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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대구대교구 가톨릭 신앙 사적지: 대구 근대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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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1577

[신앙의 땅] 대구대교구 가톨릭 신앙 사적지


대구 근대로의 여행

 

 

- 대구근대역사관.

 

 

오늘은 외지의 친우들이 왔을 때 필자가 자주 안내했던 곳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거의 모두 대구 ‘근대로의 여행 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코스이지만 가톨릭 신앙과 관계되는 곳을 중심으로 탐방해 보겠다.

 

 

경상감영과 대안성당

 

첫 방문지는 경상감영공원이다. 경상감영은 선조 29년(1596년)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 대구가 주목 받으며 처음으로 대구에 세워졌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으로 왜군의 손에 불탔다가 왜란이 끝난 선조 34년(1601년) 다시 설치되어 1910년까지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무를 통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관청으로 자리했다.

 

조선시대 지방에서 압송되어 온 범법자를 이곳에서 취조·구금하였다. 박해시대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신문을 받았다.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순교자들 중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이시임 안나를 비롯한 11인의 복자와 5인의 순교자가 관덕정에서 참수되었고, 감영에서 옥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순교자 수는 18명에 이른다.

 

현재에는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감사의 집무처였던 선화당(대구 유형문화제 1호), 감사의 처소였던 징청각(대구 유형문화제 2호) 및 종루 등 조선시대 관아 건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건물들이 있다. 또한 보물 제842호인 측우대가 선화당 앞에 세워져 있다.

 

- 대안성당과 선화당.

 

 

경상감영공원 북쪽 편에 위치한 대안성당은 경상감영의 감옥터라 전해지며, 이곳에서 옥사 순교한 분들 중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시우 알렉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김세박 암브로시오 등 여섯 분은 2014년 시복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아사(餓死) 순교자이기도 하다.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찾으면 경상감영의 순교자들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나 오늘은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2015년 8월호 필자의 기고를 참조바람).

 

다음 방문지인 이상화, 서상돈 고택을 가기 전에 경상감영공원과 맞닿아 있는 대구근대역사관을 방문하기를 권한다. 이 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돼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 49호로 지정됐다.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 문을 열었다. 근대기의 대구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으니 대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장소라 하겠다. 역사관에서 계산성당으로 이동하다 보면 대구 약령시가 나온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약제의 그윽한 향기를 느끼며 거리를 걸어보고, 한의약박물관에 들러 한약 체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근대골목 서상돈, 이상화 고택

 

이제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과 민족시인 이상화를 만나러 가보자. 계산성당 후문에서 담벼락을 따라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면 세 채의 고택이 나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라 입장할 수 없어 바깥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1~1913)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민족의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신자로서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으며 대구대교구의 초석을 닦는데 크게 기여한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서상돈은 고조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대략 1784년 전후였다. 이듬해 천주교의 첫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 고조부는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 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병인박해 때 서상돈은 세 명의 백부와 숙부들을 잃게 된다. 대구감영 감옥에 갇혀 있는 백부 서인순을 자주 방문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는 백부를 보고 이후 거상(巨商)이 된 후에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 서상돈(좌), 이상화(우) 고택.

 

 

또한 서상돈은 대구교구 설립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10년 조선교구가 분리하여 남방에 하나의 교구가 더 설립될 것이란 소문이 퍼졌는데, 그 본부가 전주가 될지 대구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전주가 더 유력시 되었다. 전주는 초기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신자 수도 대구나 경상도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듣고 당시 대구본당에서는 서상돈을 필두로 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가 설립되었다. 이 ‘명도회’는 대구에 교구 본부를 유치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교구 설정 당시 1만여 평의 부지(현 대구대교구청 및 성모당 인근 부지)를 기증하여 교구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하였으며,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구휼사업과 교육사업에 앞장섰으나, 스스로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 ‘실천적 신앙인’의 모범을 보였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평신도들에게도 시사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상화 고택은 서상돈 고택과 마주보고 있다. 상화시인이 1939년부터 1943년 임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우리 정서를 시적 언어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시인이다. 특히 1926년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계산성당 정문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벽화와 함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가 적혀 있다. 민족의 아픔을 비통해 하는 식민지시대의 젊은 청춘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계산성당과 청라언덕

 

- 계산성당과 동무생각 시비.

 

 

바로 지척에 계산성당이 있다. 국가 지정 사적 290호이기도 한 이 성당은 1899년에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대구본당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가 1903년 11월에 두 개의 종탑을 갖춘 고딕양식 벽돌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이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1918년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에 의해 증축되어 1919년 5월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바 있다. 미사 시간과 겹쳐서 내부를 촬영할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경건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내부 장식으로 해서 비신자들까지도 한 번쯤 들르고 싶은 아름다운 성당이다.

 

성당 앞 대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갈 수 있다.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이니 시간이 나면 반드시 찾아가보기를 권한다. 90계단의 3.1운동 길을 걸어올라 가면 청라언덕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1900년대 초 개신교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집 3채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로 시작되는 박태준 곡의 ‘동무생각’ 시비 등이 있으며,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으므로 고단한 여행객의 발을 쉬어 가는 데는 최적의 장소라 할 만하다.

 

계산성당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성모당과 관덕정도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9월호, 김의도 헤르메네질드(대구 S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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