도와 숨은 희생으로 대구교구의 성장을 도왔다. 자칫하면 묻혀버리기 쉬운 내력을 소개함으로써 저자는 대구대교구의 성장의 이면에 담겨 있는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구대교구는 6·25를 지내면서 그리고 전쟁 이후의 기도와 활동으로 크게 성장했고, 급기야 1995년 볼리비아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새로운 해외선교의 막을 열었다. 우리에게 해외 선교는 단순히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통공의 결과로 대구교회, 나아가 한국 교회가 자립을 넘어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에 대한 궁금증

 

이 책의 전반부 ‘제1장 대구대교구의 성립과 발전’이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천주교의 지역사였다면, 후반부 ‘제2장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문자 그대로 천주교 신앙의 생활사적인 모습이 제시된다. 대구가 중심이기는 하나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대구대교구와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기의 기억을 공유하며 ‘신앙’이라는 점에서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식생활 도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한국의 수저에 새겨진 문양에 빠져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고유한 식생활 도구 가운데 한국의 수저는 모양도 독특하고 그 끝에 문양(文樣)이 새겨져 있어 아름답다고 한다. 그는 생활의 작은 부분에서도 멋을 부릴 줄 아는 우리의 미적 감각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수집한 이만여 점에 달하는 사진 중 몇몇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참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수저에도 예쁜 문양이 있었다. 늘 사용하던 것인데도 나는 왜 이것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생활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은 염두에 두지도, 기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 속의 사건은 알아도 시간 속 생활의 소소함은 모른다.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연한 것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를 통한 갑작스러운 변화도 있긴 하나 보통은 아주 서서히, 시간 속에서 아주 서서하게 변화한다. 그것이 생활이며 문화이고 또 민속이다.

 

‘해체와 변형’으로 특징짓는 19세기 말 이후 우리 사회에 있어서 변화의 속도가 아주 빨랐다. 그래서 역사의 기억이 매우 분절적인 형태로 각인되듯이 이전 시대의 생활도 기억 속에서 단절되고 분절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서 이전 생활을 경험한 세대들은 바로 직전 세대가 향유하던 것을 대하면 반가움으로 옛날을 떠올린다. ‘제2장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그래서 반갑다.

 

여기에는 ‘신자 되기, 신자로 살기’, ‘신자들의 일상생활’, ‘산 이와 죽은 이의 만남’. ‘변화를 딛고 변화를 바라며’ 등 네 개의 큰 꼭지 아래 모두 17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큰 꼭지의 제목은 시대와 한국 교회의 변화상을 반영하여 박해기로부터 근대로의 이행기, 일제 강점기, 이후 산업화 시기 등의 격변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 부분에서 해체와 변형 속에서 단절되었지만 다행히 시간적으로 멀지 않아 그 속에서 곧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시대의 생활과 그 안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접하지 못한 흐름도 있고, 또 일부는 경험한 것도 있어 반가움과 함께 이 책을 통해 오롯한 역사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천주교 신앙생활은 본명(本名)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본명은 한국 천주교회의 옛 용어로 세례를 받을 때 받는 이름, 곧 세례명을 뜻한다. 세례의식 중에 사제가 세례자의 이름을 부르는 관습으로부터 유래된 이 새로운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이어받는데 이는 그 성인의 성덕을 본받고, 그분의 도움을 전구하며, 일생 동안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한다는 의미이다. 이 서양식의 낯선 이름은 한자식으로 변용되어 우리 사회에 정착되었고, 모르는 신자들 간 소통을 수월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한편 천주교 신자들이 교리를 배우던 교리서를 소개하면서 교리 전승의 우리식 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말은 그 자체로 운율이 있다. 말과 말을 끊어 읽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율격도 내재된다. 이러한 우리말의 특성이 스며들어간 것이 대화체로 된 교리문답서이다. 1960년대 이전에 영세를 받았거나 첫영성체 교리를 배운 사람들은 이 교리문답을 외워 신부님께 찰고를 받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기억’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첫영성체 기억을 떠올렸다. 신부님께 찰고를 무사히 마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영성체를 기다리던 그때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좀 더 커서 지방에 가서 모신 성체는 크기도 달랐고 맛도 달랐다. 서울보다는 조금 크고 투박하였다고나 할까? 집에 돌아와서 어른들께 여쭈어보았다가 불경스럽게 감히 성체의 맛을 논한다는 걱정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궁금하였지만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 책에서 제병 제조의 역사라는 내용으로 불경스럽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열심한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몸에 묵주를 지니고 다닐 정도로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은 각별하다. 이렇게 묵주신공을 많이 바치는 것은 우리나라가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성모 신심은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의 위상이나 무속의 신모 신앙 등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순교가 묵주신공이 이루어준 기적이라고 할 만큼 전래사 속에서 많이 바쳐졌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전거(典據)를 통해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의 묵주기도와 그에 얽힌 내밀한 사연들을 발굴해 기술하고 있다.

