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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5,17-37 율법의 완성 (2017. 2. 12. 연중 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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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2-09 ㅣ No.2162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것들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하늘과 땅이 있는 한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고 남에게 그것을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그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이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데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충실하지 못하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 위한 규범이며,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다. 성서는 율법과 예언서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저자는 둘을 묶어서 율법으로 지칭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율법은 성서와 같은 의미이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육정의 의지로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 욕망이 자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율법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느님의 영(=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율법 조항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율법을 일점일획까지지킨다. 율법은 영적 인간의 본성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며, 성령은 율법을 완성하는 힘이다. ‘하늘과 땅은 영적 인간인 예수의 제자를 지시한다. ‘하늘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건이며, ‘은 율법을 완성하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사건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세상에 하늘나라를 증언하므로 또한 하늘나라의 스승이기도 하다. ‘가장 작은 사람큰 사람은 각각 거짓 스승과 참된 스승을 가리킨다. 참된 스승은 성령의 힘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도록 가르치되, 거짓 스승은 성령을 거들떠보지 않고 율법에만 집착함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도록 가르친다. 참된 스승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 하늘나라로 인도하므로 큰 사람이요, 거짓 스승은 스스로 하늘나라에서 추방되어 죽어 있으므로 가장 작은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짓 스승을 큰 사람으로 인정하고 참된 스승은 가장 작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거짓 스승은 재물과 권력으로 자신을 높이는데 비해 참된 스승은 비천한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기 때문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학식과 지혜가 출중함과 동시에 율법을 세세하게 지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세세한 규정들을 만들어낸다. 율법규정은 계속 복잡해지고 그것을 지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하느님을 떠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육정의 욕망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충실하게율법을 지키려면 예수(참된 스승)가 베푸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면 자타가 지혜롭다고 인정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 재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 아니라 백성의 칭찬이다. 백성에게서 오는 돈, 명예,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 진리, 자유를 맛볼 수가 없다. 거짓과 진리를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작은 자리로 만족한다.

 

 

여러분은 옛 사람들이 이렇게 들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를 어기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에게 화를 내면 재판을 받아야 하고, 형제를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며, 형제를 쓸모없는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여러분에게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당장에 가서 그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바치시오.”

 

누가 여러분을 고소하여 법정으로 데려간다면 법정에 도착하기 전에 얼른 화해하시오. 법정에 도착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재판관에게 넘겨지고, 재판관은 여러분을 형리에게 내 주어 감옥에 가둘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한 푼을 다 갚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야합니다.”

 

옛 사람은 영적 인간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율법은 세상의 법률처럼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영적인 가르침이다. 언급된 율법은 십계명 중의 다섯 번째이다.(출애굽기 20:13, 신명기 5:17) ‘재판은 사형을 가리킨다.(레위기 20:17)

 

형제는 예수의 제자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서로 형제이다. 형제에게 화를 냄은 무엇인가를 두고 그와 다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서로 다툴 일이 전혀 없다.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누구에게나 성령을 무한하게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 권력, 명예는 무한하게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형제에게 화를 내는 순간 그는 하늘나라를 벗어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재판의 주체는 화를 내는 당사자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을 재판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지만 그 누구도 재판하지는 않으신다.

 

형제를 있으나 마나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를 멸시하는 것이요, 형제를 쓸모없는 바보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형제와의 원한이 깊어질수록 중앙법정불타는 지옥으로 이동하면서 하늘나라와는 점점 멀어진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 ‘제단은 자아의 내면이며 하느님께 바칠 예물은 자기 자신이다. (개개인의 은 성전이고 성전의 안에 제단이 있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으면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더라도 하느님의 복을 받기는 불가능하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나 사랑하시지만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을 당신 아들로 인정하실 수는 없으며,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만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자신과 남을 모두 죽이는 살인행위이다.

