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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8: 해결의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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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2 ㅣ No.417

[추기경 정진석] (28) 해결의 단초


교구의 혼란은 잦아들고… 새로운 길을 찾아서

 

 

‘조용히 바뀐 서울대교구장, 5분간에 이취임’

 

윤공희 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취임식 다음 날인 1967년 3월 28일, 한 일간지가 윤 주교 취임식을 다룬 기사 제목이다.

 

“25년간 파란 속에 교구장 직을 지켜온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27일 돌연 사임하고 후임에 수원교구장으로 있던 42세의 윤공희(빅토리노) 주교가 서울 교구장 서리로 앉았다. 윤 주교는 이날 자신의 임명 사실을 발표한 지 한 시간 만인 오후 6시 5분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 평의회 신부(8명 중 1명 불참)들만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취임식을 했다.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 임명장을 낭독함으로써 5분 만에 끝난 임명식을 다른 신부들은 아무도 몰랐다. 마침 6시 미사에 참례하려고 모였던 교우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멍하니 제단만 바라보았다.”

 

서울대교구장 이취임이 얼마나 급하게 진행됐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서울대교구장 서리에 임명된 윤공희 주교에 대해 자세한 이력과 함께 “‘평신도의 사도직 참여에 노력한다’고 젊은 주교다운 소신을 밝혔다”고 소개했다.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노기남 대주교의 근황에 관해서도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교구 재정 문제는 아직도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은 윤공희 주교는 당장 서울과 수원교구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주를 나눠 며칠은 서울에서, 그리고 나머지 날은 수원에서 지내기로 했다. 당시 서울대교구의 재정 문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빚쟁이들은 여전히 교구청에 들이닥쳐 시위하고 있었다. 

 

“신부님! 이리 좀 와 보셔요.”

 

하루는 윤공희 주교의 숙소를 비롯해 교구 주교관 숙소를 맡은 수녀가 정진석 신부를 급하게 찾았다. 

 

“무슨 일인데요, 수녀님?”

 

“윤 주교님께서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에요. 지난번에도 그러시더니 이번에도 베갯잇에 코피를 쏟으셨네요.”

 

차분한 성격의 윤공희 주교는 외적으로는 표현을 잘 하지 않았지만 스트레스가 많아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들 것이라고 정진석 신부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원교구 일도 만만찮은데 서울은 더 복잡하고 해결이 힘든 상황이었다. 서울대교구에 와보니 큰 교구에서 정진석 신부 혼자 덤벼드는 빚쟁이들을 상대하는 형국이어서 더욱더 힘드셨을 것이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진석 신부는 고민 끝에 윤공희 주교를 만나 말씀을 드렸다.

 

“주교님! 제가 재정 문제 해결을 혼자서 담당하기 어렵습니다. 누구에게 좀 부탁할까 하는데, 허락해주십시오.” 

 

“그래, 정 신부가 그렇게 해봐.”

 

- 1968년 여름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 학생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맨 왼쪽).

 

 

김영일 신부에게 도움 청해 

 

정진석 신부는 금호동성당에 있던 김영일 신부가 떠올랐다. 고 김영식 신부가 생전 부천의 성모자애병원을 수도원에 인수인계할 때 김영일 신부가 병원 직원들의 근로 승계 문제와 재정 문제 해결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이미 봐온 터였다.

 

정진석 신부가 전화를 걸자 김영일 신부가 당장 달려왔다. 이미 교구의 어려움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한걸음에 찾아온 김 신부에게 정진석 신부는 주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김 신부, 나 혼자 있어 죽겠다. 나 좀 살려 주라. 빚쟁이 담당 좀 해줘. 여기에 교구장님 하고 나밖에 없다.” 

 

그 길로 김영일 신부는 교구로 왔다. 그리고 교구의 재정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우선 그는 빚쟁이들을 모두 한 방에 모이게 했다. 

 

“빨리 내 돈 내놔!” 

 

“XXX, 내 돈 어떻게 할 거야?” 

 

빚쟁이들은 여전히 앞뒤 가리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설과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나 김 신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방이 떠나가게 소리치던 이들이 김 신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김영일 신부는 천천히 입을 뗐다. 

 

“교구에서 확실하게 돈을 빌렸다는 증거가 있는 돈은 모두 갚아주겠습니다. 교구도 돈을 마련할 시간이 있어야 갚아 주지 당장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분명히 교구가 빚진 돈에 대해서는 모두 갚겠습니다.” 

 

돈을 갚겠다고 하니 빚쟁이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이전에 재정을 담당했던 신부들은 돈의 출처를 꼼꼼히 확인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돈에 대해 “이 돈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빌렸느냐”고 캐물어도 빚쟁이들은 대답은커녕 빨리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다. 교구 재정을 책임진 담당 신부들로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권에 대해 무작정 갚겠다고 단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김 신부는 두말하지 않고 이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꼬인 것들이 풀리기 시작

 

그다음부터 정진석 신부는 빚쟁이들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게 됐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약 한 달 동안 교구청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망했다”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김영일 신부는 차분히 교구 재정 상황을 파악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빌린 돈을 모두 상환했다.

 

윤공희 주교는 정진석 신부의 그간 고생을 잘 알았기에 그해 11월 정 신부를 인사 발령해 소신학교 부교장을 맡겼다. 동시에 윤 주교는 정진석 신부를 불러 로마 유학을 권고했다. 정 신부는 권고에 따라 로마에 유학 신청서를 보내고 신학교에 있으면서 로마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해인 1968년 5월 서울대교구장의 정식 인사가 있었다.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돼 서울로 오게 됐다. 정진석 신부는 주교회의에 오가며 김 대주교를 만나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서울대교구에 도착한 김 대주교는 정진석 신부를 불러 교구청 업무를 제안했다.

 

“내가 낯선 서울대교구에 처음으로 왔으니 나와 함께 있지 않겠나?”

 

 

공부하고 실력을 쌓을 시간이 필요했기에

 

정진석 신부는 조심스럽게 전했다.

 

“대주교님, 제가 노 대주교님과 윤 주교님을 연이어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조금 힘든 시간을 지냈습니다. 사정은 다 아실 것입니다. 대주교님을 도와드릴 신부님들은 찾으면 있습니다. 저도 제 시간을 갖고 공부를 더 해서 실력을 쌓아 돌아오면 대주교님을 더욱 잘 도울 수 있고, 교회를 위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 대주교님께 순명하겠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셔도 따르겠습니다.”

 

정진석 신부의 말에 김수환 대주교는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한참 뜸을 들이던 김 대주교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래, 그럼 로마에 가서 공부해. 그리고 돌아와서 나를 도와주게나.” 

 

정진석 신부는 그렇게 로마로 가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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