 

목자 없이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에서 유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회장제도(會長, Catechista)이다. 선교사들을 받들어 낯선 가톨릭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회장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면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병인박해 이후 잠시 중국에 피신하였던 리델(Ridel, Felix Clair, 1830-1884, 李福明) 신부를 비롯하여 블랑(Blanc, Jean Marie Gustave, 1844-1890, 白圭三)과 드게트(Deguette, Victor Marie, 1848-1889, 崔東鎭) 신부 등이 재입국하면서 가장 먼저 부활시킨 것이 회장제도였다. ‘전교회장의 길’에서는 회장의 교회 내 위치와 내력, 활동상 등이 소개되고 있으며, 이를 이 시대 마지막으로 전교회장을 역임하였던 분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 ‘신자들의 일상생활’은 박해 시기를 거쳐 근대로의 이행기, 일제시기 등을 거치면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신자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꼭지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교회행사 곧 전례주년에 해당하는 첨례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천주교 신자들은 음력을 쓰는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서력기원, 곧 ‘천주강생 후 몇 년’이라는 표현인 서기(西紀)를 수용하여 오늘날 태양력 사용의 발판을 놓았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변화로 구체적인 생활의 기준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며 그 중심에 첨례표가 있었다.

 

한편 신자들이 지켰던 대재(大齋)와 소재(小齋)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다. 전래시기 이래 신자들은 주요 축일을 월·일별로 기록된 첨례표의 표시에 따라 재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당시의 재일(齋日)은 오늘날보다 훨씬 많았고 엄격했으며, 수재(守齋)는 자기희생으로 생활 속에서 바치는 개인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특히 오늘날 사순에 해당하는 봉재(封齋) 기간의 수재는 철저했으며 이때 희생의 결과로 시행되었던 봉재애긍이 오늘날 돼지 저금통으로 바뀐 내용 등은 오늘을 통해서 과거를 보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국사책에서나 보던 국채보상운동이 1913년 사순시기인 봉재기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천주교 신자들도 사회교리 실현이 참여했다는 적절한 사례가 된다. 서학의 신앙화가 일종의 사회개혁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긴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천주교의 사회참여가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특히 일제시기를 지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사목을 하던 특수성으로 천주교의 대사회적인 활동은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천주교가 있었다는 것은 사회참여가 요청되는 오늘날 큰 위안이 된다. 이는 개인구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보다 진일보한 신앙운동이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천주교 신자였던 서상돈을 중심이 되어 전국민으로 확산시켜 나갔으며, 이외 정규옥의 활동, 나아가 여성들의 참여가 대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드망즈 신부가 발행인이었던 경향신문도 이를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성사생활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사제가 많지 않았던 시절 오늘날과 같이 성사생활을 충분히 누린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신자를 찾아 나섰고, 신자들은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이날을 기쁘게 기다렸다. 신부가 오면 먼저 찰고(察考)를 통해 신앙을 점검받고, 이를 통과한 후에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고백성사, 성체성사, 혼배성사였다. 교적 등 행정적인 일도 성사표와 함께 이때 처리가 되었다. 사실 마을에 도착한 신부를 환호했던 기억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이 기억은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사제를 만날 수도 있고 성사도 받을 수 있는 오늘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교회의 인사법인 ‘찬미예수’라는 표현이 등장한 내력도 흥미롭다. 늘 당연하게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교회의 관습으로 행해지는 일상적인 인사인 줄 알았는데, 이것이 1862년 성직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신분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이 인사법이 안중근의 예에서 보듯이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힘이 된다는 사실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산 이와 죽은 이의 만남’은 삶의 마지막 절차인 죽음에 대한 교회의 배려를 대구를 중심으로 기술한 부분이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남겨진 많은 사연과 함께 남은 이들에게는 큰 아픔을 동반한다. 그래서 어느 사회든 그 문화에 따라 각별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 이 땅의 신자들은 상당한 부분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제사를 통한 후손들의 기림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가문에서 추방되었기에 선산(先山)에 묻힐 수도 없었다. 이에 대한 교회 차원의 배려가 곧 영정미사요 가톨릭 묘원의 설립이다.

