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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뿌리: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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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59

[영성의 뿌리]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


여성 지위 향상 · 영성 교육에 열정 쏟아



마리아의 종 수녀회를 창설한 페르디난도 마리아 바칠리에리 신부(Ferdinando Maria Baccilieri)는 1821년 5월 14일 이탈리아 캄포도소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부터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교사들의 모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보고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을 열망했다. 1838년 10월 15일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수련기 중 병을 앓아 공동체 생활과 선교활동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고 퇴회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해 1844년 3월 2일 페라라 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바칠리에리 신부는 1851년까지 레노 피날레세 본당에서 보좌로 활동하는 한편 신학교에서 영성 지도를 담당했다. 1852년 갈레아차의 성 마리아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바칠리에리 신부는 본당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각 가정 안에 성모 마리아 신심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1852년 통고의 동정녀 마리아 형제회를 설립했고, 1855년 11월에는 ‘마리아의 종 제3회’를 설립했다.

바칠리에리 신부가 설립한 ‘마리아의 종 제3회’는 123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설립된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기원을 두고, 마리아의 종 제3회 회칙과 바칠리에리 신부가 작성한 회칙을 준수했다. 이들은 공동생활이 아닌 각자의 집에 머무르면서 교리교육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간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862년 초, 동정을 지키기로 한 미혼 여성이 26명에 이르자 비칠리에리 신부는 공식적인 여자 수도회 설립을 계획했고, 그 해 6월 23일 제3회 회원 가운데 수도생활을 희망하는 3명이 이미 마련된 갈레아차의 수녀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날을 마리아의 종 수녀회는 수녀회의 탄생일로 보고 있다.

바칠리에리 신부는 본당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앙교육과 학교 교육에 열성이었다. 또한 전인 교육을 목적으로 ‘성소를 가진 교사’만을 원했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춘 수녀들만이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1881년에는 가난한 여자 아이들을 위해 초등학교를, 그리고 1882년에는 기숙학교를 마련했고, 이후 중학교도 설립했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 수녀들은 주로 전례, 영성지도, 교리교육, 가정방문 등의 봉사를 하고 특히 여성교육과 여성 지위향상에 힘썼다. 또한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자신을 성모 마리아에게 의탁하고,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한 동정녀 마리아와 동행하는 삶을 갈구하며, 마리아가 보인 모범에 따라 생활하려 노력하고 있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는 당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의 초청에 따라 1981년 한국인 수녀 1명과 독일인 수녀 1명을 파견해 한국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 한국 공동체는 발전을 거듭해 1992년 지부로 승격했고, 1998년 청주에서 수원교구로 지부 본부를 이전했다. 교구에서는 정자꽃뫼본당에서 전교사도직을 수행 중이고, 어린이집을 통한 유아교육뿐만 아니라 마리아 이주민 센터, 엠마우스를 통한 사회복지사도직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설립자 바칠리에리 신부는 199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6월 28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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