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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뿌리: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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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58

[영성의 뿌리]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

여성 교육 개선 · 신앙 쇄신에 헌신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창립자 엘렌 마리 필리핀 드 샤뽀땡 드 느빌(Helene Marie Philippine de Chappotin de Neuville)은 1839년 5월 21일 프랑스 낭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860년 글라라 수녀회에 입회했지만 곧 병을 얻어 수녀회에서 나오게 됐다. 그러나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은 그를 다시 이끌었고, 1864년 예수회 지도 신부의 권유로 마리아 속죄회에 입회해 ‘마리 드 라 파시옹(Marie de la Passion)’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인도로 파견돼 그곳에서 12년 동안 전교사로서 활동했다.

그의 생애는 이 이름, 수난이란 뜻과 동시에 열정을 뜻하는 ‘파시옹(Passion)’으로 요약할 수 있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속죄회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된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는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러나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과 본부와의 어려운 통신사정으로 인해 오해와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속죄회 인도 선교지 소속 수도자 20명은 속죄회를 떠나 서원생활을 계속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1876년 마리아 속죄회를 탈회하게 된 마리 드 라 파시옹 수녀와 20여 명의 수도자들은 우타카문드 교구 소속의 공동체로서 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교황 비오 9세에게 청원했고, 교황은 ‘마리아의 전교자’라는 이름으로 선교 사업에 헌신할 수녀회의 창립을 허락했다.

1882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진출해 수녀원을 건립한 후 프란치스코 성인 탄생 700주년 기념 축일에 프란치스코 수도 3회에 가입하면서 영성의 뿌리를 굳건히 했다. 1885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 얻어 수도회의 공식 명칭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변경했다.

일찍이 인도에서 여성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했던 그는 세계 어디서든 여성의 교육과 상황개선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와 사회의 필요에도 민감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기를 기도했으며, 로마의 수녀원은 신앙을 쇄신하러 로마에 오는 순례객들에게 늘 열려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산업혁명 이후 새로 부상한 노동자 계층을 이해했으며, 그들을 위한 활동에 시간을 냈다. 그 시대의 문제를 일찍 깨달은 선각자나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은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서 지지와 격려, 충고를 얻을 수 있었다. 수녀원의 객실은 자주 사회운동가들의 토론장으로 사용됐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1958년 부산대목구장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해 현재 한국 관구에 21개 공동체에 사목 중이다. 교구 내에는 수련원인 ‘한국 순교자 공동체’와 노인요양원인 글라라의 집 ‘성녀 글라라 공동체’, 안산대리구 시흥지구 4개 성당에서 봉사하는 ‘성 바오로 공동체’가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6월 21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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