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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세월호 이후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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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3 ㅣ No.1331

[신앙과 정치] ‘세월호 이후’의 신앙

 

 

1990년 독일이 통일된 뒤 회자한 에피소드라며 들었던 이야기이다.

 

구동독 지역에 살던 노인은 통일이 되자 안과를 찾았다. 노인이 말했다. “지금 내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의사는 노인의 눈을 유심히 진찰해 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할아버지,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노인은 정말 눈이 이상하다며 거듭 말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들은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당최 보이질 않아요. 내 귀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눈이 잘못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노인은 구동독의 매스컴을 통해 들었던 서독을 직접 눈으로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언론이 통제된 세상에서 들은 서독은 전혀 딴판이었다.

 

 

보도 통제, 한국 공영방송의 현실

 

수십 년간 들은 것과 실제로 본 것이 너무 달라 결국 안과를 찾았다는 우스갯소리였으나 왠지 씁쓸했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최근 청와대의 ‘한국방송공사(KBS) 세월호 보도 통제’에 관한 뉴스 때문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현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과 KBS 보도국장(김시곤)의 통화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날(6월 30일)은 마침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의 활동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아직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침몰한 배도 인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수석과 김 국장의 녹취록 공개는 파문을 일으켰다.

 

일단 세상에 알려진 녹취록의 내용만 본다면, 이 전 수석의 요구는 노골적이고 집요했다. “해경 비판은 자제해”주고, “(대통령님이) KBS를 오늘 봤”으니, 보도내용을 교체해 달라는 것이었다. 녹취록 전문을 읽지 않아도 이쯤 되면 시민단체와 언론단체에서 주장하듯 5공 시절‘ 보도지침’에 다름이 아니다. 내년이면 보도지침을 내린 정권의 종말을 알린 1987년 6월 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말이다. 김 국장도 “솔직히 우리만큼 도와준 데가 어디있”냐고 항변한다.

 

이번 녹취록 공개의 본질은 KBS의 인사권을 쥔 청와대가 공영방송의 보도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드러냈다는 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흔히 무슨 스캔들이 발생하면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던 청와대가 이번에는 “홍보수석 본연의 임무”‘(협조 요청’)를 다했다며 이 전 수석을 감쌌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본연의 임무라면 청와대가 지금도 여전히 언론 통제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하며 꼬집었다.

 

국제 언론감시 단체인 ‘국경없는기자회(RSF)’는 2016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를 세계 70위라고 발표했다. 2006년 31위에서 해마다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미 수많은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언론이 넘치는 세상에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2013년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첫해 대국민 담화가 새삼스럽다.

 

 

슬픔을 품은 자비

 

세월호의 부모들은 아직도 거리를 헤매며 왜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아이들이 죽어야 했는지 묻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가 잊히고 있다는 것이 가장 슬프다고 했다. 역사의 시간을 잠시 그때로 돌려보자. 우리가 듣고 본 것이 무엇이었는가? 세월호의 진상규명과 구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부의 뉴스는 금세 사라지고, 구원파의 유병언과 관련된 소식이 시민의 눈과 귀를 매혹했다. 거리로 나선 세월호 부모 앞에는 어버이연합이 마주 서서 얼마나 돈을 뜯어먹으려고 그러느냐며 악다구니를 했다. 참으로 염치없는 짓 아닌가?

 

그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광화문 시복식 광경은 압권이었다. 노란 배지를 가슴에 단 교황은 유민 아빠의 손을 잡아주었고, 고이 접은 노란 손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공영방송의 카메라는 이 현장을 편집하지 못했다. 마치 세월호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많은 시민이 그 광경을 보고 커다란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교황이 떠난 한국은 거기까지였다. 해가 바뀌고 참사 1주년, 2주년이 지나도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배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현장에서 쓰일 철근 278톤이 실려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세월호특조위가 밝혀냈다. 해양수산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아직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이들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도대체 나라 경제가 이 모양인데, 언제까지 지난 일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 주는 돈 받고 그만 잊으라 한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듯 공중파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모두가 무관심해진 듯했다. 올해 세월호 2주기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주최로 봉헌된,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미사였다. 명동성당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상징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삼삼오오 모인 신자들이 명동성당을 가득 메웠다. 세월호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직 시신을 찾아내지 못한 엄마의 고백과 탄원이 시작되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세월호는 그렇게 여전히 남아있는 슬픔이다. 적어도 그러한 공감과 연대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감수성이고 부활신앙의 출발이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가 뒤늦게 제자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만져본 토마스는 그제야 “나의 주님!”이라 말하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렸다(요한 20,24-29 참조).

 

부활의 삶은 그렇게 상처를 통해 시작한다. 자비의 해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비(慈悲)에는 슬픔을 품어낸다는 뜻도 들어있다.

 

 

‘세월호 이후’,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

 

지난 7월 2일에 세상을 떠난 「흑야」의 작가 엘리 위젤과 독일의 정치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를 비롯한 몇 사람이 1977년에 펴낸 책 「아우슈비츠 이후의 하느님(Dimension of the Holocaust)」은 대학살(홀로코스트)의 고통과 상처를 신학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엘리 위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 현장은 하느님의 “죽음을 의미했다. 완전한 죽음, 언어의 죽음, 희망의 죽음, 신뢰의 죽음 그리고 영감의 죽음”이었다. 더욱 역겨운 것은 그러한 죽음이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학살은 ‘기억하고 생생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학살의 역사 앞에서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위젤은 하느님이 관망자라면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이 희생자라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메츠는 중요한 신학적 동기를 보탠다. 곧 아우슈비츠는 역사의 종점이기도 하지만 전환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가스실에서 함께 죽임을 당한 하느님, 십자가에 달려 창에 찔린 예수님만이 희망을 준비하게 한다. 그리하여 “오직 고난받는 하느님만이 인간을 도울 수 있”고, 그러한 하느님이 “자신의 무능을 통해 세상 안에서 당신의 힘과 자리를 얻는다.”는 본 회퍼 목사의 고백은 지독한 야만의 시간을 견디게 한다.

 

어느덧 ‘추모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슬픔과 상처는 결코 신비화될 수 없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가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살과 야만의 시대에 살아남아 증거자의 삶을 산 엘리 위젤을 추모하며 그의 말을 다시 옮겨 적는다. ‘세월호 이후’ 하느님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도 무언가를 계속 모색하고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 대한 신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했던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늘 말했던 것은 이제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사건은 결코 하느님을 통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사건은 하느님 없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신학이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하느님을 설명하려는 나는 누구일까요? 몇몇 사람이 그것을 시도합니다. 나는 그 일이 실패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 그러한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것은 하나의 시도입니다”(독일의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 1989년 10월 28-29일자).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8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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