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강론자료

2016-08-21.....연중 제21주일 다해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8-21 ㅣ No.2135

 

연중 제21주일 (다해)

이사야 66,18-21      히브리 12,5-7.11-13     루카 13,22-30

2016. 8. 21.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어려워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다른 사람이라는 범위에 배우자나 자녀, 또 자신의 부모는 포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하는 범위와는 다른 입장에서 자기 자신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여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전래된 그리스도교신앙에서는 세상만물의 시작과 그 근원을 하느님이라는 존재로부터 해석합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EBS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동양철학에 관한 인문학강좌시간을 통해서 생소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서양신학에서 말하는 같은 하느님을 동양철학에서는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이 상제는 사람이 세상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개념이며, 이 상제의 뜻이 인간에게 행사되는 데는 지켜야 할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사람은 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상제의 뜻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양신학에서 세상을 대하는 것과 다르게 세상을 해석하는 동양철학자 한 사람의 말이니까,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흥분할 일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드러나는 판단이 다르면 삶을 해석하는 시작이 다를 것이고, 그러면 결국 같은 대상을 말하면서도 드러내는 행동의 결과도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느님은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대합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대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느님나라로 들어가겠다고 할까요? 듣는 자세와 판단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은 다릅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초대를 들었으면서도 자기의 생각대로만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좁은 문의 비유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나라에 이르는 도로는 15차선이나 20차선이 될 만큼 널찍한 고속도로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대궐문처럼 큰 것이 아니라, 좁은 문과 같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개념상,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도 인간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동양식의 상제(上帝)’가 아니라, 서양의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뜻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만, 자기 스스로가 만물의 최고 존재라고 여기는 인간은 하느님마저도 자기 생각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느님의 실현되는 일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

 

오늘 독서,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은, 창세기11장이 기록하는 세상최초의 분열, ‘사람이 가진 교만한 마음과 행동의 결과로 사람이 세상의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된 원인을 치유하고 다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백성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듣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대하면서, 그 결과가 늘 좋은 것이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대로 항상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기에, 저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움직이는 그 판단과 행동은 어디선가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이 희생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찾는 일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음 순간으로 미루겠느냐는 것입니다. 힘이 약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힘이 강한 사람일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영광의 장소에 사람이 들어가고,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그 장소를 만들고 준비한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을 앞세운다면 그 좋은 일은 내 삶에 실현되지 않을 일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일에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구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들었습니다만, 내 삶에 다가오는 아픈 기억이나 훈육의 과정을 거부하지 말고,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그것에서 내 삶에 도움이 될 요소,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나 뜻이 선포되는 장소에 드나든 횟수가 많다고 해서 저절로 실현되는 일도 아니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곁에서 음식을 함께 먹었다고 해서 삶이 자동적으로 그 모습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축복에 참여할 수 있는 올바른 삶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3,46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