 

조상을 극진히 받드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정에서 제사를 통하거나 혹은 조상의 위패를 절에 모심으로써 스님들의 발원으로 그 영혼의 안녕이나 극락에 들기를 기원한다. 영정미사가 서구에서 유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자가 토지나 전답을 교회에 기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예물로 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내세를 기원하는 인간의 소망을 반영한다. 곧 연옥영혼을 위하여 살아 있는 이들이 바치는 통공으로 여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이는 영생을 희구하며, 조상을 섬기는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가 가톨릭적으로 발현된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이 땅의 신자들은 박해로 인해 재산, 가족 등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고 교우촌에 모여 살았다. 교우촌에서의 삶은 간고하였지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서로 평등한 관계 속에서 나눔을 실현하여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렇게 살아온 신자들이 죽어서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배려하여 나타난 것이 교회 묘원이다. 여기서는 대구대교구의 남산동 성직자 묘지를 비롯하여 본리동, 감천리, 군위 가톨릭 묘원 설립의 내밀한 사연과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천주교식 장례를 언급하고 있다. 죽음은 어떤 사회에서든지 아픔을 동반하며 그렇기에 죽음 의례는 엄숙히 진행된다. 그래서 전래사 이래로 죽음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돕는 선종(善終) 봉사는 선교의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되었다. 사형당한 순교자의 시신 수습 일화, 가톨릭 장례문화에 대한 일화 등이 소개하고 있는데, 생활 속에서 죽음의례의 비중으로 보아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부분이다.

 

‘변화를 딛고, 변화를 바라며’는 그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의 2장을 마무리 하는 부분이다. 책은 구교우 노인들이나 기억할 성당의 가림벽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천주교가 평등사회를 이룩하였지만 남녀유별의 관습까지 하루아침에 바꾼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림벽은 당대의 우리 문화를 교회가 수용한 사례이기는 하나 꼭 천주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개신교의 새문안 교회(1887)나 평양 장대현 교회(1900) 등은 ㄱ자형으로 건축되어 모서리를 중심으로 남녀의 자리가 각각 한쪽씩 위치하였으며, 출입문도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자 중간에 휘장을 치고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보다 먼저 성당에서는 가림벽을 치고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가림벽이 사라진 후에도 1960년대까지도 제대를 바라보면서 왼쪽에는 여자가, 오른쪽에는 남자가 떨어져 미사를 봉헌했다. 변화하는 문화와 이를 수용하는 천주교의 모습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특징으로 미사보와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늘날의 미사보는 수 놓은 망사에 레이스가 곁들여진 예쁜 모습들이며, 또 예전과는 달리 미사보 없이 미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어린 시절 장옷같이 긴 미사보를 쓰시고 미사 시간 내내 묵주를 돌리시던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다.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엄숙했던 수도복의 변화이다. 수도복은 수도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해방 이후 두 차례 이상 간소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부분 미사보나 복식 등의 시간 속의 소소한 변화에서 과거와 그 의미를 찾아내고 전해주는 잔잔함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운영기금의 이야기도 나온다. 가톨릭에 있어서 성사생활은 무료다. 곧 모든 성사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무료로 베푸는 은총이다. 그래서 성사생활을 돈과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운영에 자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전래시기 동안 한국교회는 교황청이나 북경교구, 수도회 지원금 등 교회기금과 서방 신자들의 애긍전으로 유지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선조들이 교회 운영에 돈을 부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북경에 드나들던 비용도 신자들이 부담했고, 공소운영비도 나누어 분담했다. 사제의 공소방문 때에는 공소전(公所錢)을 거두어 비용을 충당했다. 이 공소전이 후에 교무금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이제 원조를 받던 시대를 넘어 원조해야 하는 시점에서 금전과 관련된 자기희생을 생각하게 한다.

 

1784년 이승훈의 영세와 명례방 공동체로 창립된 한국 교회는 이제 신자 600만 시대를, 대구대교구는 50만 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 ‘신자들의 기적’이라고 하며, 특히 전후 복구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늘 사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기억을 넘어 새로움으로

 

이제, 얼마 동안 나를 행복하게 했던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는 우리 시대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리고 한국 천주교사의 기술에서 기존의 교회사 관련연구와 다른 점은 어떤 것이었을까? 길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일단 지루하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으니까. 전문가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눈높이가 일반 독자에게 맞추어져 있었으니 학자의 사회적 봉사라는 점이나 지식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그 의미를 찾아낼 수는 있었다.

