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계교회ㅣ기타

가난한 이는 교회의 보물,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5 ㅣ No.404

[새로운 복음화를 향하여] “가난한 이는 교회의 보물”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앨범에 교황 사진 한 장이 꽂혀 있다. 1978년이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였다. 이 기사의 제목은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은 교회의 보물”이었다. 요한 23세 교황과 똑같은 베네치아 교구장 출신의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추기경이 제263대 교황으로 뽑혔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을 이렇게 소개한다.

 

“1912년 10월 17일 알프스 산의 돌로미테스 계곡 포르노 디카날레 마을에서 가난하며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자애로우면서도 끈질긴 성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이 깊었던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여름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부모의 밭일을 돕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평소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해 왔다.”

 

이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은 “새 교황의 목소리는 평화, 정의, 존엄한 삶을 이끌어나갈 세계인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교황은 평소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가난한 사람과 어린이”라고 말해 왔다. 우리가 잘 아는 교황은 1984년과 1989년에 한국에 방문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다. 그렇지만 그의 선임이었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단지 33일 동안 교황좌에 계시다가 갑자기 이승을 떠나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지난 2013년 교황좌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길을 닦아놓으신 분이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무엇보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잇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이다. 이 공의회는 교리논쟁을 다루지 않고 교회의 현대화를 꾀한 개혁적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나,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나, 언제나 필요한 이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역사의 저편에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안에 자리 잡은 ‘지상의 교회’”라고 말함으로써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예언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권력구조’인 교계제도를 강조하던 이전 교회에서 벗어나 교회를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 교황을 포함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면서 교회의 ‘봉건성’을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미소 교황’으로,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 가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밝혔다. 첫 연설에서 공의회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며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쇄신의 추진력을 무산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주교가 될 때 선택한 사목 표어는 ‘겸손(Humilitas)’이었다. 주교가 되어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1978년 8월 26일, 루치아니 추기경은 6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대관식에 앞서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교황이 공식문서를 발표할 때마다 교황 스스로 ‘짐(朕)’이라고 부르던 관례를 깨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다. 봉건 시대의 유물인 권위적인 호칭을 버린 것이다. 또한 교황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의 사용을 거절했지만, 신자들이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관료들의 권유로 행진할 때만 가마를 타고, 그 후엔 걸어서 교황좌로 올라갔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단한 결정은 ‘종들의 종’인 교황이 쓰기에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삼층관(교황관)을 거절한 것이다. 삼층관은 “교황이 천상과 지상과 교회의 통치자”라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교황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삼층관 거절은 곧 ‘군주제적 교황제도’의 거절을 뜻했다. 이 때문에 6시간에 걸쳐 장엄하게 베풀어지는 교황 대관식이 2시간 만에 간단히 끝나는 ‘교황 즉위미사’로 바뀌었다.

 

교황은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면서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교회법처럼 엄격한 아버지[군주]의 모습보다는 백성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착한 목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요한 23세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다. 착좌 후 선종하기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쓴 19편의 연설문을 보면, 그동안 교황들이 사용해 오던 외교 문서 같은 말투도 없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친밀한 말투를 좋아했다. 마치 자신의 무릎 앞에 자녀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을 건넨다. 요한 바오로 1세의 겸손함은 ‘신앙’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에도 듬뿍 묻어난다. 그분은 9월 3일 발표한 삼종기도 담화에서 “강도도 제 나름대로 신심이 있다”면서, “교황인 나도 조금은 신심이 있다”고 말했다. 강도의 신앙과 자신의 신앙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서, 교황이 얼마나 겸손하게 죄인들조차 안아줄 만한 분이셨는지 가늠케 한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자신이 베드로의 교황좌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9월 20일 일반 알현 때에는 교회의 예언적 직무에 대해 강조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이 나왔을 때 저는 감동했고 열성이 솟구쳤습니다. 자유, 정의, 평화, 발전 등 중대 문제의 해결을 촉진하고 대안을 제기하는 데는 교회 교도권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다고 봅니다.”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불을 붙이고,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와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의 위대한 해방적 문헌을 낳은 문헌이다. 푸에블라 문헌에서는 “가난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벌어져 가는 격차는 그리스도인 실존에 모순되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소수의 사치는 거대한 대중의 비참한 가난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28항).

 

아직 젊은 65세의 교황이 한 달 만에 선종한 것은 가톨릭교회로서 불행한 사건이었고, 사람들은 이 죽음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은 교황이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던 바티칸 은행에 대한 내사를 지시한 가운데 교황청 내 마피아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추정 보도를 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갑자기 선종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계승하려던 행진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역사에서는 필요 없지만, 만약 그분이 더 살 수 있었다면 가톨릭교회는 더 민중적이고, 더 민주적인 교회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성직자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정치권력에 용감하게 맞서는 교회로 더 의연하게 발전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런 교황이 다시 출현한 것은 2013년이었다.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만큼 따뜻하고 친밀한 “고통 받는 민중의 벗”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로마로 왔다.

 

[2016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의정부주보 5-6면,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주엽동 성당 교육부분과장)]



3,16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