 

예수의 제자가 모든 사람과 화해하더라도 악마에 단단히 사로잡힌 사람은 적극적으로 그를 헐뜯고 박해할 것이다. ‘법정은 적대자에 대항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상대방이 아무리 악인이라도 그와 다툼을 일으키는 순간 법정으로 넘겨진다. 이 법정의 재판관은 욕망의 왕국을 지배하는 악마이다. 악마는 허상이므로 자신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을 모두 사형에 처한다. ,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형리(刑吏)’는 죄이다. 죄는 하느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제공하므로 예수는 그것을 형리에 비유하였다. 예수는 죄의 어리석음과 부자유를 감옥에 비유한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감옥이며 불타는 지옥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운명을 불처럼 뻔히 바라보면서도 찰나의 즐거움에 연연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가 조금이라도 남과 다투고 있다면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그 다툼에서 즉시 빠져나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툼의 상대방과 더불어 불타는 지옥으로 추락하게 된다. 예수의 제자가 실천하는 화해는 상대방의 태도와는 관계가 없는 일방적인 행위이다.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는 쉽지만 남을 조금도미워하지 않는 것을 실천하기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는 제자들을 실천할 수 없는 계명으로 얽어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욕망을 따르는 한 남과 다투고, 남을 질투하고, 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의 본뜻은 사람의 신적인 본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살려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는 사랑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성령의 지혜만이 참된 사랑의 능력을 제공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남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는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 그는 즉시 제단으로 돌아가 자신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더 큰 사랑의 지혜를 돌려받는다. 그는 성령의 힘으로 살인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완성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렇게 들었을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인을 보고 그녀를 욕심내면 마음속으로 간음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른쪽 눈이 여러분을 죄짓게 하면 그것을 빼 버리시오! 몸 전체가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일부를 잃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만일 오른 손이 여러분을 죄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 버리시오! 몸 전체가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일부를 잃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번 가르침의 주제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이다.(출애굽기 20:14, 신명기 5:14) 예수는 율법을 체계적으로 풀어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들 중에서 실생활에서 가장 와 닿는 것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서 성령은 율법을 완성하는 힘이며 모든 율법은 성령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간음이란 이성(異性)과 불법적으로 사귀는 행위라고 거칠게 정의할 수 있다. 예수는 남자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자의 경우에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마음속으로 특정의 이성을 욕심내기만 해도 이미 간음을 범한 것이라면 이 계명을 지키기는 아예 불가능한 것 같다. 설령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이성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멸종되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그 해답을 제시한다. 영적 사건은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다. 이성을 보는행위는 자신의 취향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개 외모, 재산, 지위, 지식, 교양 등이 주된 요소이다. ‘욕심은 취향에 맞는 이성을 자신의 소유로 삼거나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행위를 달리 말하면 사람을 욕정과 권력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들을 각각 오른 쪽 눈오른 손에 비유하였다. (일반적으로 성서에서 오른쪽은 하느님의 정의 또는 권능을 상징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간음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오른쪽 눈과 오른 손은 죽음을 부를 뿐이다. 간음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그 즐거움은 지옥의 뜨거운 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오른쪽 눈과 오른손을 과감히 포기하고 나서 성령의 세례를 받아들인다. 그는 성령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도 받아들이고(왼쪽 눈)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도 사랑한다(왼손). 그는 양쪽 눈과 양쪽 손을 모두 회복하여 특정의 이성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과거에는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한쪽 손으로만 사람을 사랑하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완전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요 모자란 사람은 지옥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오른쪽은 사람의 오른쪽과 달리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지혜이다. 예수의 제자는 오른쪽 눈과 오른 손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양쪽 눈과 양쪽 손을 모두 회복하면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완성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이 전혀 예기치 못하는 선물을 내려주신다.

 

예수는 왜 이렇게 끔찍한 비유를 드는가? 회개는 신체를 잘라내는 것과도 같은 과감한 결단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은 신체를 잘라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건이다.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아무리 들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직접 그곳으로 들어가서

그 효과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성이 아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계명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 사랑의 원천은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십계명은 첫 번째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온통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집중된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내와 이혼하려는 사람은 그녀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내가 음행한 경우 이외의 다른 이유로 남자가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앞에 나왔던 간음에 대한 가르침을 완결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관련된 성서는 신명기(24:1)인데 앞뒤의 맥락을 고려해보면 이혼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일단 헤어졌던 아내와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이다. 남녀가 결합하는 목적은 욕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을 낳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정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정을 금지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조항을 들어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장을 써 주고 내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율법을 이용하여 남자의 가부장적 권리를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다.