 

일반인의 지식수준이 높아지고 지적 호기심이 크게 증대된 사회에서 전문 정보에 대한 대중화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대중이 눈높이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책을 통해 교회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가 섭렵한 방대한 자료와 하나하나의 글 끝에 보이는 사진과 도움에 대한 기록은 자신의 지향을 위한 저자의 노력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은 편하게 연구실에서 책이나 뒤져가며 쓴 글이 아니며, 머리로 생각하고 문헌의 근거를 찾고 관계자를 찾아 발로 뛰며 쓴 책이기에 읽는 그 생생함이 문맥 안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한편 이 책은 기존의 교회사 관련 서적과는 달랐다. 기존의 교회사 연구가 연대기적 접근이었다면, 그리고 순교사나 교구사, 정치사에 비중이 주어졌다면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사건 사이의 숨어 있는 내밀한 사연에 주목하고 있었고, 일반 신자들의 삶과 생활에 중점이 주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저자가 말했듯이 역사는 시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의 사건은 오늘날의 삶에서 정당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에 한정하여 천주교사를 기술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하나하나의 사건에서 우리의 오늘을 발견하게 만든다.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드러나는 구체적 사실들이 어떻게 보편적 가치를 가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순교사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사는 순교자의 역사다. 그렇기에 순교자에 대해, 그들의 순교 영성과 사적에 대해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순교의 결과로 103위 성인과 124위의 복자, 그리고 최양업 신부님을 가경자로 모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벽을 포함한 하느님의 종 133위의 시복을 위한 예비심사가 시작되었다고 소리도 들린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보인 순교 영성이 정당하게 평가되어 이러한 복됨을 누리는 것은 축하할 일로 참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이러한 순교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천주교 신자들의 큰 자부심이 된다. 그 결과로 이분들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수백 군데의 순교성지도 조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현실로 볼 때 정작 중요한 것은 순교에까지 이른 선조들의 영웅적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 순교 영성을 이어받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성지도 그렇다.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는 순교성지 조성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수천 년 이 땅에서 살아온 역사 앞에서 몇 년, 혹은 몇 십 년 살았다고 순교성지로 조성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이는 순교자 연구에서 나타나는 해석의 과잉과 물질중심의 성과주의에 입각한 교회 정책의 미숙함, 그리고 전체 한국사 속의 교회사보다는 호교론에 사로잡힌 학자들의 편협함에 기인한다. 이제 한국, 한국인 그리고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시야를 넓혀 한국인의 삶 속에서 교회사를 보아야 할 때가 왔다. 이런 점에서 김정숙 교수의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는 그 첫발을 내디디며, 생활과 밀착된 교회의 모습을 전하고 있어 자못 그 의미가 깊다.

 

이 책이 한국 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대구 지역 신자들이 실천했던 생활 속에서의 신앙을 분석해내고 있다.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전래사 속의 지식이 생활을 중심으로 엮어졌다는 말이다. 신앙의 실천과 현재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생활 속에서의 신앙’을 기술한다는 것은 분명 순교나 행정 중심의 교회사 서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교회사 접근의 새로운 시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이러한 지향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문헌적 고증과 관련자 증언을 통해 생활의 모습을 담아내기는 했어도 이 책이 천주교신자들의 생활사는 아니다.

 

생활사적 측면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는 사항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천주가사나 연도가 그렇고. 옹기의 문양이 그렇고, 내밀히 연결되었던 교우촌간 전달체계가 그렇다. 이러한 사항은 당시로는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나 앞으로 생활사를 살핀다면 기록을 넘어 존재했던 생활 속의 당연함을 어떠한 방법으로 찾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월간 《빛》에 연재된 글을 엮으면서 나타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책의 편제에서도 보완할 사항이 있다. 이 책은 두 개의 장과 각장 네 개씩의 큰 꼭지 밑에 3~7편의 독립된 글로 엮여져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개개의 글이 모여서 이루는 큰 꼭지 구성의 편제가 정교하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책을 이어갈 예정이라니 기획단계에서 미리 완성될 책을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한다면 체계나 편제상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교회사 연구 제48집, 2016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영수(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파일첨부

2,55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