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8)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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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8 ㅣ No.298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깁니다”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⑧ 온유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여름을 보내면서 세찬 폭우도 내렸고 태풍도 지나갔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높고 맑은 하늘이 나타나고 그윽한 바람이 불어오는 평화로운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가끔 시끄러운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나가 한적한 시골길을 걷습니다. 핸드폰도 내려놓고 산과 하늘을 보며 조용히 걸어 봅니다. 마음도 한결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약성경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열왕기 상권 1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신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을 죽이고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가 주님 앞에 섰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대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공포에 질렸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크고 뜨거운 불이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 불마저도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고요함과 부드러움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이셔서 참 좋습니다. 요란하고 엄청난 힘을 드러내며 무섭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고 고요함 가운데서 온화하고 부드럽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이 참으로 좋습니다.

 

주님은 온유(溫柔)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주님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바쁘고 복잡한 세상, 모임도 많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그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에 말도 잘해서 많은 이들이 그를 따릅니다. 반면에 뒤에서 조용히 그 모임에 함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묵묵히 모임에 “함께”합니다.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많은 말로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하지만 적극적으로 그 모임에 동참합니다. 어쩌면 온유한 사람들이 있기에 공동체가 유지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동양의 현자 가운데 온유함을 이야기하자면 공자(孔子)를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논어』에는 공자의 사람됨에 대해서 소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 엄숙하시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고, 공손하시면서도 편안하셨다.”1)


자하가 말하였다. “군자에게는 세 번 변화가 있다. 멀리서 보면 엄숙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하고, 그 말씀을 들으면 확실하다.”2)

 

자하는 공자의 제자로, 그가 여기서 말하는 군자의 모범은 바로 선생님(공자)이셨습니다. 제자의 눈에 비친 선생님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풍기는 기운이 엄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치는 말씀을 들어보면 명확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 구절을 설명하기를, 멀리서 보면 엄숙한 것은 예(禮)가 있어서이며, 가까이 가면 온화한 것은 어짊(仁)이 드러나서 그렇고, 그 말씀이 확실한 것은 의로움(義)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가 갖추어져 있기에 멀리서 그 사람을 봐도 절도가 있고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소 엄숙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온화한 성품이 상대방을 편하게 해 줍니다. 어진 마음이 가득해 얼굴에도 온화함이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너무 온화하고 부드러워 물러 터진 사람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확실합니다. 의로움이 그 사람 안에 갖춰져 있어 옳고 그름을 명확히 밝히기 때문이지요.

 

자하가 말하는 군자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이 먼저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 순종하셨으며, 항상 가난한 이들과 병자, 죄인들 같은 사회의 약자들과 기꺼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치셨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최후의 만찬 때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모습과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며 성찬례를 제정하신 모습에서도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과, 십자가 위에서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청하신 데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게 있는 강한 힘을 자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조건 약하고 힘없고 부드럽고, 그래서 조용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온유한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태도는 야망과 추진력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온유함은 그리 달가운 덕목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온유하기보다는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온유는 자제된 힘이며 자신에게 해를 입한 사람과 약자에게도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힘”입니다. 내면에 절제된 힘이 있는 자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는 모습이 부드럽다고 해서 속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노자(老子)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3)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4)

 

흔히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화에 사로잡혀 얼굴이 굳어 있다거나 온갖 근심 걱정이 가득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 가득히 온화한 기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1) 『논어(論語)』 「술이(述而)」 37장.

2) 『논어(論語)』 「자장(子張)」 9장.

3) 『노자(老子)』 36장. “柔弱勝剛强.”

4) 『노자(老子)』 76장. “堅剛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으로 있다.

 

[월간빛, 2016년 10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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