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2) 갈망과 게으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06 ㅣ No.502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2) 갈망과 게으름

 

 

늦은 밤까지 책상에 앉아 뭔가에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배가 고파졌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럴 때는 냉장고 문을 열고 뭐 먹을 게 좀 있을까 꼼꼼히 뒤져본다. 그럴 때 뭔가를 집어먹으면 참 맛있었다는 기억이 있다. 별로 먹을거리가 없을 때는 무청, 김치조차도 과일처럼 맛깔스럽고 시원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맛있게 먹으면서 문득 허기와 갈증이 뭘 먹더라도 맛나게 해준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가끔은 세상이 재미없고 의욕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 아마도 허기와 갈증을 느낄 만큼 절절하게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갈증과 허기짐이 아무리 하찮은 것을 먹어도 참 고마울 정도로 맛나게 먹었던 기억을 살려본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하느님께 대한 갈증과 허기짐을 그 정도로 느낀 때가 있었는지 자문해 본다. 너무 좋은 영양식에 배부른 오늘 우리 자유 교회를 보자. 세미나에 피정에 연수회니 특별강론이니 성경공부 등 모자람이 없이 주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모임에 비해서 그 열매는 신통치 않은 것 같다.

 

신참 입교자들은 복음 말씀에 더 쉽게 감동한다. 그들은 신부의 강론이 유식하고 그럴듯한 말이 아니더라도 주의 깊게 듣고 자신의 생활 안에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한다. 또한 상황이 나쁜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중국 교회가 박해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었을 때 8시간을 걸어야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일 년에 한번만이라도 영성체를 할 수 있어도 황공해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박해시대의 한국교우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곳에서는 주님께서 아무런 기적을 하지 않으셨어도 당신의 자리를 지키실 수 있었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알아볼 수 있으셨다.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기회가 많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기적을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이 체험했던 코라진과 가파르나움을 크게 꾸짖으신 적이 있다(마태 11,20-24; 루카 10,13-16). 너무 먹을 것이 많아 오히려 생명의 음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갈망’은 하느님을 만나는 시작이라고 한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그에게 신비로운 체험이나 환시, 기적 등과 같은 것이 있고 없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그에게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없다면 그분과 함께 당신께로 향한 여정, 곧 영성생활을 하기 어렵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없다면 영성생활 하기 어려워

 

언젠가 책을 읽다가 진화의 법칙에 반대되는 자연법칙 중의 하나로 ‘열역학 제2법칙’이란 것이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는 더욱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완전한 질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그리고 더욱 고차원적인 분화의 상태에서 덜 분화된 상태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주는 굽이쳐 내려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로 든 것을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시냇물에 비유했었다.

 

그래서 마침내 가장 낮은 단계의 무정형의 상태, 완전성을 상실하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최 끝단의 상태를 ‘엔트로피’(Entropy)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무질서도’ 혹은 ‘무질서로 흐르는 힘’이라고 했다. 이 ‘엔트로피’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아래로 흘러가려는 힘을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했다. 이것은 진화의 흐름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뒤집기 위해서는, 처음 상태로 다시 돌려놓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영적인 성장이 과거의 낡은 지도에 집착하여 옛날 방식대로, 또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자연적인 저항을 이겨내면서. 그리고 자기 방식대로의 고집스러운 길을 가려는 자연의 경향에 대항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에는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게으름’은 우리 모두의 삶에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생각해보았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고통을 피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예전에 사랑의 반대는 미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움과 사랑은 뿌리가 같은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애증(愛憎)의 관계라고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이 사랑의 반대는 오히려 무관심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곧 게으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성찰하다보면 우리 안에 어느 정도 이러한 게으름이 잠복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용기 필요해

 

그리고 이 게으름의 주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게으름이 깔려 있다. 자신을 돌아보기를 두려워하여 피하기만 한 게으름과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무질서한 애착(愛着)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게으름과 무질서는 악의 본질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과 모험과 새로운 현실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게으름이 있다. 거기에는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도 있으며, 그것은 삶에 있어서 무관심과 게으름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서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한 회피이니 어느 정도는 비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냥 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느 정도 용기는 필요하다. 그것은 무질서와 게으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적인 에너지인데,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힘이 든다. 그러한 삶에는 인간적인 의지나 힘보다는 영적인 협조자가 필요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겨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무질서와 게으름에 대해 저항과 거슬러 올라가는 힘은 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계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말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2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2,15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