 

예수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의 제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므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는 다른 아무 조건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떤 이유로도 아내를 내보내지 않는다. 다만 아내가 남편이 싫어서 다른 남자를 원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다.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둘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억지로 내보내면 당시의 관습상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거나 길거리에 나앉아야만 한다.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남자의 욕정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와 결혼하는 사람은 그녀가 전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쫓겨난 것을 알면서도 여자에 대한 욕정 때문에 그녀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혼을 당한 여인이나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나 간음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본래의 남편도 간음을 저지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아내의 가치를 알고 그녀를 사랑한다. 아내를 욕정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도 다른 사람의 가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가 마음에 드는 여자와 재혼을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닌 욕정의 발로일 뿐이다.

 

 

여러분은 또한 옛 사람들이 이렇게 들었다는 것을 압니다. ‘거짓 약속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 맹세한 것을 실행하여라.’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약속을 할 때에 맹세를 하지 마시오.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시오.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입니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땅은 그분의 발받침입니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그곳은 위대한 왕의 도시입니다. 자신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또는 아니오라고 말하시오. 그밖에 다른 말은 악한 자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12 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면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고 규정되어 있다. 민수기 30:2, 신명기 23:21-23 은 대체로 하느님께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람에게든 하느님에게든 약속한 것은 지키는 것이 옳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지 않고 사람에게 한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올바른 약속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조폭대원이 두목과 조직원들에게 범죄를 저지르기로 약속하였다면 이런 약속은 지키지 않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약속을 맺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위 율법 조항은 마치 하느님께서 마치 사람에게 더 힘든 짐을 지우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을 도와주시려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봉양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정성도 없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위험성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위 규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실질적인 친교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그분의 도우심을 받는다.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기 일쑤였던 것 같다. 이러한 세태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개탄하신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그들에게는 소를 죽여 바치든지 사람을 죽여 바치든지, 양을 바치든지 개의 목을 꺾어 바치든지, 곡식제물을 바치든지 돼지 피를 바치든지, 향을 태워 바치든지 우상에게 기도하든지 마찬가지로구나.(이사야서66:3)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제멋대로 하느님의 이름을 걸어놓은 다음 자신이 만들어낸 그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며 예배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도와주시건만 그들은 사람들과 거래하듯이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우상에 불과하다. 우상에게 제아무리 값나가는 제물을 바치며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여도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함은 물론이다.

 

예수의 제자, 곧 영적 인간은 늘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으므로 따로 하느님께 약속할 것이 없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할 것도 없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

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 곧 생명의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나의 옥좌이며 땅은 나의 발받침이다.”(이사야 66:1) 예수는 우리에게 이 구절의 본뜻을 알려준다. ‘하늘은 사람이 하느님을 뵙는 장소(옥좌)이며 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곳(발받침)이다. ‘하늘과 땅은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 자체이므로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할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를 풀어 말하면, 예수의 제자는 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으로서 하늘나라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위대한 왕은 인류의 왕인 예수와 그와 일치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제자들이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원천이며,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예루살렘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을 수 없다. 예루살렘을 두고 무엇을 맹세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을 거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머리는 사람의 생명을 상징적으로 지시한다. 머리를 건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건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목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머리카락을 검게 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며 머리카락을 희게 하는 것은 세상에 통달하는 지혜를 지닌 영적 생명이다. 육신의 생명도 영적 생명도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자신이 주관할 수도 없는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아무 효과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중요한 머리를 걸고 다른 무엇을 위하여 맹세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하늘과 땅-하느님과 사람의 사랑’, ‘예루살렘-아들이 다스리는 하늘나라’, ‘머리-성령의 지혜와 권능으로 대응한다. 예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에 담는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하늘, ,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를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느라 하느님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늘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러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있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라고 대답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므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삶으로 하늘나라를 증언한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거나 세상사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다. ‘악한 자는 사람을 유혹하여 죽이는 자, 곧 악마이다. 악마는 욕망이 빚어낸 허상이므로 악마를 따르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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